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투쟁
'''成田闘争''' (なりたとうそう)
'''야스다 강당 사건 못지 않을 공산투쟁'''
산리즈카 투쟁(三里塚闘争) 이라고도 불린다.
1. 개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분노한 나리타 전공투들의 투쟁.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투쟁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2. 원인
1966년 6월 일본 정부는 나리타시에 국제공항을 건설하기로 하고 1972년에 완공하기로 했다.
근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국제공항 건설 계획이 '''나리타에 사는 히키아게샤 계열 농민들과 나리타 주민들과는 합의도 보지 않은 채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3. 투쟁의 전개
1966년 7월 20일 지역 농민들은 산리즈카시바야마연합 공항 반대 동맹을 결성하였다. 공항용 토지 매수 협상을 어렵게 하기 위해 토지를 분할하려는 목적으로 토지 1평씩을 지권자로 서로 매매하는 '1평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공항 반대 운동에 정당들도 참여했지만, 일본사회당은 치바현 지사와 신사협정을 맺고, 일본공산당은 반대 동맹이 신좌파 당파와 공투 관계를 맺은 것에 반발하여 반대 동맹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반대 운동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이 두 정당의 행동은 큰 비극을 불러왔다.
1967년, 신좌파의 각 파가 반국가 권력투쟁에 나서면서, 특히 월남전과 사토 내각을 향한 반발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투쟁이 과격해졌다. 지역의 기독교도가 모인 토무라 일작의 반대 동맹 대표가 활동을 선도하고, 지역 농민들과 좌익 혁명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제휴하면서 지속으로 투쟁하였다. 그러나 운동 방침과 좌익 각 정파 간의 관계를 놓고 의견이 차이 나는 탓에 새로운 좌익 여러 정파 간 반목으로 말미암아 공항 반대 동맹은 '오가와파', '아츠타파', '키타하라파"'로 나뉘어 활동했다. 계급투쟁 지상주의의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도 '나리타 투쟁은 프티 부르주아지 농민의 자기보호'라고 야유하자 운동에서 추방되었다. 산리즈파시바야마연합 공항 반대 동맹은 무장투쟁 노선에서 신좌익 당파와 신좌익 당파에 영향받은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에 도움받았다.
1967년에는 시위대가 다리를 건너려 하자 기동대가 버스로 막았지만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해(...) 근처에 살수차나 지원 오는 경찰버스를 충돌시키는 사건이 발생했고, 며칠 뒤엔 거리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기동대가 최루탄을 발사해 해산시키려 했지만, 발사된 최루탄을 시위대가 기동대에게 도로 던지는일이 생겨 오히려 기동대들이 해산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 투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비타협하는 자세로 건설 계획을 수행하면서 1971년 2월 22일 건설 예정지에서 경찰력을 이용하여 제1차 행정대집행을 시행하자 반대 동맹과 기동대가 충돌하였다.
같은 해 9월 16일에도 건설 예정지에서 제2차 행정대집행을 하자 격렬한 투쟁으로 양측에서 사망자와 다수한 부상자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바리케이트를 봉쇄했고, 경찰들은 바리케이트를 뚫기 위해 중장비로 바리케이트와 안에 있는 시민들을 공격했다.
1972년 3월 15일, 반대 동맹은 A활주로 남단에 접근 영역 내 바위 지역에서 높이 63 m 철탑, 소위 '암산대철탑'을 건설하여 비행 전 검사를 중지하게끔 했다.
1977년 1월 11일, 후쿠다 내각은 국무회의에서 1년 내에 개항하게 하겠다고 호언했다. 항공기 운항을 방해하는 암산대철탑을 철거하고자 1월 19일 중장비를 운행하는 도로 건설에 들어갔다. 4월 17일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2만 3천 명이 결집해 철탑 방위 전국 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같은 해 5월 2일 공항공단은 일본 항공법 제49조 제1항을 위법했다는 이유로 치바현 지방재판소에 암산대철탑 철거 가처분을 신청했다. 5월 4일, 치바현 지방재판소는 서면 심리만으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5월 6일 오전 3시 기동대원 2100명이 암산대철탑 주변을 포위했다. 4시, 당시 치바현 지방재판소 집행관인 키타하라 코오지가 현장에 도착하여 암산대철탑 검증 종료와 암삼대철탑 철거를 일방으로 통보하면서 반대파를 내쫓고 오전 11시경 암산대철탑 철거를 완료했다. 항공법 위반을 근거로 암산대철탑을 기초부까지 절단하여 철거했다.
