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일본국 제71-73대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曽根康弘 | Nakasone Yasuhiro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 스에히로정
'''사망'''
2019년 11월 29일 (향년 101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71대 내각총리대신
1982년 11월 27일 ~ 1983년 12월 27일
제72대 내각총리대신
1983년 12월 27일 ~ 1986년 7월 22일
제73대 내각총리대신
1986년 7월 22일 ~ 1987년 11월 6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님'''
부친 나카소네 마쓰고로
'''배우자'''
나카소네 츠타코
'''자녀'''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
장녀 후타가와 미치코
차녀 아츠미 미에코
'''친인척'''
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
'''학력'''
시즈오카고등학교[18]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신장'''
178cm[19]
'''정당'''

'''지역구'''
기타간토 권역 비례대표
'''의원 선수'''
'''20''' (중)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성 관료
중의원 의원
제7·25대 과학기술청장관
제38대 운수대신
제12대 타쿠쇼쿠대학 총장
제25대 방위청 장관[20]
제16·21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34-35대 경제산업대신
제15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45대 행정관리부장관
제11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71-73대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세계평화연구소 회장
'''군사 경력'''
'''임관'''
단기현역사관 (6기)
'''복무'''
일본제국 해군
1941년 ~ 1945년 8월
'''최종 계급'''
소좌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1. 개요
2. 관료생활 및 군 경력
3. 성향
4. 평가
5. 논란 및 망언
6. 평생 현역: 총리 퇴임 후의 행보
7. 기타

[clearfix]

1. 개요


제71-73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자 중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 시대까지 '''4명의 덴노를 경험한 역사의 산증인'''이자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쇼와 시대 내각총리대신'''이었다.[1]
전후의 총리 가운데 재임기간이 4년 346일(1806일), 약 5년으로 5번째로 길었다. 아베 신조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길게 총리직을 지냈다.
2018년 5월 27일 100세 생일을 맞아,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서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에 이어 두 번째로 장수를 기록했다.
그러던 2019년 11월 29일 10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여권뿐 아니라 다마키 유이치로, 에다노 유키오, 마쓰자와 시게후미 등 야권의 많은 정치인들도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중핵파고인드립을 쳤다.(...)
이로써 쇼와 시대 총리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 관료생활 및 군 경력


군마현 타카사키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41년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내무성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병역 해결을 위해 일본 해군단기현역사관(약자로 단현)[2] 제6기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주계[3] 중위로 임관했다. 최초 발령지가 바로 중순양함 아오바였다. 아오바 근무 시절에는 이제 막 임관한 초급장교임에도 해군병학교 출신의 병과 사관들과 서열싸움을 벌이는 등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과시했다. 그리고 첫 실무 배치를 받았을 당시 자신은 동기들과 함께 밖의 구석진 데로 끌려가 선임 사관들에게 이유 없이 귀싸대기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일본군의 병영부조리가 상당히 심각했음을 알았다. 이후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에 해군 육전대설영반 반장으로 발락파판 상륙작전[4]에 직접 참가하여 실전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수송선에 타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타이완, 일본 본토 등을 옮겨다니며 계속 근무했으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버섯구름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전해진다. 종전 후 해군 해산과 동시에 주계소좌로 전역한다.
해군 주계중위 시절[5]
이후 내무성에 복귀했다가 1947년 중의원 총선때 고향에서 출마하여 당선에 성공함으로써 정계에 입문, 정계은퇴까지 무려 20선 의원을 지낸다. 재밌는건 총리임에도 총리재임 당시에 1위를 하지 못했다는 것(중선거구제였기에 일단 당선은 된다.) 이유는 군마 3구에 후쿠다 다케오가 있었다(1952년 정계 입문). 그 덕에 졸지에 군마 3구는 수십년간 계속 전현직 총리의 지역구[6]가 되었다. [7]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입각해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 최초의 원자력 관련 예산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공로를 세웠는데, 예산 액수는 2억 3,500만엔이었다. 이는 농축 우라늄의 원소번호 235에서 유래한 것이었다.관련기사 2차대전 당시 원자폭탄으로 패망한 것을 보고서 일본의 독자적 원자력 능력 확보 필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이후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장관을 역임하다가 1982년 11월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되어 제71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71대 총리 취임 후
재임 초기, 통일지방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면서 순탄하게 총리직을 수행할것 같았지만. 록히드 재판의 영향으로 198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 과반에서 6석 모자란 250석의 패배를 거두면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클럽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내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일본경제의 활황과 더불어 지지율은 상승일로를 거듭했다. 결국 임기말인 1986년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자민당은 '''역사상 최다 의석'''인 300석을 얻었고,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역사상 최대 의석'''인 72석을 추가해 총합 143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소비세 신설계획을 발표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락하여 1987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씁씁하게 패배하기도 했다. 어쨌든 소비세 신설안을 폐기한 뒤, 타케시타 노보루를 후임 자유민주당 총재로 지명하고 11월에 공직에서 퇴임하였다.

