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환

 



'''박종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대한민국'''}}}
{{{-2 39대, 42대, 46대
'''대한민국'''}}}
{{{-2 50대, 54대

'''클럽'''
'''성남 FC'''}}}
{{{-2 1대, 8대
'''대구 FC'''}}}
{{{-2 1대




'''박종환의 수상 이력'''

[image] '''올해의 감독상'''
'''1992년'''

'''1993년 ~ 1995년'''

'''1996년'''
이회택
(포항제철 아톰즈)

'''박종환'''
'''(일화 천마)'''

고재욱
(현대 호랑이)

[image] '''올해의 감독상'''
'''1994년'''

'''1995년'''

'''1996년'''
찬윗 폴치윈
(태국 국가대표팀)

'''박종환'''
'''(일화 천마)'''

마유아난
(중국 여자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image]
''' 이름 '''
'''박종환'''
'''朴鍾奐 | Park Jong-hwan'''
''' 출생 '''
1936년[1] 2월 9일 (88세) /
황해도 옹진군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경희대학교
''' 신체 '''
171cm
''' 직업 '''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대한석탄공사 축구단(1964~1966)
''' 감독 '''
단국공업고등학교(1966~1969)
성남고등학교(1970~1972)
유신고등학교(1973~1974)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1975)
서울시청 축구단(1975~1988)
대한민국 U-20 대표팀(1980~1983)
대한민국 대표팀(1983~1984)
대한민국 대표팀(1986~1988)
일화 천마(1989~1995)
대한민국 대표팀(1990, 1995, 1996)
우한 야치(1998)
숭민 원더스(1999~2002)
대구 FC(2003~2006)
성남 FC(2013~2014)
여주시민축구단(2018~2020/ 총감독)
1. 개요
2. 축구인 경력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1936년 2월 9일 생으로 대한민국에서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 그리고 성남을 맡게 되면서 전세계 최고령 감독 자리에 올랐었다(...)
'''청소년 대표팀 4강 진출'''+ 일화 천마팀[2] '''리그 3연패''' + 라이벌 포항과의 치열한 경쟁까지, 대한민국 축구사에 길이 구전될만한 장면을 일궈낸 축구인이다. 그러나 강한 채찍질로 선수들의 반발을 사고, 일부 선수들의 고의 태업설 루머까지 겹쳐, 7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빠따" 이미지도 강했다. 그렇지만 연령대가 높은 축구팬들은 공격적이고 다양한[3] 전술로 '''재밌는 축구'''를 추구했던 박종환 감독이 이룩한 성과를 여전히 매우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일례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 상대였던 일본팀 모리야스 감독이 발빠른 공격진 4~5명을 전방으로 보내 우리 수비진을 흔들었던 '''벌떼공격전술'''은 박종환 감독이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구사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한 성과를 거둔 검증된 작품.
1989년 일화 천마, 2003년 대구 FC에 이어서 2014년 성남 FC 감독이 되면서 '''창단 감독 3회'''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 축구인 경력



2.1. 선수 경력


황해 옹진 출신으로 월남해서 춘천에 정착하였다. 춘천고등학교를 3년간 다녔으나 대학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해 1년 더 다녔는데 [4], 이 때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면서[5] 경희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고 한다.[6] 이후 경희대를 졸업한 후 석탄공사 실업팀에서 잠시 선수생활을 했다.

2.2. 지도자 경력



2.2.1. 초기


청소년 대표팀에는 뽑혔으나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은퇴하고 당시 프로팀 역할을 했던 실업팀 지도자가 아니라 학교 체육부로 가서 단국공고에서 체육교사 겸 감독을 맡았다. 이때도 틈틈히 심판생활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프로팀 감독시절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고 그라운드에서 난동을 부리다 수차례 퇴장당하거나 출전정지를 먹었다. 어쨌든 단국공고 이후 성남고, 유신고 감독을 거쳐 전남기공으로 실업계에 진입하고, 이후 서울시청을 맡는다. 서울시청 재임기간은 무려 14년(1975~1989)이나 된다.

2.2.2.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서울시청 실업팀의 감독을 맡던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7]에서 벌떼축구로 U-19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으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당시 산소가 희박한 멕시코 고지대에 적응해야 한다면서 방독면을 씌우고 풀타임 연습 경기를 시켰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지며, 결국 희박한 산소를 체험하며 훈련한 것이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실업 강자인 기업은행 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9-2로 승리했는데,[8] 선수들에게 2골 실점에 대한 벌로 경기 후 운동장 20바퀴를 돌게 했다고 한다.[9] 소위 만화 외인구단을 방불케하는 지옥훈련을 시켰다고... 그리고 이때 해외 언론에서 대표팀을 표현할 때 쓴 'Red Furies'는 '''붉은 악마라는 명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도 전반이 끝난 후 라커룸에서 플레이를 제대로 못한 선수들의 따귀를 때렸다는 후일담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뒤에서 후술할 축협의 왕따논란이 좀 있었다. 당시 프로축구가 막 출범했고, 대중들은 이런 엄청난 업적을 세운 박종환도 당연히 프로팀 감독으로 영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박종환은 일화 천마가 창단될 때인 1989년까지도 프로에 코치로도 진입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에 감독직을 맡았던 김정남(1940년생)은 그보다 3살 아래이며, 이회택(1946년생), 고재욱(1951년생)은 거의 한세대 차이가 난다. 이때문에 박종환 왕따설은 당시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10]사실상 U-20의 업적이 아니었으면 박종환은 수많은 무명 아마추어 지도자의 한명으로 끝났을 것이다

2.2.3.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그러나 1989년 일화를 맡은 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속 우승'''의 업적을 달성한다. 소위 선진축구를 배웠다는 차범근 당시 현대 감독조차 박종환의 지도력에 대해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11] 일화 감독을 맡은 동안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등 유망주들을 일약 전국구 스타로 끌어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승 포상금과 계약금 미지급, 감독의 동의 없는 선수 트레이드[12]를 놓고 박규남 선수단장과 면담한 뒤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1996년 4월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감독직을 전격 사임한다.

