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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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황족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현대 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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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건륭제 대에 일등시위 후르차 바투루(Hūrca Baturu) 장김보오(Janggimboo)를 묘사한 작자미상의 공신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얼굴의 명암에서 서양화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Manchu People
만주어: ᠮᠠᠨᡠ (발음: manju)
한자: 满族/滿族 (Mǎnzú)
인구: 중국 10,410,585명/대만 12,000명(2012년 기준)[1]
1. 개요
2. 명칭과 기원
3. 역사
3.1. 명-청 교체기의 모습
3.2. 청나라의 만주족
3.2.1. 만주족은 사실 청나라 말기에 형성됐다
3.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 이후
3.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4. 문화
5. 한국과의 관계
7. 유명한 만주족 인물
8. 관련 문서


1. 개요


만주와 과거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북방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 현재는 중국의 소수 민족이 그 후손이다. 한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갈족-여진족의 후신으로,[2]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만주라는 영토를 만주족이라는 특정 민족의 몫으로 두는 느낌이기 때문. 더불어 만주라는 말도 만주국 때문에 지금의 중국에선 잘 쓰지 않고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강한 동3성, 현재는 동북 3성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중국에서 한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2위 좡족보다는 인구가 약간 적지만, 중국 서남부에 집중된 좡족에 비해 중국 대륙 전역, 대만, 등 중화권 전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만주족이나 전신인 여진족을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민족들마냥 유목민족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진족과 만주족의 영역은 만주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던 수렵채집민이다. 물론 내몽골과 맞닿은 만주 서쪽에 사는 퉁구스계 민족들은 유목생활을 하기도 했다.

2. 명칭과 기원


만주의 파저강에서 유래하여 청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와 누르하치가 이끄는 세력을 각각 만주와 만주 구룬[3]이라고 불렀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청태종)가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개칭하면서 여진이라는 말을 완전히 금지시킨[조서] 후부터는 오직 만주라는 말만 쓰이게 된다.
명나라 시기 명나라의 이민족 구분 기준으로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크게 3종족으로 나뉘는데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建洲女眞), 후에 정복한 '해서'여진은 거의 모두 만주 팔기군에 편입이 되었지만 여진 부족 가운데서도 연해주와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野人女眞)은 단 두 부족 극히 일부만 만주 팔기군에 편입되었다. 청태종에게 조선이 항복할 때도 청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청나라와 만주인에 적대적이었던 야인여진 쪽의 우랑카이(瓦爾哈, 올량합, 오랑캐)와의 관계를 끊을 것이었을 정도였으니 명나라 때 당시의 동북 관외 지방의 지역별 원주민 구분 기준이지, 그 당시 동북 지방 원주민 사이에서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해서여진과 건주여진도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건주여진 위주로 통합된다.
따라서 15세기나 16세기 기준으로 '''현재의 만주-연해주 지역의 원주민들 = 만주족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4]

3. 역사


만주족을 칭한 16세기 이전의 역사는 말갈족, 여진족 문서 참조.

3.1. 명-청 교체기의 모습


엄밀히 말해서 만주족은 기마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만주를 떠나기 전에도 대부분 정착해서 살았으며 중국화되어 있었고 장사에 능했다.[5]

그러나 군대의 중심은 기마부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몽골식 군사 기술을 완성하여 중국의 행정체계가 자신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 세계전쟁사 / 존 키건

약 18세기 후반쯤에는 위구르, 티베트, 몽골, 연해주, 일리 강등을 정복하여 엄청난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여진 혹은 만주족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잦았던 약탈의 경우는 여진족 시기에나 하던 일이고, 만주-중국을 포괄하는 강력한 중앙 정권인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없어졌다. 자세한 역사는 청나라 참조. 이 시기의 시조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명-청 교체기에는 후금(청나라)를 세우고 조선 및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이런저런 행패를 부렸다. 조선에 대해서는 인조 즉위 후 조선의 친명정책에 반발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 조공 명목으로 조선에서 상당량의 인력과 물자를 약탈했다.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에는 한족을 학살하고(양주 대학살, 변발령 등) 문자의 옥 등의 사상 탄압도 벌였다.
청나라의 중국 대륙 정복 이후에는 준가르 제국과 대립하면서 오늘날 준가르 분지 지역의 준가르인들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명-청교체기 삼번의 난 시기까지 만주족이 탄압한 한족의 수는 못해도 8자리를 찍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천 5백만~3~4천만 정도가 흔히 제시되는 수치고, 좀 불리면 5천만은 넘겼을 거라는 설도 있다. 당시 명나라의 인구는 1억~2억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의 만주족이 저만한 숫자를 모두 죽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양주에서만 만주족에 의해 한족 80만여 명이 학살당하거나 변발을 거부한다고 한족들을 다량으로 죽인 건 사실이지만(양주 십일), 전근대 냉병기로 인한 학살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고 통계의 폭이 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정확하게 만주족이 어느 정도로 한족을 탄압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양주만 봐도 당시 정말 도시 인구가 80만인가부터가 의문[6]이고 난징 대학살 당시 40일 동안 30만 명이 죽었는데 냉병기로 10일 안에 80만 명을 죽일 수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그리고 양주십일기 등의 판본이 근대 이후에 나와서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에 이용되었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만주족의 중국 대륙 통치에 그만큼 한족의 저항이 컸고 만주족이 이를 잔학하게 탄압했다는 점만은 사실이다.

