한창우

 



'''한창우'''
韓昌祐
'''이름'''
한창우 (韓昌祐)
'''출생'''
1931년 2월 15일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
(現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동)
'''국적'''
[image] 대한민국[image] 일본[1]
'''학력'''
호세이대학 경제학부 학사
'''직업'''
기업인, CEO
'''자녀'''
아들 한유우
1. 개요
2. 생애
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센징이라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이 나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어 주었죠"

대한민국 출신의 일본 기업가. 파친코 기업 마루한의 오너이자 창업자.

2. 생애


1931년 2월 15일 생 한정수,양건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경상남도 사천군(삼천포) 출신으로, 5남매 중 셋째이다. 히노데 소학교에서 줄곧 1등을 하였으나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였을 때, 동네 읍장이 돈을 대준 덕에 1944년 삼천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시위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한다. 학비를 대준 읍장이 좌익이었기에 당시 우익 청년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창우 씨의 어머니는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미장일을 하고 있던 큰 형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밀항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어사전과 쌀 두 되만을 가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석탄 기차에 몸을 싣고 형을 찾아 도쿄로 갔다. 벽돌공을 하는 도중 몇 번이나 결핵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조센징이라 차별하는 분위기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교토에 있는 매형의 파친코점에서 일을 도왔다. 마침 매형 가게 옆에 더 좋은 파친코 가게가 들어서서 매형이 가게를 처분하려 하자, 그는 매형의 가게를 헐값에 인수하여 자기만의 경영시스템으로 돈을 벌고 사업도 확장하게 된다. 한창우 본인 말로는 젊은 사람이 순진하게도 파친코 기계조작을 안하니 대박이 잘 터진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고..
영업이 잘 돼 효고현, 도요오카와 교토 마이쓰루 등으로 업장을 확대하고 1967년 일본에서 3번째로 큰 볼링장 사업을 시작했지만, 1차 오일 쇼크가 터지며 5년만에 60억엔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극단의 나쁜 생각도 하게 되었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주위 분들과 가족을 생각하며 다시 사업에 전념한다. 이 때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재기를 다짐했다고 한다. 본업인 파친코로 돌아와 10여년간 고생을 한 끝에 활로를 찾았으나 1976년 장남 '한철'이 미국 여행 도중 강에 빠져 사망하는 시련이 닥쳐왔다.
아들의 죽음은 그를 충격으로 내몰았고 사업도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그는 1980년 등장한 신형 파친코 기계 '피버'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재기에 성공했다. 이왕 파친코 사업을 할 바엔 일본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점포 안의 담배연기를 없애는 시설과 손님에게 90도로 인사하는 종업원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등 기존 업체에서는 상상도 못할 새로운 서비스와 경영기법을 도입하였다. 또한 폭력단체의 개입을 차단하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등 파친코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는데도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불과 10년 만에 어마어마한 부채를 다 갚고 1995년 도쿄 진출에 성공하였으며, 점포가 일본 전국에 200여 개로 늘어나 1년 매출이 무려 12조원에 이르러 별명 그대로 '파칭코왕' 이 되었다. 이후 파친코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푸드서비스업, 청소용역업, 광고업, 건축업, 보험업, 은행업에 차례로 진출한 마루한은 연간 30조원의 매출을 내는 일본 30대 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벌인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곤주호상, 수이호상(제3등 훈장)을 수상했고,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창우나카코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사천 지역 학교에 10여 년간 6억5000만 원의 장학금을 쾌척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2001년 노인이 되어 일본에 귀화하였으나 손 마사요시와 다르게 아예 한국 한자 거의 그대로 귀화하고, 여권에 한국식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적어넣었다.

3. 여담


  • 한때 일본 10위권의 부호였으나 파칭코 산업이 상당히 위축된 현재는 대략 20위권에 집계되고 있다.
  • 자신의 번 돈 절반은 한일 양국의 우호발전을 위해 자선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아들은 한유우이고 손녀 한나경이 있다
[1] 2001년에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