2.2.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김찬기호 '''

''' 박종환호 '''

''' 김삼락호(U-20) '''
U-20의 업적으로 1980년대에는 히딩크 못지 않은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 이후의 대표팀에서 활약상은 딱히 없었다.
박종환은 U-20의 업적으로 여러번 국대팀 지휘를 맡았는데, 당시에는 전임감독제가 아니라 대회마다 소속팀 감독을 겸임하며 국대 감독을 맡는 방식이었다. 쉽게 말하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나가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감독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1984~85년, 1986~1988년, 1990년, 1996년 각각 국가대표팀을 맡았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렇게 수차례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나, 월드컵 대표팀은 끝내 맡지 못했다. 박종환 본인은 인터뷰에서 꼭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겠다는 다짐을 여려차례 했지만, 워낙 독불장군인 성격 탓에 협회와 축구인은 물론이고 지도하는 선수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선뜻 대표팀을 맡길 리가 없었다. 심지어 월드컵을 앞두고 전초전 성격으로 맡은 대표팀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거나 결정적인 순간 성적을 내지 못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여론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80년대 중반부터 대표팀이 죽을 쑤기만 하면 지금 감독을 자르고 박종환 감독을 앉히라는 성화가 들끓었다. 1983년의 후광이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1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U-20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라간 것은 히딩크 전까지 한국 국대팀의 최상 커리어였으며, 그는 대중들에게 '''명장'''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국가대표팀을 여러차례 맡았고, 현재까지도 올림픽팀 포함해 '''국가대표 감독을 5차례'''나 맡은 박종환보다 더 많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사람은 없다.
그의 열성팬 중 한 사람이 축구광이었던 전두환이었는데, 그가 국대감독을 지휘할 때 청와대에서 TV 중계를 지켜보다 휴식시간에 전화해서 작전지시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거짓말 같지만 박종환 감독 본인이 확인 해 준 일화이다. 전두환과 박종환이 이렇게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인지, 퇴임 이후에도 박종환과 그 친구인 이주일을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주일의 5공 초반에 출연금지[13]를 사과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축구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세대를 불문하고, 1983년의 업적은 당시를 지냈던 모든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를 성남 FC로 영입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도 마찬가지인데, 야권 성향의 인권변호사 출신인 이시장은 전두환과 정치적 성향은 거의 반대되지만, 그럼에도 대구FC이후 초야에 묻혀있던 박종환을 삼고초려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대표팀에서는 불명예 퇴진이 반복되었다.
1983년 청소년 대표팀의 호성적에 힘입어 1984년 LA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맡았으나, 역시 강압적인 지도 방식이 문제가 되어 최순호, 최인영, 이태호, 변병주, 박경훈 다섯명이 태릉선수촌을 무단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하다못해 듣보잡도 아니고 대표팀 핵심 멤버들이라 파장은 더욱 심각했다. 선수들도 줄빠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인데도, 공개적으로 항명하면서 팀을 이탈할 정도였으니 박종환 감독의 지도가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당시 정서상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축구협회는 이들에게 '''3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긴 하지만, 이때부터 대중들 사이에 박종환은 '''불통의 아이콘'''이란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징계를 받은 5명은 사실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추였기 때문에 슬그머니 출전정지 처분은 해제되고 대부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그대로 나간다.
그리고 이런 우여곡절끝에 맞이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사우디전 편파 판정으로 억울하게 4대5로 패하고[14], 플레이오프[15]인 이라크전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1:0패배.. 이때도 선수들이 후반에 태업이라고 보일 정도로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박감독은 직전의 사우디전에서 체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탓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1985년까지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이해 열린 고베 유니버시아드에서 5위로 마감하여 사퇴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박종환 감독 자체가 워낙 인기였고 박종환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의 전력도 강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종환의 올림픽 대표팀과 김정남의 국가대표팀중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설전이 있었고, 결국 두팀은 19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각각 참가 하여 결국 결승에서 맞붙었다. 잠실주경기장에서는 3만 명의 팬들이 몰렸고, 김정남 감독은 형이 '질수는 없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박종환 감독 역시 '져줄수는 없다'며 경기전 부터 장외 신경전을 펼쳤다.[16]. 결국 경기에서 국가대표가 올림픽 대표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으나, 올림픽 대표팀은 대등하거나 오히려 앞서는 경기내용을 보여 오히려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 면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었다.
1986~1988년에는 임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 올림픽 직전에 평가전겸으로 열린 대통령배 축구대회[17][18]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패하고 결승진출에 실패하자[19] 당시 김우중 대우 회장이 이끌던 축협 지도부와 마찰을 빚고 1988년 7월 사임했다. 이때도 대표팀에서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20]
1990년에도 8월에 이차만[21] 감독대행 후임으로 대표팀감독을 맡아서 1990년 남북 친선축구경기의 감독으로 방북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패해 금메달획득에 실패하며 동메달, 잘렸다.
카리스마가 강해서 스타선수들이 찍소리도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국가대표팀을 맡자마자 한 일이 머리를 기르던 김주성 선수에게 머리를 짧게 깎도록 지시한 일이었는데, 개성 강한 김주성이 그 포스에 쫄아서 바로 머리를 깎고 훈련에 합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프로가 정착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런 지도는 많은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 고재욱호 '''

''' 박종환호'''

