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좌파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

요도호 사건적군파 간부 타미야 타카마로[1]

日本の新左翼
1. 배경
2. 전체적 계보
2.1. 혁공동계
2.2. 공산동계
2.3. 사청동계
2.4. 구조개혁파
2.5. 중국계파
2.6. 아나혁련계
2.7. 급진적 무당파
3. 같이 보기


1. 배경


1955년 일본 공산당일본사회당이 폭력혁명 노선을 포기하자 그들을 기성좌파라고 비판하며[2] 대두한 학생운동/재야운동 정파들.
[image]
이 친구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정파색을 나타내는 하이바, 분진마스크, 그리고 각목. 위 사진은 일본 신좌파의 대표적인 복장을 재현한 코스프레. 저 모습이 일본에서 신좌익 과격파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스테레오타입 복장(...) 유형이며, 일본 경찰의 신좌파 단속 공식 포스터에서도 이런 스테레오타입 신좌파 활동가들을 그려 넣고 있다. (예시 1 예시 2)[3]
트로츠키주의, 룩셈부르크주의, 바쿠닌주의, 레닌주의 성향의 정파들도 일본에서는 '''싸잡아''' '신좌파'라고 불리고 있다.[4] 이유는 상당히 황당한데, 이 '신좌파'라는 호칭 자체가 안보투쟁 전후의 학생운동 정파들이 사회당공산당 같은 정당 위주의 '기성좌파'들보다 과격하다는 의미애서 일본 언론이 그들을 '신좌파'라고 통칭했으며, 과격파(過激派) 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일본에서 흔히 '과격파'라는 말은 '일본 신좌파 계열 극좌 테러집단'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5]
하지만 일본 신좌파가 서양적 신좌파의 성격을 나타내지 않거나 서양 신좌파와 사상적으로 단절되어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일본 신좌파의 고점이었던 전공투 자체가 일본의 68혁명이었고, 노동계급보다 사회적 소수자(특히 소수민족)를 혁명주체로 조명한 경향도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6] 무엇보다도, 트로츠키주의, 룩셈부르크주의, 바쿠닌주의, 레닌주의 등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정파들을 신좌파로 분류하는 것을 '황당하다' 고 보는 관점 자체가 정확한 관점이 아니다. 원래 신좌파(new left)라는 개념 자체가 기존의 구좌파(old left)와 상대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표현이고, 서구의 신좌파 그룹 중에서도 스탈린주의, 또는 유럽공산주의 성향의 기존 공산당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트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마오쩌둥등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례는 흔했다[7]. 즉, 트로츠키주의자나 마오주의자 등 기존 공산당에 반대한 공산주의 정파들은 황당하게 싸잡혀 신좌파로 분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신좌파 개념 탄생 당시부터 신좌파의 주요 구성집단으로 분류되었던 것이 맞다[8]. 위에서는 노동계급 중심 운동에서 탈피한 소수자 중심 운동'''만''' 신좌파이고 공산주의 운동은 신좌파가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 소수자 인권 운동이나 여성운동, 성해방 등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대와 탈권위주의, 생태주의 등은 <68혁명의 신좌파가 현대에 남긴 유산>이지 <68혁명으로 탄생한 신좌파 그 자체>가 아니다. 신좌파 그룹 내에 속해있던 트로츠키주의자나 마오주의자, 룩셈부르크주의자 등 공산주의 정파들은 다른 정파들과 달리 별다른 사회적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멀쩡히 신좌파 그룹을 구성하던 정파들을 신좌파로 분류하는 것이 황당하다고 할 이유는 없다.
  • 또한, 신좌파 내에서 공산주의 그룹과 그 외 그룹을 딱 잘라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좌파 내 비 공산당 공산주의 정파들 역시 기성 정치세력인 공산당에 비하면 상기된 바와 같은 <68혁명 다운>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 그리고 좌파라는 것이 60년대 후반~70년대 기준으로 좌파이지, 2000년대 이후 기준으로도 새롭게 여겨질만한 것은 아니다. 68혁명을 거치고, 그 20년 후 소련과 동구권 붕괴까지 거치면서 좌파 내에서 계급담론의 영향력이 대폭망하고 그 자리를 생태주의 담론이나 정체성 정치 담론이 채우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계급담론의 구좌파와 생태주의/정체성 정치/반권위주의 담론등의 신좌파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일본 신좌파의 탄생은 그 한참 전인 70년대 전후인 만큼 2000년대의 정의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부정확할 수 밖에 없다.
등의 문제를 감안하지 않은 오류라 보아야 한다.
신좌파들은 일본 정부우익 뿐 아니라 기성좌파들 역시 적대했고, 일본 공산당 산하의 일공민청,[9] 일본사회당 산하의 사청동과 대립했다. 이들 기성좌파들은 또 기성좌파대로 신좌파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낙인찍었고 일공민청은 산하에 새벽행동대라는 사수대를 만들어 신좌파들과 상호 빠따질(...)을 주고받았다. 기성좌파들은 신좌파를 '가짜 좌파 폭력집단'이라고 부르는데, 학생운동 절정기에 새벽행동대 같은 구좌파들이라고 폭력을 저지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10] 그리고 신좌파들은 자기네들끼리도 의견이 맞지 않아 마구 분열하고 분화하고 대립했다.[11]
전공투 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명멸했지만 전공투는 이런 정파들에 속하지 않은 무당파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공동투쟁 = 공투)한 연대체였고, 정파보다는 학교별로 조직되었다[12]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런 이들을 '논섹트 래디컬(급진적 무당파)'이라고 하며 광의의 신좌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2. 전체적 계보


