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젤 참사

 




1. 개요
2. 경기 결과
3. 사건 이후
4. 관련 문서


1. 개요


'''Heysel Stadium Disaster'''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 에이젤(영어로 헤이젤)에 위치한 스타드 루아 보두앵에서 일어난 훌리건 난동으로 인한 혼란에 구조물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사건. 폭력사건이기에 '헤이젤 폭동'이라고도 불린다. '''리버풀 팬들의 가장 큰 흑역사'''로 기억되는 사건.
당시 유럽 프로축구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 디비전 1과 이탈리아세리에 A가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놓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984-85 시즌 유러피언컵[1] 결승에서 두 리그를 대표하는 양대 거두인 리버풀유벤투스가 만났다.
리버풀의 팬들은 당시 훌리건으로 유럽 대륙에 악명을 떨쳤고, 유벤투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울트라들을 거느렸다. 거기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보두앵 경기장은 1930년에 지은 낡은 구장이라 안전상 문제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사건은 예견된 셈이었다. 특히 양 서포터들의 구역을 가로막는 벽도 없었고 출입구도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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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부터 이미 서포터 배치에 문제가 있었다. X 구역과 인접한 Z 구역에 중립 팬들이 자리잡을 예정이었지만, 여기에 유벤투스 팬들이 뒤였다. 특히 X구역과 Z 구역 사이의 경계에는 격리벽이 없고 쇠로 된 자그마한 경계 울타리와 경찰들로 이루어진 경계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 서포터들은 서로를 야유하며 돌팔매질을 하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서포터들이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리버풀 팬들이 울타리와 경찰을 넘어 상대편을 향해 뛰어들어갔는데, 그네들이 공격한 대상 중에는 일반 관람객들도 있었다.[2] 이에 대응해 유벤투스 서포터들도 맞섰지만,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유벤투스 서포터와 일반 팬들이었다. 리버풀 서포터의 공세에 밀리며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Z 구역의 외곽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면서 '''39명이 사망하고[3]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리버풀 팬 14명 중 7명은 징역 3년, 나머지 7명에게는 집행유예 3년 처분을 받았다. 5개월 간 추가로 재판하여 리버풀 팬 10명이 무죄를, 당시 사태를 방관했던 벨기에 공무원 두 명(1명은 Z 구역 담당 경찰관, 1명은 벨기에 축구협회 쪽 관계자)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또한 UEFA는 잉글랜드 클럽팀들에게 '''향후 5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 사건을 일으킨 리버풀에게는 '''향후 7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4]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경비를 소홀히 했다고 경찰에게도 피해자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문제의 원흉이 리버풀 서포터로 밝혀져 기각되었다. 구속된 훌리건들은 살인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자세한 사항은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다.#

2. 경기 결과



'''1984-85 European Cup Final'''
'''1985. 05. 29 / 스타드 루아 보두앵 (벨기에, 브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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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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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1 - 0'''
'''56' 미셸 플라티니 (PK) '''
'''- '''
'''Man Of the Match: '''미셸 플라티니''' / 관중 수: 59,000명'''
경기는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되어''' 미셸 플라티니의 페널티 골로 유벤투스가 1-0으로 승리했다. 유벤투스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 사실 결승골이 된 패널티 킥을 줄만한 상황인가에 대해 평소라면 논란이 있을 만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냥 넘어갔다. 항간에 플라티니가 우승을 전혀 축하하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미셸 플라티니는 그 참사에 불구하고 격하게 우승을 축하하여 비판받았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그 때 사건이 그렇게나 심각했는지 몰랐다고 한다.[5]