3. 성향


우익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로서 재임 기간 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지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게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인해 협박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세키호타이 사건 문서 참고. 하지만 대체론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호시절을 보냈다. 미국 공화당로널드 레이건(1981년 ~ 1989년)과 전두환 정권(1980년~1988년)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임기 때문에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의 한-미-일 삼국협력과 한-미 동맹, 한-일 협력관계의 전성기였다. 특히 방위비 증액, 시레인 방어 등을 주장하며 자위대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1983년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하는 모습.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론'과 '야스'라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진전을 보여, 1983년 현직 일본 수상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고[8], 1984년에는 전두환이 답방함으로서 한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인형은 갓 NLPDR이 자라나던 학생운동 시위에서 동네북처럼 규탄당하고 인형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전두환도 나름대로는 명분이 있었다. 바로 반일이 아닌 "극일". 환단고기를 강조하는 정훈교육이 이때부터 이뤄진 것도 그 맥락과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고령의 히로히토는 방일한 전두환에게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 전한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미 나카소네 임기 말부터 무역마찰[9]로 악화된 미일관계는 소원해지고, 미국의 데탕트 외교와 한국의 북방 외교가 강화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도 이전보단 약해졌다.
일단 우익성향이였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반공이라는 이념을 둘다 가진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스히로의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나쁜편은 아니였다. 지금이였으면 엄청나게 욕을 먹었겠지만 그리고 당시에는 과거사 문제가 그리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한국정부도 배상과 사과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일본 보수정치인의 아이콘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도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정부 대표단 자격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와 함께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와도 관계가 돈독해 1990년 잠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및 1997년 롯데호텔 부산 개장식에도 참석했다.

4. 평가


그야말로 1980년대 일본 정치를 대표하는, 전후(戰後) 체제로의 전환을 본격화한 지도자. 당시에는 '''대통령 급 수상(大統領的首相)'''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가 수상 재임 기간에 누렸던 막강한 권력을 빗댄 것이다.
재임 중 누적된 적자로 국가재정에 압박을 주던 전매공사(현재의 일본담배산업/JT)와 일본전신전화공사(현재의 NTT), 일본국유철도(현재의 JR그룹) 민영화를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1985년플라자 합의 채택으로 엔화가 급강세를 보였고, 몇 년 못가 일본을 덮친 버블붕괴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퇴임한 후 한참 뒤에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거고, '''수상 재임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절이라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실제로 당장 일본 수출이 줄어들 것만 기대하고 일본침몰만을 학수고대하던 서구 경제가들은 의외로 1989년까지 일본이 짱짱하게 버티면서 역관광 당하는거 아니냐고 쇼크를 먹기도 했다는 후문.
재임기에 맞이한 총선에서 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고, 전후 수상 가운데 재임기간이 네번째로 길었던 게 그냥 가능했던 게 아니다.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월하기 전까지는 전후 세번째 최장수 총리였으며 요시다 시게루가 2차대전 패전의 수습과 한국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 내각에 가까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이즈미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전후 2번째 장수 총리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아무튼 총선의 압승도 그렇고 재임시절에는 수상으로서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아울러 일본 정치인 중에서도 거의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한 이미지메이킹을 선도한 인물로 꼽힌다. 일본인치고는 크고 당당한 체구(178cm로 역대 총리 2위[10])에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텔레비전을 통한 정견 표명이나 쇼맨쉽을 발휘하는 행동이 많았으며 비교적 약한 당내 기반을 이러한 미디어 정치로 상쇄했다. 후일 등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극장형 정치'의 원조격인 인물.