  • (일본공산당)[13]
  • (일본사회당)
    •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 약칭 사청동.
      • 사회주의청년동맹 해방파: 1965년 분화. → 사청동계[14]
  • (아나키즘)

2.1. 혁공동계


이념적으로 트로츠키주의, 반스탈린주의, 반소주의를 내걸었다. 불과 5년 사이에 조직이 세 번 분열했다. 심지어 1차와 2차 분열 사이의 간격은 반년(...). 공산동계가 적군파 사건 등을 거치며 완전히 와해된 것에 비해 혁공동계의 주요 정파(중핵파, 혁마르파)는 현재까지도 조직을 온존하고 있는 편이다.
혁마르파는 거의 모든 다른 신좌파 정파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세력보신에 골몰하며 야스다 강당, 산리즈카 등 곳곳에서 당국과 타협하고 대오에서 빠지기를 반복했고, 그런 주제에 좌파세력 내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항쟁에 열을 올려 엄청난 팀킬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같은 혁공동계지만 중핵파는 차라리 사청동계의 혁노협과 연대하지, 혁마르파와는 완전히 원수지간이다.[15]
일본 신좌파의 내부항쟁 중에서도 특히 피비린내나는 것이 혁마르파와 중핵파 간의 항쟁이었다. 사망자만 백여명, 부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심지어 혁마르파가 중핵파와 혁노협의 최고지도자를 암살하기도 했다.

2.2. 공산동계


이념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걸었다. 독일어로 "동맹"이라는 뜻의 "분트"라고 통칭되었다. 혁공동계 같은 거대 분열은 드물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자잘한 정파들로 깨알같은 분화가 일어났다.
혁공동보다 1년 늦게 결성되었지만 전학련 지도부를 먹어서 초기에는 다수파였다. 60년 안보투쟁의 중심세력이었으며 이때가 리즈시절이었던 제1차 분트. 안보투쟁이 체제변혁운동에서 기시내각 퇴진투쟁으로 변질되면서 안보투쟁 승리 이후 목적성을 잃은 제1차 분트는 해산되었다.
1966년 재건되는데 이것이 제2차 분트. 하지만 제2차 분트는 1969년 메이지대 투쟁 때 전학련 주도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해 메이지 사학측과 졸속 타협을 하면서 욕을 처먹고 와해된다. 이후 재건에 실패하고 적군파, 전기파, 봉기파, ML파, 봉화파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적군파. 그리고 적군파에서 다시 분화된 연합적군아사마 산장 사건을 비롯한 엽기사건으로 유명해진다.
  • (일본공산당)
    • 공산주의자동맹 - 약칭 공산동. 빨간색 하이바에 검은 글자로 "사학동"을 썼다. 사학동이란 공산동 소속 학생회인 사회주의학생동맹을 의미한다.
      • 공산주의자동맹 반기파
      • 공산주의자동맹 정황파
        • 조쿄 출판사
          • 공산주의자동맹 수도권위원회
      • 공산주의자동맹 전기파
        • 공산주의자동맹 봉기파
        • 공산주의자동맹 일향파
          • 시민단체 분트
        • 공산주의자동맹 서전파
        • 노동자공산당
      • 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 약칭 봉화파
      • 적군파 - 빨간색 하이바에 흰색 글자.
      • 일본공산당 가나가와현위원회 - 약칭 혁명좌파
      • 공산주의자동맹 마르크스-레닌주의파 - 약칭 ML파. 중국계파의 일공ML과는 다르다. 하이바는 적-백-적 삼색에 빨간 부분에 큼지막한 "ML"을 흰색으로 썼다.
      • 사회주의노동자당 - 약칭 사노당. → 마르크스 동지회 → 노동의 해방을 목표로 노동자당
      • 공산주의자동맹 혁기파

