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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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북하(北夏)의 초대 황제.
2. 상세
남흉노 선우 호주천의 자손이자 남흉노와 선비족의 혼혈인 철불부의 수장이었던 유위진의 아들이다. 본성은 유(劉)씨이며, 407년에 북하를 건국하였다.[1] 본래 이름은 유발발이나 413년에 성씨를 혁련(赫連)으로 고쳤기 때문에 혁련발발이라 칭해진다. 용맹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잔인하여 북하의 백성들은 학정(虐政)에 시달렸다고 한다. 때문에 혁련발발은 흔히 후조의 석호, 전진의 부생과 더불어 오호십육국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힌다.
391년, 북위 탁발규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유위진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족들이 주살당하자, 질간부 선비족에게로 피신하였다. 이때 질간부의 수장은 탁발규를 두려워하여 아직 어렸던 혁련발발을 북위로 압송하려 하였는데, 질간부 수장의 조카였던 질간아리가 이에 반대하고는 그를 빼돌려서 후진으로 보냈다. 이후 혁련발발은 후진의 휘하에서 오르도스 지역의 고평을 다스리던 다란부(多蘭部) 선비족의 수령 몰혁간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장성한 혁련발발은 말솜씨가 뛰어나고 미남에 체격이 커 후진의 황제였던 요흥의 총애를 받았다. 요흥의 신뢰를 얻은 혁련발발은 그로부터 벼슬을 받아서 삭방(朔方)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한 후, 407년에 반란을 일으켜서 몰혁간을 살해하였으며 후진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북하를 건국하여 스스로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에 올랐으며, 연호를 용승(龍昇)이라 하였다.
이후로 한동안 전통적인 유목 민족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일부러 도읍을 정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하는 등 게릴라전을 벌이며 후진을 압박하였다. 413년에는 연호를 봉상(鳳翔)으로 개원하였다. 봉상 연간에 심복인 질간아리를 장작대장으로 임명하고는 백성 10만 명을 동원하여 통만성(統萬城)을 건축하였다.[2] 성이 완성되자 마침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417년,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서 동진의 군대를 동쪽으로 돌린 틈을 타서 관중(關中)을 점령하였다.
418년에는 황제를 칭하였고, 연호를 무창(武昌)으로 개원하였다. 7년 후인 425년에 혁련발발은 사망하였으며, 그의 뒤는 둘째 아들 혁련창(赫連昌)이 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한다.
역사서에 따르면 상당히 잔인한 군주로 그려지는데 화살촉을 검사할 때 갑옷에 튕겨지면 만든 사람을 처형하고 성벽을 만들 때는 송곳으로 검사하는데 송곳이 들어가면 축성을 담당한 이를 죽여 성벽에 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