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
1. 개요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中核派)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는 1959년 결성된 일본의 신좌파 정치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이지만 주로 중핵파로 불리며 단체 깃발이나 간행물에도 자신들의 단체 이름을 중핵파라고 표시하고 있다. 한국어 약칭으로는 혁공동(중핵파)라 불리며, 일본어 약칭으로는 카쿠쿄우도우(주카쿠파)라 불린다. 언론이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히 중핵파, 주카쿠파라고 불린다.
다른 일본 신좌파 정치단체와 비슷하게 일본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일본 공산당과 달리 의회주의, 합법주의 노선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적군파처럼 테러를 주 활동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의회와 합법의 선 안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현재 도쿄도 스기나미구의회에 무소속 회파로 1석 차지하고 있다.
2. 결성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을 포함한 일본 신좌파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려면 일본 공산당의 노선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1950년 일본 공산당은 미국제국주의와 투쟁하지 않는다는 소련 공산당의 비판을 받고 급격히 노선을 수정해 1950년 제5회 전국협의회 결의를 통해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했다. 하지만 폭력을 포함한 비합법적 투쟁 방법을 사용해 정부, 재계와 투쟁하던 중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민심도 일본 공산당의 뒤늦은 폭력투쟁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55년 열린 일본 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는 이전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투쟁 노선으로 당의 노선을 바꾸게 된다. 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와 1958년 재건대회로 지도부로 등장한 미야모토 겐지 등 일본 공산당 국제파는 본래 기존 지도부의 소극적 반미투쟁을 비판하던 세력이었지만 무장투쟁 과정에서 입장을 바꿔 합법투쟁 노선으로 당을 일관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공식적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 공산당 국제파 지도부는 당을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며 지방과 중앙 정치에 당을 안착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비합법주의 노선 폐기와 의회주의, 합법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에 일본공산당 일각에서는 불만을 품는다. 주로 일본공산당 내 청년학생조직인 일본민주청년동맹(약칭 민청) 일부와 일본민주청년동맹이 지도하는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약칭 전학련) 일부에서 반발이 있었다. 당 내 일각의 불만에 더해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일어난 스탈린 논쟁 등으로 인해 당 내 불만세력은 당에서 제명되거나 이탈하게 되었다. 이들이 당 밖에서 형성되고 있던 반스탈린주의 좌파 및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일본사회당 좌파 일부와 결합하여 일본 신좌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의 신좌파는 처음부터 단일한 단체나 이론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여러 단체와 이론을 가진 집단들이었다.
일본 신좌파 형성기에 등장한 단체는 공산주의자동맹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일본공산당에서 제명되거나 이탈한 당원들로 주로 구성되었고,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전(前) 일본 공산당 당원들 및 당 밖의 반스탈린주의 좌파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두 단체 모두 얼마 가지 않아서 구체적인 노선을 둘러싸고 분열된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이론 문제와 일본사회당 입당 문제, 사회운동의 도덕성 문제 등으로 인해 분열하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이 등장한다.
1957년 결성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1958년 일본사회당 입당 문제를 놓고 첫 번째로 분열했으며, 1959년 경찰에 일본민주청년동맹 정보를 제공하려 한 구로다 간이치[1] 사건을 두고 두 번째로 분열했고, 1963년에는 당 건설 방법과 노동운동에 대한 개입 방법을 둘러싸고 세 번째로 분열했다. 2번째 분열을 통해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에서 제명되거나 탈퇴한 회원들에 의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가 결성됐으며, 3번째 분열을 통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명적맑스주의자파)가 결성되었다.
한편, 2번째 분열 당시 지금의 중핵파와 혁명적맑스주의자파 세력을 축출한 기존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후에 다른 조직과 통합하여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한다.
3. 역사
일본의 안보투쟁에 다른 좌파 정당 및 일본 신좌파 단체와 함께 참여했다.
1990년 천황제 반대 교토대학 점거 투쟁
전공투 운동에 참여했다.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투쟁을 주도한 집단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명적맑스주의자파)과는 달리 끝까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싸웠다. 전공투 운동이 와해된 뒤에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약칭 전학련) 분파 중 한 곳을 지도하며 일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주로 대학에 등록한 동아리 이름으로 활동하거나 학생자치회 집행부에 당선되어 활동하는 식으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천황제 반대 및 아키히토 천황 즉위 반대 차원에서 교토대학 본관을 점거하기도 했다.
