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스버러 참사
1. 개요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스버러 스타디움[1] 에서 96명의 관람객이 압사한 사건.
과다 인원을 입장시켜 압사 상황이 되고 구조물이 무너지며 큰 희생이 발생했으며, 관공서의 대처 미흡으로 사망자가 늘고 경찰과 정부와 언론이 책임회피 / 은폐축소를 꾀했던 것이 사건 후 수십년간 파해쳐지게 되었다.
2. 전개
당시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리버풀의 팬들은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단체로 버스를 대여해 경기장으로 향했지만 교통사고로 도로가 정체되었다.
결국 리버풀 팬들은 시합 시작 직전에 도착하여 서둘러 경기장 안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 경기장 측 실수로 '''정원이 1600명 남짓한 입식 관중석에 약 3000명이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경기장 진행요원들은 계속해서 해당 입석으로 관중을 유도했고, 질식사 직전에 이른 사람들이 2층으로 기어올라가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훌리건이 필드에 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둔 보호철망으로 사람들이 밀려 경기시작 5분 만에 철망이 무너져내리자, 진행 측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기를 중단했다.
'''94명이 압사, 부상자는 766명''', 그 중 300여 명이 입원한 대형 참사로 이후 사고 후유증으로 2명이 사망함으로써 전체 사망자는 '''96명이 되었다.'''
이후 리버풀은 모든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경기를 치르지 않겠다고 FA에 통보했다. 당시 수많은 축구 클럽의 애도가 이어졌고, 리버풀의 지역 라이벌 에버튼은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스카프를 내걸었고[2] 윔블던 FC는 애도에 동참하는 의미로 FA의 승점삭감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합의 하에 아스날과의 경기를 취소했고, FA 비난 여론이 일자 FA는 아스날 승점을 삭감하지 않았다.
4월 19일의 AC 밀란과 레알 마드리드간의 유로피언 컵 준결승 경기에선 킥오프 전 묵념시간이 반쯤 지났을 무렵 AC밀란의 팬들이 리버풀의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노래했다. 사건 이후 리버풀의 첫 경기는 성금 마련을 위한 셀틱과의 친선 경기[3] 였다.
리버풀은 5월에 미룬 잔여 경기를 치렀으며, 마지막 경기는 리그 챔피언을 결정짓는 아스날과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아스날 선수들은 꽃을 들고 입장해 리버풀 팬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스날의 우승을 위해선 2점차 승리가 필요했던 이 경기는 아스날의 2-0 승리로 끝나 아스날이 리그 1위, 리버풀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리버풀 팬들은 우승한 아스날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쳐주었다는 훈훈한 내용으로 닉 혼비의 저서 '피버 피치'에 잘 묘사되어 있다. 리버풀과 아스날이 형제의 구단이라고 불리게 된건 이 사건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3. 사고 이후
사건 이후 23년 만인 2012년 9월 12일에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힐스버러 인디펜던트 패널이 내놓은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장에 예전부터 도사리던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고, 경찰이 팬들에게 조직적인 책임 전가 시도를 했으며, 응급구조대의 초기 대응에도 문제가 있어서 구할 수 있었던 이들을 못 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하원 의회에서 연설을 하며 피해 유가족들에게 끼친 두번의 불의(Double Injustice)에 대해 사죄했고, FA 역시 사과문을 발표했다. # 당시 경찰은 진술 164건 중 116건을 바꾸거나 삭제하여 비난의 대상을 리버풀 팬들에게 돌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었다. 이들은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통제와 관리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팬들을 술에 취한 폭도로 표현하며 티켓을 구입하지 않고 입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장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지를 받지 못해 피해자 59명이 추가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가 경찰들을 싸고 돌았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에게 대처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마가렛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라는 응원가[4] 가 있을 지경.[5]
헤이젤 참사와 함께 잉글랜드 전역, 특히 축구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잉글랜드는 이 사건 이후 축구장의 입석을 모두 없애고 좌석으로 교체했으며, 직접적으로 사상자를 내게 된 보호철망을 철거하는 등 경기장 문화를 바꾸기 시작했다. 즉,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기존의 풋볼 리그에서 분리된 프리미어 리그를 새롭게 출범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시는 매일 같이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당시 주위 사람들 말에 의하면 달글리쉬 감독은 유족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하며, 원래 리버풀의 레전드이지만 더욱 리버풀의 레전드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점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폐해져 갔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마침내 현지 시각 2016년 4월 26일, 영국 법원 판결에 따르면 조사 내용 17개 전부 '''경찰의 과실로 인정되면서 리버풀 서포터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희생자 96명에 대한 결백함이 27년 만에 밝혀졌다. # 경찰이 경계태만으로 인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증거날조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판명되었다.
2016년 5월 8일, BBC에서 방영한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경찰서장이 바뀌었고 그 사람은 축구에 관하여 거의 모르는 상태였으며, 처음으로 한 기자회견에서도 노팅엄 포레스트를 노팅엄셔로 말하는 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4. 추모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연다. 추모비에는 희생자 96명의 성함과 나이가 모두 각인되어 있으며, 그 중앙에는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이 있다.
이 외에도 리버풀 대성당 내부의 꺼지지 않는 불꽃, 메모리얼 벤치, 힐스버러 추모 기념관과 추모 동상을 세워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또 리버풀 FC는 구단 엠블럼까지 변화를 주며 라이버 버드 양 옆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넣었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유니폼 뒷쪽에 희생자 수인 '''96'''을 새겨 놓았다.
5. 여담
- 이 사고로 리버풀의 레전드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 존-폴 길훌리가 사망했는데, 당시 10살로 가장 어린 사망자였다고 한다. 당시 제라드는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비석에 사촌 형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볼 때마다 매우 큰 고통을 받았다고 전했다.
- 과거 참사 이후, 《더 선》에서 '사건 당시 리버풀 훌리건들이 사망자들의 주머니를 뒤져서 물건을 훔치고, 경찰을 폭행했다며 당시 참사의 책임이 리버풀 훌리건들에게만 있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내서 상당한 논란이 됐었는데, 이 때문에 현지 리버풀 팬들은 더 선을 읽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 결국 진상규명이 완료된 뒤인 2017년부터 리버풀은 구단 차원에서 더 선의 취재와 안필드에서의 더 선 판매를 금지했다. 또 2017년 축구 서포터 연맹 (FSF)에서 발의한 더 선 보이콧 운동이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첼시를 비롯한 약 70개 구단의 팬들이 동참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더 선》 문서 참고.
6. 관련 문서
[1] 현재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홈구장.[2] 두 팀 간의 더비 경기가 프렌들리 더비라고 불리는 만큼 리버풀 팬들 중에는 에버튼 팬의 친인척이 많다.[3] 두 팀은 You'll Never Walk Alone을 응원가로 사용하는 팀들이기도 하다.[4] 가사 전부가 '''"매기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When Maggie Thatcher dies, we're gonna have a party)"'''의 반복이다(...).[5] 그렇지 않아도 대처가 리버풀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했기 때문에 리버풀에서는 마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