3.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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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사건이 일어났던 보두앵 경기장은 1985년 이후 10년 동안은 육상 경기장으로만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리모델링 후 재개장해서 다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및 벨기에 컵의 결승전을 치르는 경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2006년 5월부터 11월까지는 안전 문제로 잠시 사용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2016-17 시즌은 벨기에 브뤼셀의 몰락한 명문 풋볼 클럽인 루아얄 위니옹 생질루아즈가 사용하고 있다. 루아얄 위니옹 생질루아즈는 위성구단 시스템을 최초로 고안한 클럽으로 2차 대전 전까지 벨기에 최고의 축구 클럽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최초의 우승을 얻은 같은 브뤼셀 연고의 안데를레흐트가 그 위상을 추월한지 오래고, 지금은 그저 벨기에 2-3부 리그를 오가는 퇴락한 클럽이 되었다.
경기장 바깥에는 당시 사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사건 이후 잉글랜드 내에서 과격한 서포터즈 문화를 자성하는 움직임이 일 었다. 힐스버러 참사와 함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발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이 타 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경기장 주변에 엄청나게 CCTV를 깔고 경찰들이 훌리건을 엄격히 관리하는 계기가 되었이다.[6]
리버풀과 지역 라이벌이었던 에버턴은 1984-85 시즌에 풋볼 리그 디비전1[7]에서 우승을 했으나, 징계 때문에 유럽대항전 출전이 막히자 리버풀에게 악감정이 커졌다. 2008년 구디슨 파크로 원정을 나온 리버풀 팬들에게 에버튼 팬들이 "살인자들에게 2-0(2-0 to the Murderers)"라는 노래를 부르며 도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상을 향해 달려가던 잉글랜드 축구 리그는 추락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은퇴할 때가 다 된 독일 선수나 이탈리아 선수가 관광하러 가는 곳이란 인식이 생기는 등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전까지 암흑기를 겪게 된다.
한편 케니 달글리시는 아래와 같은 물타기성 발언을 해 욕을 먹었다.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회고록 전문

한 마디로 자기들도 피해자란 소리. 말도 안되는 궤변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뜬금없이 헤이젤 참사와 1년 전 유러피언컵 결승전('''AS 로마''' vs '''리버풀''')을 연결지으며 이탈리아인들이 그때 먼저 리버풀 팬들을 폭행했었다고 하지를 않나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했다고 하지를 않나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까지 걸고 넘어지는 등 이탈리아 축구팬(주로 유벤투스 팬)들에겐 적반하장으로 밖에 안 보일 내용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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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헤이젤 참사 추모식에 참석한 리버풀 FC의 관계자들의 모습.
헤이젤 참사 이후 리버풀과 유벤투스는 2004-05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만나게 된다. 리버풀 팬들은 사과의 뜻을 전하고자 안필드에서 열린 첫 번째 경기 전에 "amicizia"(이탈리아어로 "우정")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형성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스처는 리버풀 팬들에게는 사과의 의미였더라도 피해자인 유벤투스 팬들 입장에서 볼 때 20년간 진정성 있는 사과를 전하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우정으로 덮으려는 뜬금없는 제스처는 그저 한 번 더 상처를 주는 것에 불과했고, 또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도 아닌 '우정'을 운운한다며 격분한 팬들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유벤투스 팬들은 이 플래카드에 가운뎃손가락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2차전 때 유벤투스 팬들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게. 우린 너희 살인자들을 용서하기 어려워."라는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다. 폭동 직전까지 갔었으나 토리노 시장의 부탁으로 경기 자체는 평화롭게 끝나게 되었다. 참고로 1차전 결과는 리버풀의 2-1 승리로 끝났고 2차전 유벤투스 홈에서는 0-0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리버풀이 4강에 진출했다.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을 때 당시 선수로 뛰었던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이 참사로부터 27년이 지난 2012년 2월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사건인 포트사이드 경기장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의 처참한 영상. 클릭 주의 요망.

4. 관련 문서



[1]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2] 닉 혼비의 '피버 피치'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까지 잉글랜드 훌리건들에게는 상대편 서포터석으로 넘어가 관중석에서 단체로 달리는 관습이 있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상대를 놀래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3] 이탈리아인 32명, 벨기에인 4명, 프랑스인 2명, 북아일랜드인 1명[4] 그나마도 처음에는 10년 금지였다가 조금 완화된 것.[5] 플라티니가 헤이젤 참사에 대한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 여겨졌던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실패한 후 큰 상실감을 겪었고 직후 유벤투스에서 예정된 1시즌을 소화한 후 바로 은퇴했다.[6] 사실 CCTV는 경기장 주변이고 자시고 어딜 가나 영국의 도시라면 안 깔린 데가 없을 정도다. 영국이 괜히 '1984의 나라'라고 불리며, 한국과 함께 CCTV 대국으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7] 당시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