1985년 10월 20일 나리타 투쟁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에 시작부터 지금까지 40년 넘게 연대하고 있기도 하다. 1985년 나리타 투쟁은 공항 건설 반대 농민들과 중핵파 활동가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5년 국철 민영화 반대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당시 파업을 이끌고 있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약칭 총평) 소속 국철노동조합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철도운행을 방해했다. 국철 민영화 반대 운동이 사실상 패배로 끝난 이후에도 해고자들의 복직을 위해 그들과 연대하며 투쟁하고 있다. 국철 민영화 반대 운동 이후 국철노동조합은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약칭 JR총련), 국철노동조합,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 등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중 민영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해고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려 한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과 연대를 계속했다.
1984년에는 비공개 조직 '''인민혁명군'''을 통해 자유민주당 본사를 방화 습격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4. 현황
일본 사회운동의 전성기이자 일본 신좌파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까지는 중핵파의 회원 수는 1만을 넘었다. 게다가 경찰, 정부, 대학당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준군사조직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사회운동의 하락과 극단적인 내부분열과 경찰의 탄압을 거치면서 회원 수가 많이 줄었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었다. 경찰과 언론에서는 현재 중핵파의 규모를 2800명에서 47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적극적인 회원이 2800여명, 소극적인 회원까지 합치면 4700여명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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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사(前進社) 본사 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 본부
다른 일본 신좌파 단체들이 그렇듯,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도 출판사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한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은 자신들이 설립한 출판사 전진사(前進社)와 그 지사를 중앙과 지역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고, 출판사와 제호가 같은 주간신문 전진(前進)을 발행하고 있다. 물론 전진사(前進社)에서는 기타 단행본들도 출판하고 있다. 전진사(前進社) 본사 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 본부는 도쿄에 있는데 한 건물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학생운동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약칭 전학련)라는 이름의 학생운동단체가 현재 여러 곳[2] 있는데 그 중 한 곳을 지도하고 있다. 호세이대학에서 활동하는 중핵파계 전학련이 학내 정치활동 금지라는 명분으로 대학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언론에 기사화된 적이 있다. 중핵파계 전학련은 호세이대학 말고도 도쿄대학, 교토대학, 오키나와 지역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키나와 지역의 대학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노동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 등 몇몇 소규모 노동조합에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전국노동조합교류센터라는 노동운동 단체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은 국철 민영화 반대 운동 당시 국철노동조합 내에서 민영화에 끝까지 저항했던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노동조합이다. 지금도 이 노동조합은 민영화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과 해고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중핵파 활동가들과 지도하는 노동조합들은 매년 노동절(5월1일)에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리는 노동자 집회에 참석한다. 이 노동절 노동자 집회는 소규모 노총인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全国労働組合連絡協議会) 주최로 열리는 집회이다.
지금도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을 계속하며 공항 건설 반대 농민들과 함께 나리타 공항 근처에서 매년 집회를 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대동맹 농민들이 노령으로 사망하며 줄어들고, 중핵파도 1985년 대투쟁 이후 세를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젠 무슨 농활 가듯이 화기애애하다.(#)[3]
2019년 11월 30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죽자 고인드립을 쳤다(#). 나카소네는 국철 민영화의 주범이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활동 기반으로 삼고 있는 신좌파 단체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촛불집회에 전학련 깃발을 들고 참가한 일본 학생운동가들이 있었다. 한겨례신문 인터뷰기사
5. 기타
비교적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에서는 중핵파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대부분은 중핵파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2016년 중핵파 회원이 아닌 한 대학생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CORE 私の中核』는 중립적인 관점에서 제작되었다.
중핵파 핵심 인물 시미즈 타케오(清水丈夫)가 51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경찰의 중핵파 본부 기습 작전이 일본과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6. 관련 링크
전진사(前進社) 홈페이지
전진사(前進社) 유튜브 계정
중핵파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学連) 홈페이지
중핵파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学連) 트위터 계정
호세이대학 학생탄압을 불허하는 모임 유튜브 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