''' 차범근호 '''
한국대표팀은 미국 월드컵에서 2무를 거뒀지만 지역예선부터 김호 감독의 수비 위주의 전술에 언론과 팬들의 불만이 높아져 있었고 그 결과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영입되지만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차상광의 역대급 알까기와 함께 4강에서 탈락하며 외인 감독론도 쏙 들어가던 차였다. 이에 공격 축구를 지향하는 박종환을 원하는 국민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화와 K리그 3연패를 이룬 터라 반박하는 여론도 없었고 박종환은 안방 잔치인 1995년 코리아컵에 맞추어 국대 감독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대회 내내 비교적 순항하다 예선에서 이미 손쉽게 이긴 바 있는 잠비아와의 4강전에서 석연치 않은 연속골을 얻어맞으며 2:3으로 져 탈락하게 된다.
사실 이 경기는 식스투 참사에 묻혀서 그렇지, 후반 들어 급격히 경기력이 저하되며 대표팀 태업 논란을 불러일으킨 몇 안 되는 경기 중 하나이다. 팬들도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중에 박종환 본인이 국대 핵심 멤버들의 음주로 인한 패배 비난 논란을 꺼내들며 국대 멤버들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감독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표팀 감독이 공중에 뜨게 되는데 서로 감독직을 고사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지던 시기이다.
결국 1995년 8월 12일 수원에서 있었던 브라질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는 당시 포항 스틸러스 감독이자 훗날 대표팀 감독을 두 차례나 맡는 허정무 감독이 임시 감독으로 경기를 지휘했고(결과는 0-1 패), 9월 30일 잠실에서 열린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초청 친선 경기는[22]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던 정병탁 감독이 맡았다(결과는 1-2 패). 또 10월 31일에 역시 잠실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친선 경기는 당시 울산 현대 감독이던 고재욱 감독이 임시로 지휘봉을 잡는 등(결과는 1-1 무승부) 원 포인트 릴리프으로 이 감독 저 감독이 돌아가며 대표팀을 맡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1996년 봄 박종환은 국민 여론 및 동정론을 등에 업고 어렵게 다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2002월드컵 유치 기원으로 마련된 AC 밀란과 유벤투스 초청 경기였다. 정몽준 회장이 추진하는 중요 이벤트였기에 기회를 잡게 된 박종환은 AC 밀란을 3:2로, 유벤투스 FC를 4:0으로 격파하는데, 비시즌에 유로 96 관계로 국가대표에 차출된 선수들이 빠진데다가 시차적응도 안된 채 친선경기에 나선 세리에팀이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는 뻔하다. 심지어 유벤투스는 챔스 결승전 승리 후 5일만의 한국행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델 피에로, 라바넬리, 디디에 데샹, 콩테, 페루찌 등 주요 선수들은 유로96 대표 선발로 제외됐다. 이 두 경기는 당시 2002년 월드컵 유치전을 펴고 있던 축협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어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래도 그당시 세계최강 세리에의 조지 웨아, 로베르토 바조, 잔루카 비알리 등이 왔고, 거기다 그 해 챔스 우승팀을 초청했다는 점에서 정몽준의 당시 피파 내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 특유의 일자수비에 대응한 맞춤형 작전으로 홍명보의 횡패스에 서정원이 침투하는 작전을 써먹어 두게임에 모두 성공시키는 등 쇼 성격의 게임이긴 했지만 역시 국내 지도자 중 전술 이해도는 뛰어난 감독임을 알 수 있다. 국대에서 애제자인 신태용이 링커, 고정운이 윙어로 활약해 주어 시작은 나쁘지 않았고 누구도 프랑스 월드컵 감독으로 박종환을 의심치 않던 시기였다. 박종환은 파비오 카펠로마르첼로 리피에게 이긴 유일한 아시아 출신 감독인 셈이다.[23]
그러나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8강전에서 이란에 2-6으로 떡실신당하는 '''식스투 참사'''로 하루아침에 인심이 돌변, 엄청난 비난 세례를 받으면서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사실 이 대회는 예선전부터 박 감독이 공격 성향의 김주성을 스위퍼로 내리고 홍명보를 중미로 올리는 동시에 일화 출신 이영진을 주전 윙백으로 기용하는 등 변칙 포메이션을 고집하며 시작부터 언론이 강한 의구심을 보였다. 예선 내내 언론이 비난하고 팬들은 불안해하는 와중에 팀 케미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인도네시아전에서도 2골을 내준 끝에 4대2로 겨우 신승하였다. 박감독을 비롯한 홍명보, 황선홍 등 핵심 멤버의 얼굴은 예선 내내 썩어 있다시피 했고 쿠웨이트전에서 이미 실망의 극치를 보여주는 플레이로 0대2로 지면서 사실상 짐 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1승1무1패로 고전한 끝에 다른 조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원치 않았던 듯한) 골을 종료직전에 넣으며 승리해 가까스로 8강에 합류하였다. 박감독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수비의 김주성을 공미로 끌어올리는 변화를 주는데, 전반전은 박감독이 원한대로 경기가 풀려 나가면서 애제자 라인인 김주성-신태용-고정운 그리고 박감독이 코리아컵부터 원톱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김도훈의 활약으로 2대1로 앞서 나갔다. 어디까지나 심증이지만 후반전부터 급격히 수비에 구멍이 나며 팀 전체가 무기력한 플레이로 돌변하여 결국 "식스투 참사"라고 불리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박종환 감독은 사실상 한국 축구계에서 영구까임권을 얻는다. 한국팀은 전반과 후반에 완전히 다른 팀처럼 플레이 했다. 전반에 김도훈이 먼저 첫골을 넣고 동점골을 허용한 뒤, 신태용이 추가골을 넣어 2-1로 전반을 마치고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들어오자마자 한 골을 내준 후, 알리 다에이에게 거의 5분마다 한 골씩 4골을 연속으로 내주면서 개발살났다.[24]
4골을 뽑아낸 알리 다에이가 대단한 선수이긴 했지만, 문제는 한국 수비수들이 후반에 걸어 다니면서 이란 공격수들을 구경만 할 정도로 막지를 못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태업 논란이 벌어졌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비난여론이 등등하자 차범근은 박종환을 옹호하는 칼럼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근데 차범근 자신도 2년 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 같은 운명을 겪게된다. 그런데도 박종환은 위에서 말했듯이 수원 감독 시절의 차범근을 디스한다.
1990년과 1996년에 번번히 이란에 패하면서 몰락했다. 1984년에는 이라크에게 패해 몰락했으니 중동 팀에 약한 징크스가 있다.
이후 박종환은 두 번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지 못한다. 그리고 이 충격적인 씩스투 참사 패배 때문에 박종환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는 매우 싸늘하게 변하면서 박종환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다만, 장난조로 꺼내는 사람이 있긴 하다. 일례로 2011년 조광래 감독이 석연찮게 경질을 당한 이후에 대표팀이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월드컵 3차예선 쿠웨이트전 한 경기 땜빵 감독으로 쓰자는 이야기가 장난식으로 나왔다.
당시의 이란전 패배가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박종환식 강압적인 지도에 반발한 선수들이 고의 태업을 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올대와 국대에서 실패한 이유가 빠따질에 반발한 스타 선수들의 태업이란 설이 팽배하나, 실제로 체력저하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사실 체력저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상식적으로 전반은 잘하다가 후반만 말아먹는 태업이 어디 있는가...
사실, 히딩크 이후 세대에겐 '더블 스쿼드'나 '셔틀런' 같은 용어가 낯설지 않겠지만, 쌍팔년도만 해도 우리 선수들의 장점은 체력과 정신력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컨디션 조절이나 체력훈련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였다.[25] 그러니 전반전에 훨훨 날아다니다가 후반 들어서 급격한 체력저하 현상을 보이며 걸어다니는 선수들을 보고 태업해서 안 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2.2.5. 중국 갑A 리그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8년 박종환은 중국 슈퍼 리그의 전신인 중국 갑A리그의 우한 야치 (武汉雅琪) [26] 의 감독을 맡은 바 있었다. 하지만 취임후 7게임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바로 해임되었다.

