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디 라마르

 


[image]
'''이름'''
헤디 라마르 (Hedy Lamarr)
'''본명'''
헤트비히 에파 마리아 키슬러
(Hedwig Eva Maria Kiesler)
'''국적'''
오스트리아 [image] (1914–1953)
미국 [image] (1953–2000)
'''출생'''
1914년 1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2000년 1월 19일, 플로리다 주 캐슬베리
'''직업'''
배우, 발명가
'''신장'''
170cm
'''데뷔'''
1933년 영화 '엑스터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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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헤디 라마르
HEDY LAMARR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ffd700 위치}}}'''
'''}}}#ffd700 6247 Hollywood Blvd.}}}'''

1. 개요
2. 성장 과정
3. 영화인으로서의 헤디
3.1. 필모그래피
4. 발명인으로서의 헤디
5. 그녀의 남편들
6. 사건사고
7. 여담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여성 배우이자 발명가. 30여년 동안 배우로 활약하며 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1]되기도 하였다. 대중에게는 섹스 심벌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발명가로서 기술발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2. 성장 과정


헤드비히는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시작된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은행가였던 아버지 에밀 키슬러와 부다페스트 출신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거트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대계였다.
어린 시절에는 발레나 피아노를 배우는 등 전형적인 당대 부유층 영애답게 성장하였으나, 이 때부터 틈만 나면 시계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는 등 공작과 개발에 대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3. 영화인으로서의 헤디


'''백설공주의 실제 모델, 쇼 비즈니스가 만든 가장 화려한 스타, 영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스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헤디 라마르의 활동 기간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들

헤디 라마르는 193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화 엑스타시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의 보수적인 풍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펼친 최초의 오르가즘 연기[2]와 전라로 숲 속을 달리는 장면은 영화계에 큰 쇼크를 주었다. 헤디 라마르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순종적이고 얼굴만 예쁜 배우에 머무르지 않고 관능적인 섹슈얼리즘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이 영화는 남편이었던 만들에 의해서 가위질을 당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헤디는 《알지에》로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헐리우드에선 헤디 라마르를 능가하는 미모의 여배우가 없다고 할 정도로 높은 주가를 자랑하게 된다. 라마르는 이국적이고 정서가 불안정한, '배신을 잘 할 것 같은' 매혹적인 여인 역할을 주로 맡았고 이는 헐리우드에서는 고혹적인 외국 미녀가 아닌 '가장 미국적인 여자'를 선택한다는 고정적인 클리셰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I Take This Woman》와 《토티야 플랫》에선 연기파로서의 성장도 이룬다.
이 시기에 헤디 라마르는 파블로 피카소, 찰리 채플린, 클라크 게이블, 존 F 케네디 등의 거물급 인사들과 교류하며 1940년대의 영화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론 그 스스로가 감독이 되고 싶어하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생애를 꾸린 인물다운 시도였다.
그러나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은 그가 발명가로서 이룬 업적과 성과를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1940년대의 헐리우드는 배우들에게 성고정적인 이미지만를 강요했고, 오직 헤디의 관능적인 미모만을 부각시키며 그 이외의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헤디 라마르도 살아생전 이런 사회적 시선에 불만을 토로했다.

3.1. 필모그래피


  • 엑스타시(1933)
  • 알제(1938)
  • 열대의 숙녀(1939)
  • 붐 타운(1940)
  • I take this woman(1940)
  • 지그펠트 걸 (1941)
  • 화이트 카고(1942)
  • 토티야 플랫(1942)
  • 위험한 실험(1944)
  • 낯선 여인(1946)
  • 디스아너드 레이디(1947)
  • 삼손과 데릴라(1949)
  • 여권이 없는 여자(1950)
  • 내가 좋아하는 스파이(1951)
  • 인류의 이야기(1957)
  • 밤쉘(2017)[3]

4. 발명인으로서의 헤디


세간에선 원래부터 시계를 분해 후 재조립하거나 화학을 탐구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공계에 뛰어든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그녀의 첫 남편인 프리드리히 만들은 그녀보다 13살이나 많은 연상에 무기상으로 돈을 번 거부였다. 그는 헤디가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겨서, 필름을 불태우거나 외출을 금지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적 방식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이에 더해 아예 헤디의 사회적 관심을 차단하려 무기상이나 과학자들과의 모임에 그녀를 참석하게 만들었는데, 때마침 공학에 관심이 많던 헤디는 그들 사이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만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사상에 감화되어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헤디와 충돌했고, 그녀는 결국 하녀로 분장해 파리로 도주한 뒤 그와 이혼하게 된다. [4]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헤디 라마르"로 개명한 후 낮에는 배우의 길, 밤에는 발명가의 길이라는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헤디는 어린이를 포함한 피난민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 연합군을 도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헤디가 관심을 보인 것은 무선조종이 필요한 어뢰 개발 분야였고, 그는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선조종에는 반드시 보안이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작곡가 조지 앤틸(앤타일)과 함께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서 착안하여 항공모함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통신을 주고받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후 이것의 개발에도 성공하여 주파수 도약(일명 FHSS)이라는 명칭으로 1942년 미국에 특허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이후 헤디는 이 기술을 미국 해군에 기증했으나 군에서도 역시 효용성의 문제를 들어 반려하였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섹스심벌인 여성 배우가 개발한 기술을 신뢰하지 않았던 통념의 영향이 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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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헤디와 앤틸이 특허를 내기 위해 제출했던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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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미국 군사전문지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그렇게 이 기술은 묻혀갔으나, 이후 무선통신기술의 발전하면서 헤디가 이뤄낸 주파수 변조를 통한 송수신자간의 암호화 개념은 BT/WI-FI에 통합되어 쓰이고 있다. [6]
이후 라마르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과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이름이 올린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1997년 헤디와 앤틸은 FHSS의 사회 공헌력을 인정받아 미국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상을 수여받는다. 헤디 라마르는 시상 당시 "때가 왔군요"라는 짧은 소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엔 사용한 휴지를 버릴 수 있는 곽티슈 등 작은 발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다가 2000년에 플로리다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업적은 그녀의 사후인 2014년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5. 그녀의 남편들


