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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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安浩相 | Ahn Ho-sang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02년 1월 23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現 경상남도 의령군 입산로2길 13-6)
'''사망'''
1999년 2월 21일 (향년 97세)
'''본관'''
탐진 안씨
'''호'''
한뫼
'''재임기간'''
초대 문교부 장관
1948년 8월 3일 ~ 1950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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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안석제, 어머니 김야동
'''배우자'''
모윤숙 (이혼)
유유정(재혼)
'''자녀'''
아들 안경홍, 딸 안경선
'''학력'''
세이소쿠영어학교 (졸업)
중덕학교 (예과 / 졸업)
예나 대학교 (철학 / 박사)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약력'''
초대 문교부 장관

1. 개요
2. 생애
3. 성향
3.1. 단군민족주의 제창
3.2. 파시스트
3.3. 일민주의
4. 선거 이력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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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 독립운동가, 철학자.

2. 생애


1902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1]에서 안석제(安奭濟)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19세 때) 대종교에 입문했고, 그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 있는 중덕학교(中德學校 현 국립 퉁지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1924년 7월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25년 5월부터 독일의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브루노 바우흐(B. Bauch), 에버하르트 그리제바흐(E. Grisebach), 오토 쾰로이터(O. Koellreutter), 루돌프 휘브너(R. Hübner), 유스투스 빌헬름 헤데만(J. W. Hedemann) 교수[2] 등의 강의를 들었고, 헤겔 학도가 되었다. 1929년 독일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1929년 ~ 193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하였고, 1930년에는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와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있었다.
1933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한국 철학연구회 1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 이광수의 소개로 여류문인 모윤숙(毛允淑)과 결혼하였으나 뒤에 이혼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병중(病中)이어서 체포는 면하였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 김영삼이 철학과에 입학하여 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자 이범석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1948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이념을 토대로 한국교육의 방향을 설정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박종홍과 함께 참여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 만난 역사학자 손진태를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으로 특별발탁하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만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 그러나 1967년에는 박정희의 특사로 국제사회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1969년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회장, 사회정화 대책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3~1976년까지는 마을금고연합회(현 새마을금고) 초대 회장, 1981년부터 1991년까지는 한성학원, 한성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에는 경희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는 대종교 14대 총전교[4]를 지냈다. 1995년 북한의 단군릉 개건 기념 어천절 행사에, 대종교 교주 자격으로 참가하고자 북한에 밀입북한 적이 있다. #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대공용의점이 없고 고령이라는 나이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북한에 밀입북한 혐의만 처벌받았다. 당시 같이 밀입북했던 이는 구속되어서 논란이 되었다.
1999년 사망하였고, 사회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성향



3.1. 단군민족주의 제창


단기 연호에도 영향을 받았고, 오늘날 개천절 국경일, 홍익인간 교육 이념에도 영향을 준건 분명하다.

안호상은 이승만정부에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단군민족주의로부터의 큰 영향속에 학문과 실천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단군민족주의의 종교방면 전개라 할 수 있는 대종교와의 인연이 중요한데, 그는 청년기에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노년기에는 교단의 최고 수장 직도 수행했었다. 이 논문에서는 안호상의 활동노선과 학문연구 및 일민주의 정치이론을 단군민족주의와의 관련속에서 분석하였다.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첫째, 안호상의 활동과 사상을 단군민족주의와의 관련 속에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가 단군민족주의자가 된 과정과 단군민족주의의 실천과 활성화를 위해 힘쓴 내역을 살폈다. 둘째, 안호상의 일민주의를 특히 단군민족주의와 연계속에 살피고자 하였다. 단군민족주의가 발굴한 자료들에 기초하였고 단군민족주의적 민족적 공동운명론을 정책적으로 구체화하였음을 밝혔다. 셋째, 안호상의 단군민족주의를 평가해보고자 하였다. 논문에서는 안호상의 사상과 학문을 전체주의・국가주의・파시즘・유사역사학이라고 매도하기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가 전개하는 민족적 공동운명체론은, 개인자유주의를 넘어서 공동체적 통합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상적 대안으로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중독・왜독・양독의 삼독극복론과 연구성과들 역시 우리의 학술연구 자세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상력을 보강해준다. 그러나 반공 노선과 대한민국 국가를 민족・단군・통일 등과 같은 가치・과제보다 우선시한 것이나, 전쟁 및 좌우대결 과정에 빚어진 민족적 희생과 이승만의 독재권력 강화에 대해 침묵한 것은 단군민족주의의 기본지향에서 이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대한 민족사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과학적 엄밀성에서 후퇴한 것 역시 신채호가 정립했던 단군민족주의적 국학정신으로부터 크게 퇴보한 것이라 평가하였다.

-정영훈(2018.12 논문. 안호상과 일민주의의 단군민족주의)


3.2. 파시스트


파시스트라는 평가가 있다.
그 외에도 제3제국 당시 독일에서 유학을 해서 그런지 나치를 상당히 좋게 봤다. 실제로 안호상은 독일 예나대학에서 유학했을 당시인 1930년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들은 일도 있다.
나치 미화와 정당화를 교묘히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했다.

