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 투쟁

 


'''東大闘争'''
[image]
도쿄대 투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야스다 강당의 현재 모습. 정면부가 그을린게 보이는데 이게 격렬했던 시위의 '''유일한''' 흔적이다.
1. 개요
2. 도쿄대 투쟁 이전의 투쟁
3. 도쿄대 투쟁의 시작
3.1. 1968년
3.2. 1969년
3.2.1. 야스다 강당 사건
4. 피해
5. 도쿄대 투쟁 이후
6. 관련 문서


1. 개요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連帯を求めて孤立を恐れず)

도쿄대 투쟁은 사회,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1968년 부터 시작해 전국적으로 전공투 운동을 활발하게 해준 동력원같은 존재이다.
도쿄대학 뿐만 아니라 메이지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니혼대학 등 도쿄에 있는 여러가지 대학이 참가했다.

2. 도쿄대 투쟁 이전의 투쟁


도쿄대 투쟁 이전에는 일본내 반정부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때며 학생운동조직전학공투회의전학련이 만들어졌을때다.
안보투쟁이 가장 유명하였고, 그외 투쟁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 주일미군 철수등 여러가지 투쟁이 있었다.

3. 도쿄대 투쟁의 시작



3.1. 1968년



1968년 1월 29일 도쿄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인턴 제도를 대신하는 제도에 반대하며 시위를 했던것 부터 시작했다.
같은해 3월 12일 도쿄대는 시위했던 학생 17명을 퇴학시킨다고 하였으나, 26일 의학부 강사 2명이 퇴학처분자 17명 중 1명은 대학측에 오인이 있다고 반박하자 이틀뒤인 28일 졸업식이 예정되어있던 야스다 강당에 의학부 학생들이 모여들어 졸업식을 중지시키는 상황까지 만들게 한다.
도쿄대학에 항의를 하던 의학부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학부는 6월15일 야스다 강당을 점령하게 되고, 이틀뒤인 17에는 경찰 기동대 1200여명이 도쿄대학 내로 들어왔다. 허나 20일, 도쿄대 학생들이 경찰의 출동에 대해 항의하자 법학부를 제외한 9개 학부가 하루종일 파업활동에 들어가는 상황까지 벌어지게된다.
항의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26일에는 문학부가 무기한 파업활동을을 선언했다!
상황을 심각해지자 오코치 가즈오 총장은 야스다 강당에서 총장회견을 열었지만, 7월 2일에 신좌익계열 학생들이 야스다 강당에 바리케이트를 세우며 투쟁을 시작했다.
신좌익 학생 투쟁이 시작된지 3일만에 도쿄대학에는 야마모토 요시타카[1] 이마이 기요시[2]를 중심으로 도쿄대학 전학공투회의(도쿄대 전공투)가 결성되어 교양학부까지 무기한 파업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져갔다. 8월 28일에는 전학공투회의 학생 200여 명이 의학부 본관을 점거하는 일이 발생했고, 9월 9일에는 의학부 졸업시험이 있었지만 수험 대상자는 의학부의 과반수도 못미치는 45명에 불과했다.(의학부는 총 105명으로 시험당시 나머지 60명은 보이콧 투쟁...) 결국 의학부 졸업시험은 연기되었고, 18일 의학부는 당분간 휴학한다고 하였다.
22일에는 전공투의 학생 250여 명이 의학부 부속병원 외과계 의국·연구동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봉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투쟁내내 거의 활동을 하지 않던 법학부도 10월 12일 파업에 들어가 '''1877년 개교 이후 처음으로 전체 학부가 무기한 총파업을 벌였다!'''
11월 22에는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두고 전공투 계열의 7천여 명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공산당(민청) 계열의 7천여 명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까지 나오게 되었다(!). 결국 전학 바리케이트 봉쇄는 취소되었다.
학생과 교사의 충돌이 계속되던중 12월 29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1969년 도쿄대 입시 중지를 발표했다!'''

3.2. 1969년


오코치 가즈오 총장이 사임하자 새로운 총장이 된 가토 이치로는 경시청에게 기동대 지원을 요청하자 1월 9일 기동대가 대학 구내에 진입하였고, 10일에는 지치부미야 럭비장에서 도쿄 대학 7학부 학생집회를 열어 민청계와 학원 정상화를 추구하는 논포리 학생과 교섭을 통해 학부의 파업에 대해 수습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점거를 지속하는 전공투 학생과는 의견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경찰력 도입을 결심하여, 16일 도쿄대학 구내의 바리케이트 철거를 요청하였다.

