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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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K리그에 데뷔할 때 특별히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선수였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시절부터 홍순학을 눈여겨보고 있던 당시 대구 FC의 창단 감독인 박종환 감독의 오퍼를 받아 2003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FC의 창단 멤버로 입단,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대구 FC에서 겨울 전지훈련기간 동안 박종환 감독의 독한 지옥훈련을 견뎌내는 데 성공하며 2003년부터 대구 FC의 얇은 선수진 속에서 출장기회를 잡게 된다. 첫 시즌에는 부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2004년에 포텐셜이 갑작스럽게 터져서 27경기 7도움으로 도움왕을 차지하게 된다.
2004년의 대구 FC는 기동력 있는 축구를 구사했고, 당시 노나또와 훼이종이라는 대박 용병을 영입하여 전방위 압박과 역습 축구를 잘 구사했다. 그리고 중원에서 노나또, 훼이종 투톱에게 공을 배달해주는 역할을 홍순학이 소화해 줬는데,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약팀인 대구 FC에서 도움왕이 나오게 되자 당시 K리그 팬들도 누구인가 하면서 상당히 의아해했을 정도.
이 활약으로 홍순학의 가치가 갑작스럽게 폭등했고, K리그 팬들에게 주목해야 할 신인으로 눈에 띄게 되었다. 그러나 2005년에는 2골 4어시스트로 2004년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1] 2005 시즌이 끝나갈 때 즈음에 해외 이적을 선언하며 노병준, 이정운 선수와 함께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리그 이적은 완전한 실패였다. 당시 홍순학의 에이전트는 홍이삭 에이전트[2] 였는데, 당시 홍이삭 씨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무조건적인 해외진출 분위기에 편승해서 '꼭 바로 빅 리그를 가지 않더라도 타 유럽 리그에서 경험을 쌓으면 언젠가 빅 리그로 갈 수 있음'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였고[3] , 해외 진출이라는 말만 나오면 대승적 차원 드립을 치던 당시 축구팬들도 홍순학의 해외 진출을 밀어주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진출 당시 에이전트는 원 소속 팀인 대구와의 협의가 전혀 없이 먼저 오스트리아 그라츠 AK와 먼저 협의해 버렸고, 이에 분노한 대구는 국제이적동의서를 써 주지 않으며 파워게임을 벌여 버렸다. 그러다 결국 대구는 대승적 차원으로 홍순학을 오스트리아로 보내게 되었고, 2006 시즌부터 그라츠 AK에서 뛰게 된다.
그러나 선수나 에이전트 모두 오스트리아 리그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고, 더더구나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된 홍순학과 그라츠 AK와의 계약이 전임 계약인 것도 아닌 연습생 계약이었던 터라 팀에서도 그냥 쩌리 자원 수준 정도로만 취급했고, 홍순학 스스로도 팀에 적응하지 못하며 오스트리아에서 3경기 출장에 그치며 1년만에 한국으로 U턴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계약을 맺고 2007년부터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수원의 두터운 미드필더 자원에서 경쟁을 하면서 출장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한 매 시즌마다 부상을 달고 살아서 2007년 이후부터는 한 시즌에 20경기 이상 출장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2010 시즌 중반에 윤성효 감독으로 바뀌면서 팀에서 방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2015년 고양 Hi FC로 이적했지만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고, 시즌 종료 후 퇴단했다. 2016년 봄부터 인도네시아 슈퍼 리그의 페르시아 자카르타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단 해외진출은 오스트리아 그라츠 AK이후 10년 만이다.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으나 한 구단에 35세 이상 선수를 2명 이상 보유할 수 없다는 인도네시아 리그 로컬룰이 발동되면서 방출됐다. 이후 2017년 인도네시아 국군 축구팀인 PS TNI(현재 PS TIRA)와 단기계약을 맺어 5경기에만 나선 뒤 팀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카르타 시절 갑작스럽게 팀을 떠나게 된지라 자카르타의 서포터즈인 자크매니아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것을 늘 미안해 했고,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전 자크매니아를 만나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8년 3월을 기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와 있다가 2018년 7월 JFL 팀 FC 오사카 입단이 발표됐지만, 이마저도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다.
공식적인 은퇴 발표는 없었으나 잠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중단하고 있는 상황이며, 2019년부터 '수니핏'이라는 건강 도시락 쇼핑몰 사업을 하고 있다.
대구 FC 시절에는 소속 선수들 중 최초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다. A매치 1경기에만 나서긴 했지만.[4]
대구 FC의 창단 멤버이자 역대 대구 선수 최초의 타이틀 홀더에 대구 FC 선수 최초의 국가대표 타이틀이 있지만, 대구에서 뛴 기간이 다소 짧은 탓에 대구 FC 10주년 베스트 11에는 뽑히지 못했다.
2. 플레이스타일
팀 내에서 가지는 역할은 멀티플레이어이자 훌륭한 백업 선수. 원래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미드필더였음에도 팀에서 필요하다 싶을 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소화하고, 수비수들이 단체로 드러누웠을 때에는 중앙 수비수로 뛴 적도 있고, 2011년에는 아예 오른쪽 풀백으로 나오며 다양한 포지션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구 시절 별명은 미드필더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활약한다고 해서 '홍반장'. 수원에서는 '수원 박지성' '순학신' 등의 별명이 있긴 하지만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멀티 플레이 능력에 꽤 종종 터지는 택배 크로스 및 패스로 인해 스타가 즐비한 수원에서 튀지는 않지만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
3. 관련 문서
[1] 대구의 득점을 책임지던 노나또와 훼이종 투톱이 각각 서울, 성남으로 팔려간 게 컸다.[2] 유럽 변방 리그 이적 전문가로, 이호진 선수의 라리가 이적, 권정혁 선수의 핀란드 리그 진출 등을 주선했다.[3] 실제로 설기현의 벨기에 주필러리그 진출 - 챔피언스 리그 경험 - 챔피언십 리그 진출의 사례가 있었기도 했다.[4] 대구 FC 소속 선수들 중 최초로 월드컵에 나선 선수는 골키퍼 조현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