5. 논란 및 망언


1985년 야스쿠니 참배 며칠 전 그는 야스쿠니를 미국 알링턴 등 전몰장병 묘지와 동급으로 놓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도쿄재판 사관을 자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전후는 총결산됐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리영희 교수는 월간 말 1994년 6월호 칼럼 <일본인 망언 규탄 전에 국민 총반성이 필요하다>에서 해당 발언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서독 대통령의 패전 40주년 기념사와 비교하며 냉철히 비판했다.[11]
1987년 9월 22일 자민당 연수 강연회 연설에서 "미국은 흑인과 남미계 민족 등으로 인해 지적 수준이 아직 낮다."란 발언을 해 미국 흑인과 남미계 미국인들을 격분하게 했다. 변명이랍시고 9월 25일 중의원에서 "미국은 다민족 국가인 관계로 교육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은 단일민족 사회이기 때문에 교육을 하기 쉽다"란 말을 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미국 정계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나카소네는 9월 27일 미국 정부, 의회, 국민들에게 진상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이외에도 나카소네는 1997년 10월,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강연회에서 주일미군을 "망보는 개"로 비유하여 물의를 빚었다. 나카소네는 이날 강연에서 미일안보체제와 관련한 주일미군의 위치에 대해 "아시아 태평양지역,극동에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수견으로 삼는 것"이라면서 "일본미국이 돈을 내고 미군을 주둔시켜 파수견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그것이 현명하다"고 발언했다. 이같은 나카소네의 발언에 미국은 매우 불쾌해하였고 그 당시의 미일관계는 아시아 경제 위기 상황이라는 복합적 요인과 맞물려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카소네의 이같은 발언에 당시의 조선일보도 주한미군에 대해 "탈냉전시대 미국의 전략이 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한 미군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라는 논평을 냈었다.[12] [13] [14]

6. 평생 현역: 총리 퇴임 후의 행보


2015년의 모습
하지만 퇴임 후에는 편치만은 않았다.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잠시 자유민주당을 2년 가까이 탈당해야 했던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렌고가 내놓은 후보에게 낙선된다는 소리[15]까지 나올정도로 열세였으나 당선되었고, 1991년에 정계 50년만에 1996년에 비례대표 종신 순번 1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결국 그가 정계 은퇴를 한 것은 고이즈미가 정년제를 주장하며 비례직 사퇴를 종용한 2003년에서야 였다. 당시 그의 나이 85세로 정계 진출 57년 만이었다.
총리 퇴임 직후인 1988년부터는 세계평화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지냈으며, 2005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아태지역의 차세대 지도자상도 시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박철희 서울대 교수, 이신화 고려대 교수, 그리고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등이 수상한 바 있다.[16] 2010년에 히라누마 다케오일어나라 일본을 창당하자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히라누마를 지지했다.
2017년 기준으로 '''만 99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보수정치의 원로로 정치 현안에 대해 자주 발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100세가 되는 2018년 5월 기사에는 도보가 불편하고 지팡이를 들 손마저 부상당한 상황이라, 자신이 회장으로 있고 평소에 늘 참석하던 '신헌법제정의원동맹'에는 불참하고 대신 메시지만 보냈다.#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1945년생)도 모리 요시로 내각의 문부대신 이래 과학기술청 장관(지금은 문부과학대신으로 합쳐진 직위), 그리고 아소 다로 자민당 내각의 마지막 외무대신을 지냈다. 심지어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손자인 나카소네 야스타카가 비례대표로 중의원에 입성하여, 생전에 3대가 국회에 등원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다.
2014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은 현 정세상 필요없다고 발언하며 아베 신조 정권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2019년 11월 29일 향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기타