3.2. 청나라의 만주족


청나라의 만주족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한족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Qing_dynasty 공자의 후손처럼 대단한 명문 가문이라는 특이 케이스거나 한족 귀족[7][8]들 같은 경우에만 팔기 내 만주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 물론 만주족 남성들이 한족 여성을 취하는 것에는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청나라 팔기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만주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조선함경도평안도 지방의 사람들이나 중국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 아예 조선으로 건너가서 눌러앉기도 했으나, 이들은 본토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이주한 하층민으로 조선에 가서도 여전히 주로 사당패 같은 일을 하는 하층민이 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두만강 쪽 '야인' 여진은 대부분이 만주족에 편입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 근현대까지 남은 여진족은 재가승이란 별칭으로 소수집단으로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9] 현재 이들은 북한 체제 하에서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팔기군이냐 아니냐로 한족과 만주족의 구별은 이어졌고 대체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피지배민족으로 여겼다. 특히 청나라는 망할 때까지 변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각대학사, 6부상서, 군기대신 등 정부요직은 팔기[10]만 임명하다 만한병용제로 각 관직마다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직책이라 해도 팔기가 한족보다 품계와 봉급이 높게 책정되었고, 나중에 동일한 품계로 조정된 뒤에도 만주족이 우대받는 건 여전했다. 한족들은 반란의 우려가 있다하여 문반직만 허용했으며,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무반직은 태평천국의 난 때에 가서야 허용되었다. 내명부를 관할하는 황후는 팔기에서만 선발했으며[11],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위의 경우를 제외하면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지방행정에선 하급 행정구단위인 현을 관할하는 지현은 한족 지역유지들에게 맡겼으나 최상급 행정단위인 성을 관할하는 총독, 순무도 팔기군이 독점했다. 물론 청나라 황제들은 팔기에 소속돼지 않은 한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만한일체라는 말을 했다. 다만 이런 프로파간다가 하나의 중국을 주창하는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았는지,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국 사극에서는 툭하면 극중 황제를 통해 "만주족과 한족은 짐의 백성"이라는 말과 ()일체란 말이 튀어나온다.[12][13]
청나라 후반기까지 북경에서는 기인 주거지와 한족 주거지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그곳에서는 한인 풍속에 물들지 않으려 팔기군 소속 만주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영생활을 했고[14], 혼인도 마찬가지로 '''만주인 여자는 한족에게 시집 갈 수 없었다.'''[15] 게다가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며 거부하거나 하지않을 경우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태평천국의 격문에 보면 "만주족이 한족 여성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성수탈을 했다"는 문구가 주를 이를 정도이다. 애초에 만주인이 완전히 한족과 동화되었으면 백련교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 리가 있나. 실제로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을 따르던 한족들은 변발을 끊었으며[16] 요충지마다 건설된 성에 거주하던 주방팔기(駐防八旗)' 소속 만주족은 태평천국의 난 시절 성이 함락될 때마다 예외 없이 한족에게 분풀이로 몰살당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던 증국번도 한족이라서 만주족을 싫어한 한족 인민들의 분위기로 인해 태평천국을 조져버리자는 격문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를 위해 싸울 것을 빼버렸다.
청나라를 세운 후 만주족은 점점 중국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후 현실적으로 한인 문인들을 지배층에 끌어들인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나라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융합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만주어를 까먹고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다.