2.2.6. 여자축구


대한민국 여자 축구가 열악한 기반에서도 지소연, 여민지 같은 새싹들을 발굴하며 이만큼 자리를 잡은 데에는 박종환 감독의 역할이 크다. 실제로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이기도 하였다. 사재 3억원을 털어서 숭민원더스[27]를 창단했다. 그러나 다단계 업체와 손을 잡은 것 때문에 논란을 빚었고, 그가 여자축구연맹 회장에서 물러난 뒤 숭민원더스는 지원이 끊어졌다가 끝내 해체되었다.

2.2.7. 대구 FC


또한 창단 초기 약체팀으로 평가받던 대구 FC를 8위까지 끌어올렸던 것도 박종환 감독의 역이 상당히 컸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빠따라는 이미지 덕에 원래 가지고 있는 실력까지 무시받는 케이스인 셈. 여담이지만 대구 감독 시절에는 용병들마저 그의 포스에 쫄았다고...
다만 2004년 8위를 차지한 대구를 과연 약진이라 보아야 할지는 미묘하다. 먼저 2002년 K리그는 10개 팀으로 시즌을 치렀다. 감이 빠른 분들은 이 연도를 보고 짐작하셨겠지만, '''기껏 지어놓은 월드컵 경기장을 놀릴 수는 없으니''' 2003년에 부랴부랴 광주 상무와 대구를 창단하여 12개 팀으로 시즌을 치렀고, 2004년 인천이 참가해 13개 팀이 되었다. 더구나 2004년 중하위권 순위표를 보면 8위가 '''의미 없는 숫자놀음'''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순위
구단명



승점
득실
6
성남
13
12
11
51
1
7
대전
11
13
12
46
-5
8
대구
9
16
11
'''43'''
0
9
서울
9
16
11
'''43'''
-4
10
광주
10
13
13
'''43'''
-4
11
인천
9
14
13
41
-10
12
부산
8
16
12
40
-8
13
부천
6
19
11
37
-10
보다시피 7위부터 12위까지 6개팀이 단 1경기-승점 3점차이로 순위가 결정된 혼전 양상인데다, 그나마 8위도 '''골득실차'''로 얻은 자리다.
이후 대구는 줄곧 대대광강으로 K리그 승점자판기 노릇을 했고 결국은 K리그 챌린지로 강등당했음을 상기하자. 즉 단기간 스쿼드를 쥐어짜서 성적을 내는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호언장담처럼 명문구단이 되지도 못했고 하물며 공격축구를 표방했음에도 대구의 관중동원 능력은 언제나 리그 최하위권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구의 스쿼드를 살펴보면 그런 팀을 1부에 잔류시키는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멤버 수급은 최악이었으니 박종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기본적으로 일화 감독 당시에는 지시를 수행할만한 숨은 떡잎들이 있었지만 대구 시절은 그야말로 누가 봐도 노답 수준의 멤버였기에 전술만으로 이를 극복하라고 비난하기엔 무리가 있다.
강원 FC가 창단될 때 유력한 감독 후보로 올랐으나, 정작 선임된 사람은 최순호 전 현대미포조선 감독. 박종환 감독과 최순호 감독의 악연을 볼 때 좀 아이러니하다.