  • 프리드리히 만들(1933~1937): 유태계 무기상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인으로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세뇌되어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특유의 독선적인 성격으로 헤디의 배우생활을 방해하였으나 대신 과학자로서의 삶에는 도움을 주었다. 이후 파시즘을 혐오하고 연합군을 지지했던 헤디는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을 감시하던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만든 후, 하녀로 변장하여[7] 프랑스로 도주하였다. 만들은 그녀를 추적하지만, 헤디는 영국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여 이혼에 성공하게 된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냈다.
  • 진 마키(1939~1941): 미국의 극작가 겸 제작가. 헤디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두 번째로 결혼한 남편. 특허를 낼 때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를 '헤디 키슬러 마키'로 등록했다. 그와 슬하에 제임스 라마르 마키라는 자녀를 두었다. 헤디는 이혼 소송에서 3년 간의 결혼 생활 중 실제로 같이 지낸 날짜는 불과 4일이었다고 진술했으며 판사는 이후 결혼할 시엔 장래 남편과 최소 3주 이상을 동거할 것이며 그 사실을 진 마키에게 통보할 것을 권고하였다.
  • 존 로더(1943~1947): 미국의 영화배우. 헤디와 사이에 안소니 로더와 데니스 로더라는 자녀를 두었으며, 제임스 마키 역시 양아들로 입적하여 제임스 라마르 로더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소니와 데니스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임종을 지켰으며 제임스는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상속 분쟁을 일으켰다.
  • 어니스트 테드 슈타우퍼(1951~1952): 애칭 '테디' 슈타우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악단 지휘자 겸 사업가로 나이트클럽과 식당을 운영했다.
  • 하워드 리(1953~1960): 텍사스의 석유재벌. 그녀와 가장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한 인물이다.
  • 루이스 J. 보이스(1963~1965): 미국의 변호사. 헤디보다 6살의 연하였으며 헤디의 이혼 소송을 담당하다가 그와 결혼하였다.

6. 사건사고


헤디 라마르는 커리어가 사양길에 접어든 이후, 1965년에 상점에서 물건을 산 후 값을 치르지 않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헤디는 이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지만 이로 인해 크게 비난받았다. 앤디 워홀은 1년 후 이 사건을 소재로 《헤디》라는 이름의 영화를 만들고, 유명 여배우가 좀도둑질을 하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 직후 헤디 라마르는 영화계약이 무산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헤디는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은둔하나, 1991년 또 다시 절도 미수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고소는 기각되었지만 과거의 사건과 더불어서 또 다시 이미지가 무너지는 고초를 겪었다.
96년 코렐의 커버디자인 콘테스트에서 그녀의 그림이 우승을했고 97년 커버표지로 사용된다 이후 그녀는 코렐에 소송을 제기하고 코렐사와의 비공개 합의를 했다.
2000년 그녀가 사망했을 당시 남긴 유산이 약 330만 달러였다. 이때 이미 의절한 양자의 유산 상속소송이 있었고 일부 승소하여 5만 달러의 재산을 상속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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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2015년 헤디 라마르의 탄생 101주년을 맞이해 구글두들과 함께 헌정 형상을 발표하면서 NO HEDY LAMARR, NO GOOGLE(헤디 라마르가 없으면 구글도 없다)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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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 드로우 패키지에 그려진 도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하프라이프 2에 등장하는 클라이너 박사의 애완 헤드크랩라마르의 이름 또한 그녀에게서 따 왔다. 풀 네임이 헤디 라마르로 그대로 따 온 것.
드라마 에이전트 카터에 등장한 휘트니 프로스트의 캐릭터성도 그녀를 모티브로 만들었단 이야기도 있다.

[1] 우수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오름.[2] 감독이 발바닥을 바늘로 찔러서 연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3] 사후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등장한다.[4] 1941년 출연작 Come Live with Me에서 헤디가 맡은 조니 존스는 사실상 자전적인 캐릭터다. 이 영화에서 조니는 오스트리아 망명객으로 등장한다.[5] 오스트리아 국적, 즉 연합국의 적국 국민 이라는 이유로 특허를 몰수당한 것은 아니다. 당시 특허신청은 받아들여졌고 2020년 2월 1일부로 특허권이 정상적으로 만료되었다. 또한 당시 이미 군에서 비슷한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민간에 알릴 수 없었으며, 헤디의 기술은 이론적인 상태였고 이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기에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뿐이다.[6] 해당 특허는 2020년 2월 1일 만료되었다. 그녀의 특허가 무선 통신에 많은 영향을 준건 사실이지만 기술적인 특허와의 관계는 없다.[7] 혹자는 하녀와 몰래 계획하여 댄스파티에서 변장하고 몰래 탈출했다고도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