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지진

 


발생일시
(GMT+9)

1978년 10월 7일 18시 19분 52초
진앙
대한민국 충청남도 홍성읍 지역
진원의 깊이
10km
규모
5.0
여진 횟수
4회[1]
사상자
2명 부상
1. 개요
2. 피해
3. 영향
5. 관련 문서


1. 개요


1978년 10월 7일 오후 6시 19분 52초에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리히터 규모 5.0의 지진이 일어났다. 특이하게 지진의 진앙지가 인구가 나름대로 밀집한 지역인 홍성읍 지역이었는데 후에 정밀한 과학조사를 거친 결과 지진은 홍성읍 지하 10km 지점에서 발생했으며 일본의 지진 관측소들은 홍성 지진의 지진파를 뚜렷하게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지진파가 퍼져나가지 않고 진앙지인 홍성읍 일대에 집중되었던 걸로 드러났다. 이런 탓인지 서울이나 광주광역시 및 가까운 대전광역시에서도 지진을 느낀 이들이 별로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의 지진 역대 순위에 들었다.

2. 피해



KBS에서 당시 촬영한 피해 영상. 피해를 입은 홍주읍성의 성곽 일부와 홍주중학교가 등장한다.
[image]
규모 5.0에서 5.9는 국한된 지점에서 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건물들을 쓰러뜨리는 효과가 있는데, '''1970년대에는 내진 설계 기준이 없어서 대한민국에 내진 설계가 된 건물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농촌 지역에서는 더더욱 없었으므로 홍성 지진은 진앙지에서 가까웠던 홍성읍 일대에 큰 피해를 남겼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2명 부상으로[2] 경미했으나, 물적 피해는 상당해 홍성읍 일대의 건물 120여 채가 파손되고 1,200여 채의 가옥 및 건물에 균열이 발생했으며, 홍성군청 등 여러 건물들의 유리창이 상당수 파손되기도 했다. 또한, 홍성군의 대표적 문화재인 홍주읍성의 성곽도 일부가 파손되어 복구가 진행되었다.

3. 영향


그동안 한반도는 환태평양 지진대에서 벗어나 있어서 지진의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이보다 앞선 9월 16일에 발생한 속리산 지진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1달도 되지않아 인구 밀집지대에서 피해를 입힐 정도의 지진이 발생해 한국도 지진과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서 80년대에 들어와 '''한국 건축에도 내진설계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결국 홍성지진 10년만인 1988년 정부는 내진설계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1992년에는 도로 및 교량의 내진설계도 의무화했다. 그러나 3층 이상의 건물에만 적용이 되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효고현 남부 지진의 경우 3층 이하의 건물들의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에 강도가 높은 지진 발생 시 현재의 내진설계 기준으론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대지진이 있고 그 영향으로 1~2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지진이 빈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홍성 지진이 있기 2년 전 중국에서 그 유명한 탕산 대지진이 일어났다. 참고로 홍성 지진이 일어나기 2주 전인 9월 16일 새벽에 일어난 규모 5.2의 속리산 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는 홍성 지진과 대조적으로 전국적으로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4. 음모론


한편 일각에서는 홍성 지진의 원인이 한국의 핵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주장을 펼쳐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홍성에서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핵실험을 했고 그 여파로 홍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미국과의 갈등이 있던 시점에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나온 주장이라 할수 있겠지만 매우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보통 핵실험은 인구가 밀집하지 않은 지역에서 행한다. 21세기의 북한 역시 좁은 국토지만 가능한 인구가 적은 함경북도 지역에서 핵실험을 한다. 그런데 홍성은 핵실험을 하기에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며 기밀을 요하는 핵실험을 진행하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게다가 미국이 한국의 핵개발을 의심하며 집중적인 감시를 하던 상황에서 과연 간 크게 홍성같은 인구밀집지역에서 핵실험을 할 수 있었을까? 핵실험 설은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근거는 전혀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5. 관련 문서




[1] 이전 문서엔 제대로 된 측정 기술이나 장치가 없어서 집계가 어려웠다며 여진 횟수가 서술되지 않았으나, 1978년 10월 9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0월 7일 오후 6시 20분, 10월 8일 오전 6시 56분, 오후 7시 15분, 오후 9시 23분에 여진이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2] 한 명은 지진이 끝난 뒤 집에 들어갔다가 초가집이 무너져서(!) 나머지 한 명은 그 사람을 구조하다가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