미영은 자본주의, 노서아는 공산주의, 독일은 나치스, 이태리는 파쇼주의,이와 같이 여러 나 라들은 저마다 제 주의를 서로 다퉈가면서 세계에 퍼트리기에 바뻤든 것입니다. 미영의 자본주의의 뿌리는 각 나라의 지배급에 깊이 박혔으며 노서아 공산주의의 덩굴은 세계 무산대중 에게 넓게 뻐쳤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리 파쇼와 독일의 나치스는 그 역사가 짧은 것만큼 그들 본국을 떠나선 아직까지 큰 지반을 갖이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독일은 신작 나치스주의 로 국민의 사상을 철석같이 굳게 하여 경제적으로 파멸된 독일을 부흥시키기에 왼 힘을 다하였읍니다. 그런 결과 마츰내 중단되였든 독일 역사는 새 진행을 하게 되여 잃어버렸든 독일 백성의 명예는 차々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수의 세계 시청은 이제야 바야흐로 이 나치 스 리론의 매력에 흥미와 호기심을 점점 깊어가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단 두려워 하고 미워하는 이들은 두 말할 것 없이 미영계통의 자본주의와 노서아계통의 공산주의였읍니다. 만일 독일 나치스가 이와 같은 속도와 위력으로서 발전해간다면 기성 세계를 갖은 미영 과 또 인제 겨우 자리를 잡은 노서아는 사상적으로,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크나큰 타격 을 받아 앵글싹손족의 세계자본가의 지배권과 슬라브족의 세계무산자의 통치력이 반드시 줄 어질 것은 밝기가 불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또 미리 잘 보고 있는 미영과 노서아로서는 이 독일 나치스를 그대로 둘 리는 절대로 없었든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은 미영과 노서아의 대항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대항에 대항 만 하면서,오직 제가 정한 길만을 걸어갈 뿐이었읍니다. 여러분,그러면 여기에 올 것은 무 엇일까요? 그것은 아무 다른 것이 아니고, 오직 충돌과 싸움뿐입니다. 그리하여 千九百三十 九年 八月卅日 새벽에 독일 파란, 두 나라는 마츰내 제二차 세계대전쟁의 불뚜껑을 열고 말 았읍니다.

- 安浩相『우리의 부르짖음』(文化堂, 1947), 39~40

그는 있는 힘과 있는 열을 다하여 하는 말이 "우리는 빵과 노동과 자유를 원한다. 이 원을 풀어줄 이는 오직 나치스뿐이다. 이 원을 해결하는 데 비로소 나치스 승리, 즉 독일의 승리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독일의 승리를 획득하거든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나치스로 오게 하라!" 할 때에 죽은 듯한 군중은 다시 새 생명이나 얻은 듯이 "히틀러 만세"를 열광적으로 외쳐 부른다. 흥분한 군중을 그는 다시 진정시키고 말을 계속하여 "독일을 망쳐준 자는 베르사유 조약을 작성한 연합국보다 오히려 그 조약에 서명한 독일의 유태적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다" 라고 브르짖을 적에 군중으로부터 쏱아지는 "Ja!"(그렇다) 소리는 대양 위에 폭풍우 밀리듯 하였다.(...) 그의 행동은 철혈로서 된 것 같으며 그의 말은 금심으로 우러나오는 듯하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취와 신뢰를 아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역대 혁명가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또한 위대한 웅변의 소유자이다. 어떠한 혁명가에 있어서든지 웅변은 위대한 무기였었지만, 히틀러에게 있어선 그것이 위대할 뿐만 아니라 최고로 발달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게끔 되었다.

安浩相,『히틀러, 아인스타인, 오이켄 제씨의 인상』조광 1938년 11월호

세계가 나치즘에 매력을 느끼는데 미영계통의 자본주의와 러시아 계통의 공산주의가 나치즘을 두렵고 미워해서 나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헛소리를 노골적으로 했다.

3.3. 일민주의


"우리 3천만의 최고영도자이신 이승만 박사의 밝은 이성의 판단과 맑은 양심의 반성과, 그리고 또 굳센 의지의 결정으로서(중략)3천만 겨레는 재래의 모든 주의들과 주장들을 모조리 다 버리고 오직 이 일민주의의 깃발 밑으로만 모여야 된다.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

안호상, 『一民主義의 본바탕』 중

1949년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一民主義)[5]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다. 본래 일민주의는 이승만이 제시한 구호수준의 단어였는데, 안호상에 의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민주의는 대한국민당의 당 이념이 되었고 일민주의 보급회에 의한 국민운동으로 나아갔다.
문교부 장관시절인 1949년 2월 18일에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였다. 이는 당시 국회의 반대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히틀러의 유겐트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안호상은 당시 국시였던 일민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1949년 12월 일민주의보급회 부회장직에 선출되었으며, 관련 이론서들을 저술하면서 일민주의를 적극 홍보하였다. # 그의 저서인 『일민주의의 본바탕』(1950)에서는 '하나의 민족에는 하나의 사상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의 지도원리가 되기에는 천박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뭉쳐 이승만 대통령의 영도에 따라 움직여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이후 안호상은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한백성주의'를 탄생시켰다. 이 사상은 모든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하나로 일체화된 단일민족의 통일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파시스트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6]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5선거구)
무소속
1,768표 (8.73%)
낙선 (3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참의원)
무소속

'''당선'''
[7]

5. 여담


  • 제3제국 당시 독일 유학 경험 탓인지 나치 독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나치주의자는 아니라고 서술했다.
[1] 탐진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운동가 안창제·안효제·안희제와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도 이 마을 출신이다. 안호상의 생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39호로 지정되었다.[2] 이 중에서 쾰로이터와 헤데만은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3] 이는 한국인으로는 다섯번 째라고 한다.[4] 본래 교주를 가리키는 명칭이 '도사교'였으나 3대 도사교 윤세복이 총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엄밀히 말해서 16대 교주이다.[5] '하나의 국민(一民)'으로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통치이념[6] 그와 가장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으로는 한국 무장독립운동의 대부인 철기 이범석이 있다. 이범석 또한 나치의 패망은 안타까워 했다.[7]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