2.3. 사청동계


이념적으로는 반소주의, 룩셈부르크주의를 내걸었다. 혁공동계와 다른 점은 혁공동계는 트로츠키주의로서 레닌 시절까지의 소련은 긍정하지만 사청동계는 레닌까지 부정한다.
일사당 산하의 사청동에서 1965년 분화한 해방파가 중심 기구인 혁노협을 1969년 설립하고 1971년 사청동에서 독립하여 비로소 성립되었다. 다른 정파들보다 성립이 늦은 만큼 지도부가 한 세대(10년 정도) 어렸다.
협회파(사청동 잔류파, 기성좌파)에 가까운 사민주의자에서부터 극좌폭력노선까지 포함된 광범한 정파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분열과 내홍이 끊이지 않았다. 신좌파들이 거의 망한 2000년대에 1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내부항쟁을 벌이면서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1년에는 새역모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하이바는 담청색에 흰색으로 반제학평(反帝学評)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반제학평이란 해방파 소속 학생회 단체인 "반제학생평의회"를 의미한다.
  • (일본사회당)
    •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 사회주의청년동맹 해방파 - 약칭 사청동 해방파.
        • 혁명적노동자협회 - 약칭 혁노협.
          • 1981년 제1차 분열[16]
            • 혁명적노동자협회 사회당 사청동 해방파 - 약칭 현대사파. 주류파.
              • 1999년 제2차 분열
                • 혁명적노동자협회 해방파 - 약칭 적채사파.
            • 혁명적노동자당 건설을 지향하는 해방파전국협의회 - 약칭 전협파.

2.4. 구조개혁파


사회개혁에 맞서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구조개혁론"[17]을 내걸었다.

2.5. 중국계파


이념적으로 마오이즘, 친중 반소 노선을 걸었다.
  • (일본공산당)
    • 일본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파 - 약칭 일공ML
    • 일본공산당 좌파 - 약칭 일공좌파.
      • 일본노동자당
        • 노동자사회주의동맹
      • 일본노동당
        • 녹색당 삼교파
    • 모택동사상연구회 - 약칭 모련.

2.6. 아나혁련계


아나키스트. 노선은 바쿠닌주의에 가까웠다. 혁공동과는 극렬 대립했고 공산동과는 종종 협력했다. 아나키즘의 고질적 문제인 소집단주의를 극복하자고 아나혁련을 만들었지만 가장 많을 때도 구성원 수는 500명 정도였다.
하이바는 민짜 검은색.
  • 아나키스트 혁명연합 - 약칭 아나혁련.[18]
  •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19]

2.7. 급진적 무당파


  • 전학공투회의
  •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 - 약칭 베평련(ベ平連).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시기를 풍미했던 조직이었다. 소련 붕괴후 공개된 기밀문서, 냉전기에 일본 도쿄대표부에 파견되어 일본 내에서 적극 공작을 담당했던 전직 KGB 요원 (미국 망명 전 최종계급 소령) 스타니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레프첸코(Станисла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евченко)의 폭로 증언[20] 등에 의해 KGB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흰색 하이바에 검은 글자로 "베평련" 또는 검은 하이바에 흰 글자로 "NON"

3. 같이 보기


  • 신사회당 - 일본 신좌파 정당 중 온건화된 계열이다.

