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씨)

 



1. 解
2. 海
2.1. 본관
2.2. 유래
2.3. 유명인


1. 解


우리나라 고대 성씨 중 하나. 한자 解는 음차어이며, 박씨와 함께 말 그대로 태양을 상징하는 몇 안되는 순우리말 성씨 중에 하나이다. 북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해모수(解慕漱)를 시조로 하며, 부여의 왕성(王姓)이었다. 해모수마찬가지로 조상으로 보는 고구려 왕성(王姓) 고씨나 백제 왕성(王姓) 서씨, 여씨는 그 후손이 현존하지만, 정작 해(解)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 상으로는 겨우 9명만 있는 것으로 나온다.

2. 海



2.1. 본관


본관은 김해, 영암, 함양 등 3개가 있다. 2000년도 인구 조사 당시 김해 149명, 영암 121명, 함양 48명 등 322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김해 142명, 기타 4명 등 총 146명으로 대폭 줄었다.[1]

2.2. 유래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김해 6가구, 진주 1가구, 본관 불명 1가구 등 총 8가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지역별
전라남도 목포부 호남정(현 목포시 호남동) - 김해 해씨 해종한(海宗漢) 1가구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수산리 - 김해 해씨 해춘수(海春洙), 해낙서(海洛瑞), 해경욱(海京旭) 3가구
●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하촌리(현 나주시 반남면 성계리) - 김해 해씨 해대례(海大禮), 해일순(海溢順) 2가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용산리 - 진주 해씨 해종수(海宗洙) 1가구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현 영암읍) 농덕리 - 본관 불명 해학중(海學仲) 1가구
※ 8가구 모두 전라남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영암군에 김해 해씨 3가구, 진주 해씨 1가구, 본관 불명 1가구, 그리고 나주시에 김해 해씨 2가구, 목포시에 김해 해씨 1가구가 나타났다.
이중 전라남도 목포부 호남정(현 목포시 호남동)에 살던 해종한(海宗漢)씨는 해씨가 명 태조 때 중국에서 이주해 온 귀화성[2]이라고 전하였으며,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용산리에 살던 해종수(海宗洙)씨는 그 내력에 대해 당시로부터 약 50년 전[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주해왔다고 증언했다.
한편, 김해 해씨 문중에서는 시조를 명나라 홍무제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해서필(海瑞必)로 삼고 있다. 해서필은 호가 양촌(陽村)으로 홍무제의 명을 받아 대도독(大都督)의 직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조선 태조가 그의 공훈을 높이 사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에 책봉하였다고 한다.[5] 시조의 묘는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에 있다.#

2.3. 유명인


이 성씨를 가진 유명인으로 프로게이머 해성민·해성호 형제와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부장판사 해덕진(海德珍),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의 복싱 챔피언 해학기(海學基)[6]가 있다.

[1] 사실 이런 식으로 줄어든 이유는 2008년경 호주제 폐지로 등으로 인해 그 이후 태어난 신생아들의 다수가 성씨를 포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성씨 때문에 놀림받은 경우가 대다수.[2] 이와 관련하여 명나라의 유명한 청백리였던 해서가 있다.[3] 1880년경[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어판 위키백과보다 훨씬 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5] 해서필(海瑞必)이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워 봉군까지 될 정도였다면,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의 이름을 단 한 차례라도 논하지 않았을리가 없으며, 또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부상서는 조선시대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서 명나라 초기에 이부상서를 지낼만큼 고위관료였다면 적어도 바이두 백과[4]의 이부상서(吏部尚书) 항목에 언급되었을텐데, 바이두 자체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신원이 불확실하므로 믿기는 어려운 정보이다.[6]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3동에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