2.2.8. 성남 FC


대구 FC 감독 이후, 7년간 야인생활을 하고 있던 중, 2013년 12월 9일에 성남 일화 천마가 시민구단 성남 FC로 재창단을 하게 되면서 새 감독 후보 명단에 올랐고, 12월 11일 갑자기 '''박종환 감독 내정설'''이 터져나왔다. 성남시에서는 정해진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했는데... 2013년 12월 20일 성남 FC의 초대 사령탑으로 내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가, 또 같은 날 곧장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나오고, 결국 2013년 12월 21일 계약서에 사인만 앞두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일련의 소동을 본 축구팬들은 처음 내정설이 불거져나왔을 때부터 답정너였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박종환 감독 선임에 대한 여론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자 이재명 성남 시장이 언플을 하며 간을 봤다는 게 정설. 사실 정치적 인선이 아닐 수가 없는 게, 6월에 지방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박종환 감독이나 신문선 대표이사나 모두 유명인사이고, 이들을 영입한 것은 6월에 지방선거가 있는 이재명 시장의 정치적인 치적으로 선전되기 마련이다. 다만 이는 성남 FC 구단이나 이재명 시장만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구단이 마찬가지 사정이고, 외국도 딱히 다르지는 않다. 예산이 지자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사실 박종환 감독은 연고이전하기 이전 천안에 있던 일화 구단과는 인연이 있어도 연고이전 후의 성남 축구와는 큰 연관이 없기는 하지만, 전국구로 그리고 고령 세대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유명한 감독이기 때문에 기존 축구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홍보할 수 있는 효과를 노린 측면도 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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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13년 12월 23일 3년 계약을 체결하여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부임과 동시에 패기 넘치는 인터뷰를 했는데, 칠순이 넘은 나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의식했는지, K리그 감독 코치들이 너무 어리다라고 깠다. 그 어린 감독들이 거덜난 스쿼드를 가지고 아챔 우승을 하고, 박종환 본인도 못해본 리그+FA컵 더블을 기록했다는 건 안중에도 없으신 듯.
지난 시즌 성남 경기는 딱 한 경기 봤지만 지금 멤버들을 가지고 성적 못낼 이유는 없다고 큰소리쳤다. 게다가 성남 소속 선수들 이름도 잘 모른다고.(...)[29] 그러면서 선수들과 가교 노릇을 해줄 기존 코칭스태프를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런 근자감 때문에 언론들도 조금씩 우려하는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성남 서포터들과 일반 축구팬들의 반응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은 듯. 거기에 감독 선임 직후부터 개성과 자기주장이 강한 신문선 대표이사와의 충돌도 우려되었다. 박종환은 항상 구단 윗선과 문제를 일으켜온 전력이 있었고, 신문선은 박종환식의 강압적인 훈련에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박종환이 내정한 스카우터를 둘러싸고 신문선이 공채를 주장하여 한 번 마찰이 일어난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큰소리친지 며칠이나 됐다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성남 감독으로 오자마자 기존 선수들과 전임 코치진을 비난하는 등 특유의 독설을 내뱉고 있으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대구 FC 창단 감독을 맡았을 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데, 한다는 소리가 프로 선수들이 테스트생보다 못한다라거나, 자신의 전술을 소화하지 못한다거나, 기량이 엉망이라거나, 아예 공을 찰 줄 모른다는 둥 원색적인 비난 일색이다. 주목할 부분은 중앙 수비수 중에 쓸 만한 선수가 하나도 없다고 한 대목인데, 이 당시 성남 소속 중앙 수비수였던 임채민윤영선의 경우는 이 시즌부터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을 정도로 K리그 내에서는 탑 수준의 수비수로 인정받은 선수들이다. [30] 또한, 팀의 최고 연봉자이자 키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세르베르 제파로프를 개인 플레이를 한다면서 '''"선수도 아니다"''' 라고 디스하고,[31] "선수들이 정신상태가 썩었으니 공수부대에 입소해 훈련시켜야겠다." 라는 황당한 이야기도 내뱉었다. 이에 함께 선수단 전체에 매일 4km씩 강행군 구보를 시켰다고.. #
모기업의 자금사정 악화, 무개념 프런트, 타이밍 나쁜 감독 경질로 인해 성남 FC의 스쿼드가 몇년째 개발살난 건 성남 팬들은 물론 리그를 보는 축구팬들은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인데, 축구인, 그것도 팀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던 감독 주제에 이런 속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4월 17일, 성균관대와 가진 친선 경기에서 '''선수들을 폭행하여 물의를 빚었다.''' 폭행 피해자는 성남 소속의 김성준과 김남건으로 밝혀졌고, 네티즌들은 "박빠따 어디 안갔다", "그럴 줄 알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중. 본인은 꿀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 성남 FC의 공식 홈페이지가 박 감독의 진퇴 토론장으로 변했다. 현재 공홈은 박종환의 무개념빠들의 폭력을 옹호하는, 답 없는 글들[32]이 계속 올라오고 있으며, 이에 서포터즈 및 일반 팬의 반박문 및 성명서가 게재된 상태다. 그리고 부천에서 일어난 '꿀밤' 사건의 유진회 골키퍼 코치가 사퇴하고 다른 코치를 징계한 것, 최진한 감독에게 경고 조치를 내린 것과 대비되고 있다.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꿀밤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폭력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군대에서도 폭력 금지를 명기하고 있으며, 학교 체육에서조차 꿀밤이 허용되지 않는 시점에 꿀밤이든 아니든 폭력을 휘두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불거지자 일단 성남 FC 측은 임시로 이상윤 수석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고, 박종환 감독은 징계 결정 전까지 무기한 대기조치했으나... 4월 22일, 결국 '''자진 사퇴하였다.''' 보도에 의하면 신문선 이사가 해임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이 직접 선임한데다가, 성적도 중위권이기 때문에 아주 나쁘지 않다고 보고[33] 이를 쉽게 승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종환 감독이 사퇴하기 전까지 성남 FC가 기록한 성적은 9경기[34] 2승 3무 4패 '''3득점''' 4실점에 9위였으므로, '중위권' 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더더욱 이재명 시장의 발언이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이, 9라운드 기준 1위 포항 스틸러스는 19득점을 기록 중이다. 그리고 리그 최하위 인천이 2득점. '''공격축구''' '''재미있는 축구'''를 표방한 팀으로서는 참담한 기록이다. 더구나 전임 안익수 감독이 '''질식축구'''로 불릴 정도로 수비를 중시하는 성향이지만 작년 같은 라운드 대비 승점도 득점도 더 많았다, 이미 언론에서 예년에 비해 평균 득점이 떨어지는 초반 양상에 K리그의 수준을 거론하며 깠을 정도로 경기력이 형편없었다.
자신의 거취가 논란이 되자 박 감독은 자진 사퇴의 모양새로 구단 고위층의 부담을 줄여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해임이나 다름없다.[35] 정작 본인은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며 심지어 억울하면 고소하라는 패기를 뿜어냈다(...) 아무튼 선임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그것도 선수 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하차했기 때문에 80을 앞둔 나이도 나이인 만큼 사실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꿀밤이든 귀싸대기든 미워서 그랬겠나"며(...) 강변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참고로 박종환 감독에게 선수도 아니라는 모욕을 듣고 주전에서 밀려났던 세르베르 제파로프는 사퇴 소식을 듣고 트위터쾌재를 불렀다..가 바로 지웠다. 나중에 '''남이 잘 안된걸 기뻐하는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아무래도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을테니...
이후 이상윤 대행은 인터뷰를 통해 팀이 기존에 해 온 축구와 하려는 축구의 간격이 크다고 언급하면서 박종환의 스타일이 팀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2.2.9. 여주 FC