애니메이션 카미츄! 4화에 나오는 총리대신은 이 사람이 모델이다. 작중 배경인 당시 총리였던 1983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친미적 성향이 잘 나타나 있고, 무능의 끝을 달린다. 미국한테 잘 보이겠다고 삽질하다가 험한 꼴을 당한다.
냉전 시기 서방진영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 한명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이나 제3세계에도 상당히 너그러운 면모를 보였다. 실제로 1950년대에 젊은 국회의원 시절,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소련, 중국, 이집트 등을 방문하였고 이때 나세르와 회담한 후 나세르의 검소함을 극찬하며 평생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재무대신이 되는 요사노 가오루의 어머니의 지인이었으며, 나카소네의 소개로 원자력 발전에 요사노가 입사했고 요사노가 그의 비서도 된다.
그가 사망하고 수 개월이 지난 2020년 9월 경 일본 정부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엄수하기 위하여 장례식 비용으로 약 9,600만 엔을 계상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장례 비용이 1.9억 엔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굉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전직 국가원수의 장례식에 20억 원 정도의 비용을 쓰는 것 정도는 크게 이상하지 않지만 사망 직후의 장례식이 아닌, 한참 지난 후의 뒷북 치는 장례식에 대해 이런 식의 예산 사용은 확실히 이상하다. 이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은 당연히 격분하면서 이러한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
국장 치르는 날에 조기 계양 등 가지는데, 문제는 국립대까지 장례 강요가 이뤄지고 있다.#[17] 국장에 후미히토 왕세제 부부, 남관표 주일대사도 참석했다.
[1] 생존 총리 타이틀은 2004년 스즈키 젠코가 사망한 후 무려 15년째 유지했던 타이틀로, 쇼와 시대 내각총리대신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이 되었다. 또한 헤이세이 시대를 넘어서 레이와 시대가 열리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2]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에 일본 해군에서 초급 사관들이 모자라자, 대학 출신 등 고학력자를 시험을 거쳐 선발하고 해군 중위로 임관시키던 제도를 말한다.[3] 대한민국 해군보급, 경리 병과에 해당하며, 피복, 서무, 회계 등의 업무를 맡는 병과다.[4] 일본은 개전 초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점령을 위해 타라칸, 마나도, 발락파판, 켄다리 등에 연이어 상륙했으며, 일본군의 진공을 막기위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연합군(ABDA)이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해전을 묶어서 자바 해전이라고 부른다. 결과는 연합군의 참패와 일본군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점령으로 끝났다.[5] 견장 테두리에 주계과를 뜻하는 흰색 줄이 있다.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은 나이들어 후덕해진 모습에 익숙한 한국인 입장에서는 매우 낯선 모습일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잘생긴 얼굴, 180cm에 육박하는 큰 키, 도쿄제국대학 졸업에 고등문관시험 합격 등 여러모로 완벽한 조건이라 해군 진수부 등에 근무하는 여성 직원들이 정신을 못차렸다는 일화가 있다.[6] 소선거구제 도입이전에 오부치 게이조와 후쿠다 다케오도 군마 3구에서 중의원 의원직에 당선되었다.[7] 일본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1960년에 군마 3구에 첫출마해서 중선거구제 하에서 한번을 제외하고 모두 당선된 군마 3구의 터줏대감 중 1명이었지만 사회당은 38년간 만년야당이어서 총리직에 오르지는 못했고 무라야마 내각에서 장관을 지낸게 전부다.[8] 이 회담을 성사시킨 주요인물 중 하나로 세지마 류조가 있었다.[9] 당시 나카소네 자신이 TV방송에 출연하면서 외국제 상품을 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국민 여러분들도 외국제품을 사다 쓰세요"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정작 국민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일본 시장은 기존 브랜드 파워가 굉장히 막강하여 신규 진입자는 터무니 없는 고가 고성능/터무니 없는 저가품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고.[10] 1위는 유일한 180cm 오쿠마 시게노부[11] 이 칼럼은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도 수록됐다.[12] 미군은 망보는 개, 나카소네 돌출발언[13] 미군은 망보는 파수견[14] 주한미군을 보는 눈[15]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 이 후보가 낙선되었다.[16] 특히 김태효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 불과 40대의 나이로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으로 재직하며 주요 외교안보 현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브레인이었고, 청와대 재직 중인 2009년에 수상했다. 그러다가 2012년 한일 군사정보교류협정 체결이 막판 무산되자 문책성으로 사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카소네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재부각되어 친일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교수는 자신의 여러 논문에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을 강력히 지지해온 바 있다.[17]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대신은 '강제성이 동반된 내용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법적인 강제성이 없다고 해도 '''정부기관에서 내려온 공문'''을 국립대학에서 '하기 싫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