[1] 요도호 사건이란, 1970년 3월 31일, 일본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赤軍派)의 간부 다미야 다카마로(田宮高磨)를 포함한 9명의 적군(赤軍) 병사들이 요도호를 하이재킹(공중납치)를 일으켜 일본의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서 적군파 대부분은 전공투 출신이기도 하다.[2] 의외로 비판받는 강도는 공산당 쪽이 더 극심했다. 사회당은 자신들로부터 분파된 신좌파 학생들을 비판하긴 했지만 빠따질로 때려패진 않았고, 나리타 공항 투쟁같은 의제에서는 공투하는 모습도 보여주긴 했지만 공산당 쪽은 그런 것도 없이 민청계를 대동해 대거 때려잡았다.[3] 물론 저 모습은 신좌파 중에서도 대학생이나 노동자들 등 성인 구성원들 기준의 모습이고, 실제 일본 신좌파 활동가들 중에는 '''고등학생 활동가''' 들도 있었다.(#) 예시를 들자면 문세광이 바로 이런 고등학생 신좌익 활동가 출신(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볼셰비키/레닌주의파) 산하 조직인 고교생폭력혁명전선(高校生暴力革命戦線) 출신)이며,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도 총을 들고 저항한 연합적군 소속 활동가들 중 한 명(이미 산악 베이스 사건에서 린치당해 사망한 장남을 제외한 가토 3형제 중 막내. 사건 당시에 일본 기준 16세)이 고등학생이었다. [4] 다만 68혁명에서도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좌파공산주의 포함)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신좌파도 있었다. 즉 서구권에서도 신좌파 중에 공산주의자도 있다는 얘기다.[5] 당연히 신좌익 조직 내에서도 구성원들이 100% 다 테러 활동을 벌이는 건 아니다. 공연 활동가(公然活動家)라고 해서 시위 등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벌이는 부류가 있는 반면, 조직이 소유한 시설의 경비를 맡거나, 연락 및 운송, 폭탄 등의 공격용 무기 개발 및 제조, 테러활동 혹은 우치게바 습격 등의 무력행사 그리고 그를 위한 목표물 사전조사 등의 합법적이지 않은 활동은 비공연 활동가(非公然活動家)라 불리는 부류들이 맡는다. (군마현경 홈페이지에서 설명하는 비공연 활동가의 정의) 즉 공연 활동가는 화이트 요원, 비공연 활동가는 블랙 요원에 해당한다.[6] 다만 이것은 전공투운동과 구좌파적(레닌주의적) 기획이 좌절됨에 따라 새로운 혁명주체를 찾기 위한 자구책의 성격이 있었고, 소수자가 아닌 다수 일본 민중은 반혁명세력, 일제 부역세력으로 낙인찍으면서 고립이 심화되게 된다.[7] 장기간 고립되어 있던 트로츠키주의나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오주의가 유럽의 정치운동 내에서 지분을 확보하게 된 계기 자체가 68혁명이다.[8] 로널드 프레이저의 저서 등을 보더라도 68혁명 당시 시위대 내에서 공산주의 정파들의 규모가 상당했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나코 코뮤니즘 성향의 학생이 직접 검은 깃발을 만들어 들고 시위대에 참여했지만 하필 참여한 곳이 공산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모인 대열이라 '아나키스트들 모인데는 저쪽이다' 라고 주변에서 알려주었다거나, 공산주의 성향의 시위대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의 구호를 외치자 "스탈린!" 이 나올때마다 주면에서 터져나오는 야유를 견디지 못한 끝에 레닌까지만 외치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9]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소싯적 여기 소속이었다.[10] 일공민청은 하늘색과 노란색 하이바를 썼다. 그러니까 폭력시위의 상징 하이바를 구좌파라고 안 쓴 게 아니다.[11] 신좌파들은 고질적인 분열 때문에 수백명 규모를 넘기가 어려웠다. 반면 구좌파 청년단체들은 썩어도 준치라고 정당이라는 제대로 된 조직에 기반했기에 수천 명 규모를 유지했고, 이들이 맞붙으면 수적으로 불리한 신좌파가 일방적으로 발리곤 했다.[12] 도쿄대의 동대전공투, 교토대의 경대전공투, 니혼대의 일대전공투 등[13] 신좌파 정파의 유래가 되었을 뿐 신좌파가 아닌 기성좌파이므로 괄호를 친다.[14] 사청동은 1960년 설립된 사회당 산하 청년단체로, 공산당 산하의 일공민청과 마찬가지로 사청동 자체는 기성좌파에 속한다. 하지만 사청동에서 파생된 신좌파 정파들을 "사청동계" 신좌파라고 한다.[15] 중핵파는 혁마르파에게 혁명의 "혁(革)"자도 붙여주기 아깝다고 꼬박꼬박 가타가나로 "카쿠마루"라고 부른다.[16] 분열된 이후 각 정파는 서로 자기가 진짜 혁노협이라고 주장하며, XX파 라고 붙은 명칭은 구분을 위해 붙은 타칭이다.[17] 194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팔미로 톨리아티가 주장한 노선.[18] 1969년 오사카 예술대 투쟁 때 사수대가 궤멸당하면서 후속 자아비판 과정에서 분열했다.[19] 일본의 제국주의를 반성한다며 과거의 전범기업들에게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당연히 구성원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복복시계가 여기서 나왔다.[20] 이 사람의 폭로 내용에 대해 다룬 국내 기사도 있다. (1983년 기사 - 007뺨치는 소 첩보공작 레프첸코 밝힌 일본속의 소 스파이 활동) 이 기사에서 언급되는 리더즈 다이제스트 일본판 편집장 시오타니와의 대담 내용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레프첸코가 포섭했었던 일본 내 KGB 정보원들의 코드명, 직업 및 사회적 신분에 대해서도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