오랜 시간이 지나, 2018년 舊 K3리그팀으로 새롭게 창단된 여주세종축구단의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감독은 오주포라고 따로 명시가 되어 있기에, 도대체 총감독이 무슨 직책인지는 시즌이 개막해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팀은 이름을 여주시민축구단으로 변경하였고, 2020년부터 새로이 개편된 대한민국 4부 축구리그인 K4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박종환은 2020년부로 총감독직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 이주일과 춘천고 동창생으로 매우 친했다고 한다. 이주일이 무명 시절에 고생을 할 때, 박종환이 가끔씩 도와줬다고 한다. 이주일의 부인이 출산 후에 몸조리는커녕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할 때 박종환이 미역과 쌀을 사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항상 박종환을 고맙게 생각했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이후에는 박종환 감독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토크쇼에서도 여러번 언급하였다. 본인도 고인이 된 이주일을 언급하면서 "그 친구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다. 평소에는 눈물 한 방울 없는 강한 이미지이지만, 2002년 이주일의 장례식때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외국인 감독에게 매우 비판적인 말을 하는 걸로 유명했다. 1992~1994년에 한국에 부임한 러시아 출신 아나톨리 비쇼베츠[36] 국대 감독도 "동유럽은 축구 강국이 아니다"고 디스한 적이 있고 '비쇼베츠와 호텔 생활도 같이 해봤지만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라고 말한 사실도 있다. 비쇼베츠의 올림픽 대표팀에 대해서는 선수 구성은 좋은데 이해할 수 없는 전략으로 경기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도 디스. 여담이지만 비쇼베츠의 출신국인 소련은 붕괴 전만 해도 월드컵 8강권, 유럽 중상위권은 되는 나라였다. 그 이후 산하 공화국이 독립하고 선수 수급 시스템이 엉망이 되면서 러시아는 근 20여 년간 월드컵에 본선 등장도 힘든 나라가 되었다.[37] 어찌 되었든지 간에 1992년 시점에서 소련(러시아) 출신 지도자는 한국이 무시할 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베트남이나 태국 축구감독이 한국 축구를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모든 외국인 감독에게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축구 최초의 외국인 지도자로 거론되는 독일 출신의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에 대해서는 '2~3년 더 유소년 지도자를 시켰으면 좋은 성과를 냈을 것이다'며 칭찬을 했고, 구 유공의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니폼니시 축구를 배워야 한다고 하며 같은 소련 사람이지만 니폼니시와 비쇼베츠는 천지차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비쇼베츠는 당시 조직력을 중시하는 한국 축구에 장신화와 선수비 후역습, 롱볼을 위주로 하는 플레이를 도입해서 한국 축구인들과 전술에 대한 정서를 달리했고, 실제로 고집불통의 성격이라 자기만 알고 소통불가의 지도자라는 비판을 축구인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또 월드컵 전에 히딩크 감독을 비판한 건 박종환 감독만은 아니었다. 다만, 박종환 전 감독이 외국인 감독을 평가할 때 '인격', '호텔 생활을 해봤는데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봤을 때 한국 축구인으로서 외국인들이 고분고분 대접해주길 바라는 텃세가 그들의 평가에 반영된 면이 있다. 박종환이 칭찬했던 크라머와 니폼니시는 온화하고 신사다운 성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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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외로 요리 실력이 꽤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잘하는 음식이 김치찌개와 생선 매운탕이다.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감독으로 대회에 참가했던 당시, 아직 어린 선수들이 현지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직접 재료를 공수해서 요리를 해 먹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이 4강 진출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둔 데에는 이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음식 걱정 없이 잘 먹고 뛴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39] 또한 기러기 아빠로서 거의 10여 년간 홀아비 생활을 한 것도 요리를 하게 된 이유인 듯. 이 기사에 따르면 대표팀 숙소에 있던 멕시코 요리사들이 박씨를 대표팀 주방장으로 착각해 무시했다가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이후 국가대표팀, 프로팀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특별 이벤트로 선수들에게 김치찌개와 매운탕을 끓여준 적이 있다고 하며, 직접 먹어본 당사자들의 언급에 따르면 모두 그 맛이 매우 일품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레시피는 공개된적이 없지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끓일 때 계속 똑같은 온도로 끓이지 않고 불 조절을 해 가며 끓여주는 것이 핵심이라고.[40]
  • 김호 감독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감독으로 꼽힌다. 문제는 김호 감독과 달리 지도 방식이 좀 심하게 강압적이란 것이다. 김호 감독은 앙팡테리블 고종수를 품었던 사람이다. 반면 박종환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째 둘째를 다투는 천재 최순호를 품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다 구시대 축구인의 한계를 드러내며 축구인으로서의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보내고 있다.
  • 1996년 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전술적 구도에 대한 질문에, 황선홍, 김도훈을 전방에 두고 최용수를 양쪽을 돌게 만들겠다고 언급했다. 자신의 전술을 포메이션으로 설명하면 1-3-5-1 전술이라고 요약했는데, 후방에 별도로 한 명을 두는 이유로 유럽, 남미 선수들이 기술이 좋아 우리 선수 한 명은 쉽게 제끼기 때문에 바로 골키퍼와 1:1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종 수비수 한 명을 스위퍼로 두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오프사이드 트랩도 쓸 수 없고 세계적인 트렌드와는 전혀 동떨어진 안드로메다급 포메이션인데다가, 우리는 상대방보다 한수아래라고 접고 들어가는 전술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홍명보라는 걸출한 수비수가 있어 3백은 기본으로 박아 놓고 홍명보를 스위퍼로 활용하기 위해 구상한 전술이라는 의견도 있다.[41]
