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귀복

 


'''태평천국의 역대 천왕'''
,초대,
홍수전
,제2대,
홍천귀복
[image]
'''묘호'''
없음
'''시호'''
없음
''''''
홍(洪)
''''''
천귀복(天貴福)
'''생몰 기간'''
1849년 11월 23일~ 1864년 11월 18일
'''재위 기간'''
1864년 6월 ~ 10월
1. 개요
2. 상세
3. 가계도
4. 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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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의 아들이자 태평천국의 2대, 마지막 천왕.

2. 상세


1864년 6월 홍수전이 죽자, 황문금(黃文金)에 의해 옹립하여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홍천귀복이 즉위했을 때 태평천국은 권력 다툼으로 인한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1864년 7월 수도인 천경(天京)이 청군에게 함락되어 홍천귀복은 숙부 홍인간(洪仁玕) 등 측근들과 함께 이리저리 도주하던 중, 10월 9일 강서성 석성(江西省 石城)에서 매복하고 있던 청군에게 기습을 당해 홍인간이 체포되었고[1], 홍천귀복은 요행히 빠져나와 산속에서 은신했으나, 끝내 10월 25일 청군 석보전(席寶田)에게 붙잡혔다. 홍천귀복은 의외로 바로 즉결처분되지는 않았지만, 성도 남창(南昌)으로 압송되어 11월 18일, 만 15세 생일을 닷새 앞두고 강서성 순무 심보정(沈葆楨)에 의해 능지처참당했다.[2] 반군의 수괴였던 만큼 비참하게도 아편이나 목숨을 먼저 끊는 등 능지처참 집행에서 이루어 질 법한 그 어떠한 자비도 전혀 베풀어지지 않은 채 정석적인 천번 가량의 칼질로 형이 집행되었으며 한나절동안 신음과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언은 뜬금없게도, "광동이란 지방은 좋은 곳이 아니라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호남에서 당 선생과 더불어 공부해 수재[3]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4]"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설령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이미 반란군의 수괴인 천왕 자리에까지 올랐던 홍천귀복에게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주어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홍천귀복은 생전 4명의 후비를 두었으며 결혼 직후에 남긴 사진도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 죽은 탓에 능력이나 성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이수성은 경험이 없고 예의도 없으며 무능한 인물이었다고 크게 악평했다. 홍수전이 홍천귀복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았다는 기록[5]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영향이 없지 않은 듯 하다.

3. 가계도



4. 매체에서


대체 역사 장편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태평천국이 실제역사보다는 좀 더 유지되었고, 보다 안정적으로 권력을 쥐었다. 대한제국 황제를 암살을 시도했고, 성공했다고 오판하여 대한제국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다.
허나 태평천국군은 질적 저하가 심한데다가 홍천귀복 스스로도 지휘관으로서 자질이 그닥이라, 대한제국군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 후 쓰촨성으로 도주하나 오히려 대한제국군보다 늦는 바람에 붙잡혀 참수당했다. 늦게 된 이유가 민가를 괴롭혀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에, 대한제국 황제가 '''이런 놈도 왕이었다'''며 혀를 찼다.

5. 둘러보기




[1] 11월 23일 남창에서 처형됨[2]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 초기 만주족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항복한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면 족족 처형했다. 태평천국의 난 내내 청군에 잡힌 태평천국군 포로들은 모두 학살되었으며, 이 때문에 태평천국군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3] 청나라 시대 과거시험 중 첫 관문인 동시에 급제한 사람.[4] 『廣東地方不好,我也不愿回去了,我衹愿跟唐老爺到湖南讀書,想進秀才。』[5] 천경의 궁궐 안에서 홍수전과 홍인간, 홍수전의 수많은 부인들, 그리고 동생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환경 속에서 전통적인 교육은 모두 배제되었고, 홍수전이 마개조 한 기독교 교육만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