5월 6일 오전 5시부터 반대파와 기동대가 서로 간간이 충돌하기 시작했다가 5월 8일에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그런데 충돌 당시 반대파의 저항이 강해서 기동대가 최루탄을 마구잡이로 발포하다가 야전병원에 있는 학생의 머리를 직격으로 맞춰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개항을 앞둔 1978년 3월 26일 공항반대파들이 관제탑으로 무단침입하여 점거하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나 개항은 4월로 미루어졌다.
4. 10.20 나리타 지역 투쟁
'''10.20成田現地闘争'''
1985년 10월 20일 국제공항의 2기 건설을 반대하는 대규모총궐기 집회가 일어났는데, 공항 폐쇄를 목표로 일어나었으며 일본 경시청의 제1, 제3, 제4 기동대가 산리즈카 제 1공원부터 교차로까지 배치되었다.
약 3900명이 참여한다는 했다고 알려졌는데, 경찰에서는 궐기대회의 폭도화, 테러 및 게릴라전 사건을 미연에 예방한다는 이유로 집회 장소 부근에서 엄격한 검문을 시행하고, 궐기집회 참여자에 대한 심문을 하였으며 소지품 검사도 시행했다.
그런데, 집회가 종반에 들어간 오후 4시 10분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를 비롯한 철저한 항전을 내걸고 지원한 여러 당파가 궐기 집회 예정 몇 주 전에 산리즈카 제1공원의 관목이나 흙 속에 숨긴 대량의 쇠파이프, 통나무, 화염병 등을 꺼내어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투석용 자갈이나 깃대, 매우 작은 플래카드가 붙여진 장대 및 각목을 싣은 트럭과 덤프트럭이 집회장에 난입해 폭력화되었다.
4시 22분 1천 명 남짓 무장한 중핵파와 농민들은 교차로에 있는 경찰 지지선을 '''통나무'''로 뚫고 전진하여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지지선이 뚫리자 시위대는 혼란상황에 빠진 기동대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기동대가 뒤로빠져 지지선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화염병과 자갈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폭력사태는 2시간 동안 더 이어졌다. 기동대는 중상자 9명을 포함한 경찰관 59명이 부상을 입었고,살수차 및 장갑차 3대가 화염병으로 파괴되었으며, 시위대는 총 241명이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하였다.
같은 시간대에 나리타 공항에선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구성원들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과 가짜 신분증으로 경찰의 검문을 통과하고 공항 내로 진입하여 5시 35분 공항 여객 터미널 빌딩 주차장에서 자신이 타고 온 차량 외 1대, 총 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이 방화사건의 혼란을 틈타, 화염방사기와 산탄총으로 무장한 결사대가 위장 소방차 2대를 방화 사건의 소화 활동 명목으로 경찰을 속여 진입했다. 관제탑 앞에 위장 소방차 1대를 정지시키고 시한장치를 작동시킨 이후 다른 위장 소방차로 도주했다.
약 8분 후, 소방 호스 노즐로 위장한 산탄총의 화약으로 한 번에 구슬탄 200개 가량이 발사되어 관제탑 창문을 파괴했다.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계획은 창문이 파괴된 이후 창문을 향해 화염방사기가 작동하여 나리타 국제공항의 관제탑이 파괴돼 사실상 폐항시키는 계획이었지만 화염방사기가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고 위장 소방차에 불이 붙었다.
관제탑 파괴라는 상황은 면했지만, 관제탑의 일부가 손상을 입어 공항의 일부 기능이 상실되었다.
이 전략이 수년 전부터 준비했던 것임이 알려지자 극좌 과격파 및 농민들과 시가전을 일으켜 2시간 가량 진압을 지연시키고, 공항 중추 시스템까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경찰은 콩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5. 투쟁 그후
정부는 농민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시 정신적 고통을 입은 농민들에게 사과하면서 충돌이 줄어들었고, 1995년 이후 공항 2기 공사에 쓸 토지매수에 응하는 농민들도 증가했다. 한편, 토지이전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과 급진 좌파단체 회원들이 활주로 예정지에 생활, 경작을 계속하면서 나리타 국제공항은 처음 계획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운영 중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반대파 농민들은 행진을 하며 반대 구호를 외치고 다닌다.
나리타 투쟁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6. 총론
나리타 투쟁은 비극으로 시작해 끝나지 않았다. 극우단체들은 극좌세력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며 비판하지만, 이러한 폭력사태가 일어난 원인은 일본 정부의 막장과 기동대의 무차별 진압 등이라 과격 시위대보단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 아직까지도 많은 농민들과, 중핵파, 기동대원들은 당시의 참혹성을 잊지 못한다.
7. 기타
오제 아키라의 우리마을 이야기는 이 나리타 투쟁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주 신공항 건설 논란 당시 산리즈카 지산연합 공항반대동맹(키타하라파)가 반대 시위 참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