  • 중국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렸던 이장수 감독이 성남에서 코치를 하며 박종환 감독의 지도 스타일을 배웠기 때문에 이장수 감독도 빠따리라고 폄훼된다. 그래도 지도력이 준수한 편이기에 박종환 감독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호가 계속 5:0으로 참패하자, 선수들을 돌려서 기용하면서 계속 테스트하던 히딩크와는 정반대로, 미리 베스트 11을 뽑아놓고 집중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당시 모든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했다. 심지어 손석희가 진행하는 MBC 100분 토론에서 히딩크 감독을 주제로 다룬 적도 있다. 당시에 전화 연결한 허정무는 하루빨리 베스트 11을 정해서 스파르타식 훈련을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들면서 히딩크를 믿어야 한다고 엄호했던 게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차범근. 박종환은 심지어 히딩크를 자르고 자신을 감독으로 쓰면 최소 8강은 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보나마나 선수들을 윽박지르고 폭력을 행사했을 텐데 본인이 말한 대로 됐을지 의문이다. 그나마도 히딩크호가 2002년에 대박을 치면서 본전도 못 찾았다. 거기에 바로 밑 이주일에게도 영향을 주어, 우물 안 개구리 인증을 더 확고히 시켰다. 박지성같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해외에서 못 뛴 지도자들이 명백히 모른다는 것이 인증되었다.[42] 더욱이 히딩크가 국내 출간한 국대 감독 시절 회상을 다룬 책을 보면, 축구 강국이라는 말에 완전 심리적으로 패배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대목을 보면, 그 이전 국대 감독들은 이러한 점을 잘 알지도 못했으며, 설사 알았다 해도 무방비였다.
  • 성남 FC 감독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사재 1억을 털어 구단 주식 1만 주를 청약했다. # 하지만 공시내용을 털어보니, 본청약은 하지 않은 듯하다.
  • 박종환이 K리그에서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를 비주류에 대한 주류의 왕따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인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축협에서 비주류인 경희대 출신에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던 비주류인 박종환을 은근히 따돌렸다는 후문. 다만 조광래와 같이 본인이 자초한 면도 많다. 지난 스포츠 기사를 검색해보면 가장 쉽게 걸리는 뉴스가 박종환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다 징계를 먹었다는 것. 스스로 왕따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듯, "축구인 99%는 나를 싫어하지만, 팬들 99%는 나를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 전두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6년경이라고 한다. 서울시청 팀을 맡은 후, 태국에서 열리던 "킹스컵" 대회에 국제심판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고, 자신이 부재한 동안 선수들을 극기훈련을 시키기 위해 군부대 [43]를 찾았는데, 당시 김포 주둔의 모 공수여단의 여단장이었던 전두환 준장과 친분을 쌓게 되었던 듯하다. 5공 비리가 불거진 이후 전두환이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되자, 박종환은 매달 찾아갔다고 하며, 2010년대에 있었던 인터뷰에서도 매달 한 번은 연희동에 찾아간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 축구 못지않게 골프 실력이 매우 출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축구인 친목 골프 대회에서 자주 우승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 창단할 때부터 축구관이 물과 기름처럼 안 어울리던 성남 구단의 신문선 이사와 충돌이 우려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폭행 논란에서도 가장 강경하게 해임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문선이라고 한다. 박종환도 신문선 이사가 자신을 해임하기 위해 폭행 논란을 침소봉대했다고 주장. # 그러나 신문선은 해임 발표를 하면서, 박종환을 치켜주는 립서비스를 했다. #
  • 감스트 방송에 출연했던 이상윤김병지는 박종환의 빠따에 대해 질문한 감스트에게 그라운드에서만 기강을 잡고 그외에는 자유로웠으며 잔정이 많았다고 좋게 말해줬다. 물론 한국 체육계 특성상 나쁘게 말할리가 없긴 하지만 이 둘 말고도 박종환을 호평하는 선수들도 많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선수들에게 손수 밥을 해먹였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44] 이런저런 증언을 취합해보면 전형적인 옛날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때리고, 갈구고, 개처럼 굴리다가 슬쩍 "다 너 잘되라고 하는거다"는 식으로 달래면서 관리하는 옛날 군대 고참 스타일인 셈. 이런 스타일은 한국 최고의 선수들만 모이는 국가대표팀에선 90년대부터 어긋났고 프로팀에서도 2000년대 이후로 약발이 다했다. 또한 현대축구의 흐름이나 트레이닝 이론과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부임 초기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이기도 하지만, 안에선 서서히 금이 가다가 어느 순간 와장창 무너지는 게 박종환호의 패턴이었다.[45]
  • 나중에 국대 감독이 되는 홍명보가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인 박종환에게 언론에 보도될 만큼 노골적으로 반항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다. 특히 1996년의 박종환 퇴출의 빌미가 된 이란전에서도 수비의 핵인 홍명보가 후반에 걸어다녀서 태업 이야기가 나왔다. 박종환도 1995년의 코리아컵(위에 나온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이름을 바꾼 대회)의 준결승에서 패한 이후 홍명보가 주축이된 "열하나회"의 음주 사실을 폭로했다고 한다. #
  • KIA 타이거즈이종범이 축구하는 것을 관람한 후에, "한 1년 빡시게 굴리면 국가대표 승선도 가능하겠는데"라고 덕담을 남겼다. 여담으로 이종범은 야구 이전에 축구를 했었고, 축구를 그만둔 이후에도 전 야구인들 사이에서 축구실력으로는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46]