3.2.1. 야스다 강당 사건


'''安田講堂事件'''
우리가 전공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다.
1월 18일 7시 부터 바리케이트 철거를 시작한 기동대는 85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의학부 종합중앙관과 의학부 도서관에서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했고, 콘크리트 덩어리,화염병 등을 던지는 학생들의 저항을 막으면서 의학부,공학부,법학부,경제학부 등의 각 학부의 시설 봉쇄를 해제하고 야스다 강당을 포위했다. 여기까진 순조롭게 일이 잘 풀렸다.
오후 1시부터 야스다 강당 바리케이트 철거 작전을 시작했지만, 기동대들은 '''학부시설 철거 작업때와는 차원이 다른 학생들의 저항을 체험한다.'''

2000여명 전후로 예상되는 인원의 학생들이 창문을깨고 화염병을 던지는가 하면 강당내의 책상과 의자로 강당 입구를 막아 불을 지르고 옥상에선 벽돌과 콘크리트 더미를 던졌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저항에 당황한 기동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5시 40분이 돼서야 작전을 중단했다. 당시 야스다 강당에는 학부 시설을 포기하고 강당으로 온 학생들과 투쟁을 지원해주러 온 메이지대학, 니혼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메이지대학 학생이자, 야스다 강당 수비 대장이던 요네다 류스케는 야스다 강당의 구조를 이용해 기동대의 진압을 방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작전은 다음날로 연기되었으며,19일 오전 6시 30분 기동대는 경찰헬기와 살수차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진해 나갔다.
작전 시작 '''9시간 20분'''만에 3층 대강당을 점령하였고, 오후 5시 46분이 돼서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검거자는 총 457명

4. 피해


야스다 강당 사건 이전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사건 이후에는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다.
구체적인 작전없이 돌입한 기동대 측에서 710명이 부상 그중 31명이 중상을 입었고, 학생 측은 71명 부상47명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학생들의 방화와 기동대의 진압도중 발생한 재산피해 또한 어마어마하다.
사건이후 야스다 강당은 23년동안 폐쇄되었다고 한다(...)

5. 도쿄대 투쟁 이후


도쿄대 투쟁 이후 일 년 사이에 국립대학 75개 중 68개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교가, 사립대학 270개 중 79개교가 전공투 투쟁에 가담했다.
교토대학을 시작으로 와세다대학, 도호쿠대학, 시즈오카대학, 구마모토대학, 오사카대학, 규슈대학, 히로시마대학 등 일본의 주요 국공립 대학과 사립대학의 80%(총 165개)가 전공투 투쟁이나 바리케이트 봉쇄를 시작했다.
대학뿐만 아니라 고등학교까지 영향을 줘 시험제,교복 폐지 등을 주장하며 바리케이트를 세우는 고등학교또한 적지 않았고[3], 교복을 입지 않고 등교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 등교하는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자, 당시 중,고등학교 표준형 교복이었던 가쿠란교복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1969년에 일본 문부과학성이 도쿄대 입시를 중지시켜서 대부분의 학생이 교토대로 빠졌다. 그래서 도쿄대에는 69학번이 없다.
그런데, 교토대 입학생도 교토대 투쟁때 전공투에 가담하거나 바리케이트를 봉쇄하는데 힘을 썼다고 한다(...)
도쿄대 투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전공투들은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 사회의 영향을 크게 주었지만 과격의 도가 지나치면서 학생운동은 일본국 국민의 동의를 이끌지 못하게 되었고, 동대전공투 의장이었던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체포되고 여러 주요 동력원들이 연달아 체포되면서 힘을 잃어 결국 역사에 한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6. 관련 문서



[1] 당시 도쿄대 전공투 의장[2] 당시 도쿄대 전공투 부의장. 나중에는 일본 공산당일본 민주당의 참의원 의원을 역임했다.[3] 대표적으로 사카모토 류이치가 신주쿠 고등학교에, 소설가 무라카미 류가 사세보 북 고등학교에 바리케이트를 봉쇄했다[4] 와세다 대학에서 전공투 활동을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