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발(1874)
1. 개요
허발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자 학자이다.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국민들에게 나누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했다.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김해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에서 힘쓴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허발은 1874년 경상도 김해도호부 활천면 마마동(현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허관[3] 은 가난했던 집안을 일으켰고,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돌보았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허발의 인생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허발은 집현재에서 한학을 배우고 1894년 1월 26일 조선 최후의 식년시 진사시에 3등 912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허발은 급변하는 시대의 신학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 측량학교에 입학했다.
측량학교 졸업 후 허발은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지었다. 1909년 조선민족 자본을 형성을 목적으로 김해금융조합을 설립하였고, 나아가 1919년 김해은행 설립자본금 50만원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끝내 허가를 득하지 못하였다.
허발은 1918년 곡식 100석을 매입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값으로 판매했다. 이 일은 매일신보(1918년 10월 24일)에 기사로 실렸다.
1918년부터 진영에서 곡물상을 시작했는데, 이 곡물상을 통해 서울과 인천 등지로 엄청난 쌀이 실려 나갔다. 그러나 허발은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표면상으로 곡물상이었지만 곡물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발의 손녀 허해옥씨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허발은 할머니에게만 독립운동가인 '김 씨'를 만나고 왔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김 씨'는 다름아닌 김구 였다.
허발은 또한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설립한 '경남인쇄'의 대주주였다. 백산은 백산상회·백산무역·경남인쇄 등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는데, 허발 역시 백산과 함께 활동한 것이다.
1919년 서상동에 김해사립합성학교를 설립했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0년 7월 29일 낙동강 최하류 김해에 큰 홍수가 났다. 이때 박석권 백미 150승(되), 허발 150승, 장석호 씨 150승을 구호물품으로 지급했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이후에도 낙동강에서는 수 차례 홍수가 일어났고, 이때마다 허발은 이재등 민을 돕는 데 앞장섰다.
허발은 1929년 7월에 합성학교에서 '김해 한글 강좌'를 열었다. 한글 수업이 끝나면 가락국의 고대역사와 고적을 소개하는 시간도 따로 가졌다. 1928년 4월 15일에는 김해군민 대운동회가 합성학교에서 열렸다.
구포와 강서구 대저동을 연결하는 구포다리를 놓을 때 가교지점을 구포로 할지, 사상으로 할지 의견이 둘로 갈리었다. 허발은 낙동장교의 가교지점을 김해와 가까운 구포에 세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허발은 1931년 6월 12일 말을 타고 활천고개를 넘어 퇴근하던 도중 일본경찰의 습격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의 언론은 허발이 뜻밖의 병으로 별세했다고 보도했으나, 훗날 부인의 증언에 의해 살해됐음이 밝혀졌다.
장례식에는 김해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문상객이 모여들어 허발의 죽음을 애도했다. 손녀 허해옥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5만여명 이상이 몰려들어 상갓집에서 장유의 장지까지 가는 동안 500m마다 상을 놓아 문상객을 접대했다고한다.
3. 여담
- 김해합성초등학교 본관 입구 왼편에 1967년 '허발 박석권 선생 공적기념비'가 세워졌다. 비에 새겨진 글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철학박사 안호상 선생이 지었다.
4.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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