4. 관련 문서




[1] 호적상 1938년.[2] 동대문운동장을 쓰던 시절이다[3] 현역 감독시절 경기당일 쓸만한 수를 6가지 정도 강구해놓고 시합에 임했다고 한다.[4] 이는 운동부에서 흔한 일이다. 먼 훗날 박지성도 뽑아주는 학교가 없어서 당할 뻔했다. 축구도 그렇지만 야구쪽 에서는 더 흔하다.[5] 뽑혔으나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청소년 대표 엔트리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자체 연습경기에서 수비수였던 박종환 전 감독이 상대 공격수에 강한 태클을 들어갔다가 결국 그 두 선수가 부상을 당해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박종환 전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돈이 없어 밥도 못 먹고 청계천에서 호떡 두 개 사먹고 경기에 뛰었다고 하며, 체구도 크고 잘 먹고 자란 선수들에게 오기로는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 거친 플레이를 펼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 때 부터 근성하나는 보통이 아니신 듯...[6] 여담으로, 이 때 절친한 친구였던 전설적인 희극인 이주일도 같이 경희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섯다판에서 등록금을 날리는 바람에 입학을 못했다고 한다.[7]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19세였다. 20세로 상향된건 1991년부터이다.[8] 말하자면 지금 U-20 대표팀이 전북,포항 같은 팀과 경기해서 9-2로 이겼다는 이야기다. 박종환식 방독면 축구의 위력을 볼 수 있는 대목[9] 당시 경기 후 실점 1골당 운동장 열바퀴의 벌칙을 주었다고 한다. 방법이 좀 우악스러워 보이지만 일종의 80년대식 체력강화 파워프로그램의 일종[10] 본인은 서울시청에 의리를 지켜 프로팀에 안갔다고 말한 바 있긴 하다.[11] 다만 박종환 감독은 대구 FC 시절에 당시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이 부상자가 많아 선수가 없다는 아쉬움을 인터뷰로 토로한데 대해, "수원 스쿼드 나한테 주면 눈 감고도 우승한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12] 당시 연봉협상이 결렬된 안익수를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포항 스틸러스로 트레이드시켰다.[13] 이주일의 대머리가 전두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14] 심판이 대 놓고 사우디 편파 판정. 당시 피파 부회장이 쿠웨이트 왕자로 당시 중동 국가 이기는 것은 한국 홈에서 조차 1골 도둑 맞고, 1골 공짜로 주는 시절이다.[15] 당시 아시아 최종 예선은 두 조로 나누어 실시했으며, 본선 진출권은 세 팀에 주어졌다. 조 1위 두 팀은 본선 진출, 조 2위 두 팀이 맞붙어서 승자 한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 한국은 사우디에 패하면서 조 2위가 됐다.[16] 그밖에 김정남 감독은 아우에게 지는 형이 될 수 없다,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88팀의 10가지 작전을 붕괴시키고 승리하겠다'고 말했고, 박종환 감독은 '우리가 체력이 우세하다. 3년 동안 손발을 맞춰온 조직력으로 개인기를 압도할 수 있다'응수 했다[17]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생겼기 때문에 팍스컵이라고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1990년대는 코리아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99년 이후 폐지되죄었다. 한국팀이 두팀(대표팀, 올림픽팀) 출전하고 해외 대표팀이나 클럽팀을 초청하여 A,B조로 나뉘어 예선전을 벌인 후, 준결승-결승으로 열리는 경기였다. 2000년대 생겼다 폐지된 피스컵과 형식이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18] 사실 월드컵 진출이 어려웠던 1960~70년대 그리고 8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나라가 개최하는 대통령배와 동남아에서 열리는 킹스컵 그리고 메르데카컵이 거의 세계 3대 축구대회수준이었다. 어디까지나 국내 축구팬들에게는...차범근, 허정무, 조광래 이상 축구인들에게는 이 3대 대회에서 피터지게 싸웠다는 회고담을 쉽게 들을 수 있다.[19] 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결승에 못오른 건 이 대회가 생긴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대회는 한국팀에 유리한 극심한 편파판정으로 국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20] 박종환은 이 경기후에 "(소련, 체코, 유고와 같은)동유럽팀 별거 아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서 빈축을 샀다. 아래도 나오지만 이후에도 올림픽 우승 감독인 비쇼베츠를 "동유럽은 축구선진국이 아니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도 했다. [21] 이회택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전 전패로 사임한 이후 2개월간 감독을 맡았다[22] 이 때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같이 내한했다.[23] 사실 리피는 2016년까지 광저우 헝다에 있었는데, 헝다는 내국인 감독이 맡은 중국팀에게 패한 적이 있고, 최강희 감독도 전북 현대 감독으로 이긴 적이 있으므로 꼭 그런 건 아니다. 어쨌든 리피가 광저우를 맡기 전까지는 박종환이 유일한 승전을 거둔 것은 맞는 말인 듯... 다만 카펠로까지 포함해서 이겨본 감독으로는 유일한 아시아 감독이 맞다.[24] 알리 다에이는 2016년 가장 인상깊었던 경기로 이 경기를 꼽았다.기사 [25] 그러니 히딩크가 부임해서 대표팀 훈련을 시켜 본 뒤에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수준급 그러나 체력과 정신력이 떨어진다"식으로 평가했을 때, 다들 '저놈이 무슨 개소리하냐'식의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직접 피지컬 트레이너까지 불러와서 체력훈련을 시킨 다음에 월드컵 본선에서 90분 내내 대표팀이 거구의 유럽선수들과 몸싸움하면서 압박하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체력훈련, 과학적인 피지컬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다들 깨닫게 된다.[26] 우한 광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8년 해체됨 [27] 특이하게 유니폼 속에 검정색 팬티스타킹을 착용하고 경기를 하기도 했다.[28] 후보로 거론된 신태용과 안익수 감독은 연고 이전 이후의 성남 일화 구단에서도 뛰며 레전드이고 K리그 팬들에겐 인지도가 높긴 하지만 국가대표에서 주전으로 오래 뛰지 않아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인지도가 낮은 문제가 있다.[29] 하지만, 대구 FC 감독일때도 유일하게 아는 선수 이름이 오장은 밖에 없었다고 한다.[30] 특히 윤영선은 훗날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승선해서 카잔의 기적의 주역이 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는 선수였다.[31] 제파로프는 당시 10억이 넘는 고액 연봉을 받는 것에 비해서 그만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2014 시즌 팀 내 및 득점 1위(7득점), 도움 2위(3도움), 통합 공격포인트 1위(10개)를 기록하였고, FA컵 결승전에도 풀타임 활약 후 승부차기까지 성공하여 팀의 3번째 우승에 기여를 한 바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런 비난을 들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32] 심지어 인격모독성 글도 올라와, 엉덩이가 무겁던 홈페이지 관리자까지 경고하고 나섰다.[33] 다만 이재명 시장은 바로 선거(6월)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구설에 오를만한 일을 피하려고 했고, 장년층이 많은 박종환 팬들에게 괜히 어그로를 끌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 재정난 때문에 빙상팀을 해체했다가 빅토르 안 사건으로 근거 없는 흑색선전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국 재선되었다.[34] 징계 때문에 마지막 경기는 참석하지 못해서 온전히 팀을 지휘한 것은 8경기인 셈이다.[35]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논란이 일어난후의 "자진 사퇴"는 그냥 짤렸다고 보는 게 맞다. 구단 윗선에서 "너 경질 당하고 개망신 당할래? 아니면 자진 사퇴하고 체면치레라도 할래?"라는 선택지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36] 원래는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소련 대표선수(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출전 4위)와 감독(1988 서울 올림픽 우승)을 지냈다. 현재 국적은 소련 붕괴 후 러시아를 택해서 러시아다.[37] 1994년과 2002년에 겨우 나왔으나, 예선에서 탈락하여 16강 진출도 못했다.[38] 하지만 이런 성격이 만만하게 보여서인지, 오히려 크라머를 "카리스마가 없다",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까던 국내축구인들도 있었다. 특히 크라머가 선수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고 "개는 감독도 아니야"면서 대놓고 폄하하던 이회택이 대표적.[39] 80년대 초반이니 지금처럼 전담 영양사가 체계적인 식단을 관리하긴 어려웠을 시기이다. 이로부터 한참 뒤인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장비 담당이 따로 없어 신인 선수들이 훈련 전에 일찍 나와서 직접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훈련 장비들을 셋팅하는 일을 했다.[40] 물론 김치찌개가 만들기 그리 어려운 요리는 아니지만, 많은 인원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끓이려면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그래도 모두 맛있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손맛이 좋은 것은 사실인듯.[41] 마지막 '1'을 리베로로 활용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 리베로의 판단에 따라 본인이 수비 라인에 가담해 4백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드리블 돌파를 할 경우에는 리베로가 뒤로 쳐져 앞선 수비수의 백업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공격시에 리베로는 3백에 앞선 미드필드 자리에서 공격을 조율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역할을 경기 상황에 따라 지능적이고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베켄바워급 아니면 수비수로 전환한 요한 크루이프 같은 선수나 가능하며,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42] 다만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 시절에 J리그의 교토 퍼플상가로부터 이적 제의를 먼저 받았기 때문에 K리그 드래프트 신청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더욱이 수원 입단을 노리려고 했더라도 벤치에 앉았을 확률이 높았다. 자세한 것은 박지성 항목을 참고하자.[43] 이런 류의 발상은 현재도 없어지지 않았다. 사실 명장이라고 칭송받았던 김성근 전 감독도 이런 극기훈련 애호가였다. 특히 태평양과 쌍방울을 맡았을 때 직접 선수들을 군부대에서 굴리기도 했다.[44] 윤영선은 박종환이 해 주는 김치찌개가 맛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45] 이런 옛날 군대 고참 스타일로 가장 성공한게 바로 프로야구의 김성근 감독이다. 선수들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고 스포츠 과학을 무시한 트레이닝과 기용으로 선수들을 망가뜨렸지만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대단했고 선수들이 실력 떨어진 노장이 되었을때 챙겨주는 등 잔정을 내비쳤고 선수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기에 혹사당한 선수들이 다 잘되라고 한거라며 오히려 쉴드를 친다. 김응용의 예를드는 사람도 있는데 김응용은 구타 문제같은 시대의 한계는 있었지만 미국 유학 경험으로 구시대 지도자 중에서는 보기 드문 자유 방임주의 감독이었다. 훈련도 적게 시켰고 야구장에서 잘하면 사적으론 뭘하든 크게 신경 안썼다. 정말 중요하고 총애하는 선수들 아니면 선수들 이름도 못외울 정도였다.[46] 이종범이 축구선수였다면 한국축구와 한국야구 역사는 달라졌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