3.2.1. 만주족은 사실 청나라 말기에 형성됐다


위의 서술에 따르면 만주족은 처음부터 있었고 그들의 문화도 처음부터 있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종족이 아니라 국가가 규정한 계급과도 같은 것으로 그 안에서도 각각의 서열이 규정되어 있었다. 국가가 규정한 만주인들 중 일부가 종족(Ethnic Group)을 형성한 것은 기인들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이자 반만주주의(Anti-Manchuism)가 팽배하던 19세기 태평천국전쟁 시기 전후이다.
동족 의식이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통일 영웅'''으로 불리우는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한게 아니라 여진 계통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독립 세력들을 '''정복'''해 나간 것에 가깝다. 또한 동족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이 상호간에 존재했던 의식인지도 알 수 없다. 이후 청의 지배층은 조선인과 바요트와 우루트 등의 내칼카 몽골인 그리고 오론촌인, 나나이인, 어웡키인, 다우르인 등을 팔기만주에 귀속시켰으며, 팽창에 따라 루스 차르국카자크인과 야르칸드의 위구르인 그리고 티베트인 등도 팔기만주에 편입했다.
팔기만주 가운데 만주족을 형성하지 못한 기인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신장, 광둥 성, 베이징시, 허베이 성, 산둥 성에 거주하는 어웡키인, 신장 타청시에 거주하는 다우르인, 신장 일리 카자흐 자치주 찹찰 시버 자치현에 거주하는 시버인, 허베이 성과 랴오닝 성 등지의 박씨 조선족[17] 등이다. 이 중에서 시버족은 여진 계통의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주족을 형성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핵심적으로 만주족은 '팔기만주'만이 아닌 팔기한군[18], 팔기몽고 그리고 각 기의 보오이(Booi) 등의 후손들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다양한 집단들의 복합체였다. 국가가 수많은 집단들의 문화를 하나로 규정하고 하나의 역사를 정립하면서 문화적 균질화를 시도하였고, 균질화된 이들이 청 말기에는 타자에 의해 계급이 아니라 종족으로 간주되면서 자신들도 종족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만주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인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규정한 만주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만주족이라는 종족이 기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한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주인이 종족적 특질인 만주어를 까먹었다는 이유만으로 한족에 동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3.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 이후


태평천국의 난신해혁명이 반청복명, 반만흥한적 성격이 다분하여, 혁명파 및 한족들이 만주족을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9]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주족축출운동까지 전개되며 반만주주의 폭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옛 팔기군 군영터에 2명의 만주족 노파가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아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남성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인이 겁에 질려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우'라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들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난다.
이는 청나라 건국 과정에서의 약탈과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만주족에 대한 분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건 맞지만, 청나라 건국 과정에서의 약탈과 학살도 청나라 말기 만주족의 무능함으로 만주족이 한족들에게 실망의 대상이 됨에 따라 재조명된 것에 가깝다. 원래 중국은 왕조 교체나 정권교체기에 항상 지배계급에 대한 학살이 있어 왔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무너뜨려서 북쪽으로 내보낸 후 포로가 된 몽골족과 색목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고[20], 청나라도 건국하면서 양주대학살 등 수없는 반청세력을 학살했듯이, 딱히 중화민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에 대한 인민재판과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고, 이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알 수 있다.
웬만해서는 한족이 반란을 일으켜도 과거 금나라원나라가 패망 후 원래 살던 고향 땅 북방으로 돌아간 경우처럼 만주족도 일부는 동화되어도 민족과 영토 자체는 남아있을 수도 있었는데, 청나라 말기의 경우는 특수했다. 실제로 한족과 만주족 등의 구분은 청나라 말기부터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만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고 타이밍도 좀 안습했다. 만주족은 기본적으로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해서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은 철저히 했고 언젠가 돌아갈지도 모를 만주를 보험 삼아 봉금 지역으로 지정해 한족의 유입을 막아뒀지만, 하필 청나라 말기는 예상치 못한 외세의 등장으로 이게 어려워졌다. 역사를 살펴보면 만주 북쪽에는 위협적인 세력이 없는 게 정상인데 이 시기에는 북방에서 러시아갑툭튀해 버렸다. 이 바람에 이때부턴 유목 제국의 패턴대로 만주로 돌아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든가, 부족 상태로 존재하거나, 만주족 전통을 계승해서 한족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러일전쟁 직전까지 만주 땅의 주요 지점은 대부분 러시아 제국에게 하나 하나 빼앗겨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중이었고,[21] 러시아가 패배한 뒤 청나라도 망하고 군벌시대가 열리자 힘의 공백기를 타고 만주의 왕처럼 군림하게 된 장쭤린봉천군벌이 지배하다가 다시 일본 제국이 야금야금 만주로 올라간다.
더구나 만주족은 중국 정복 후 성공[22]에 취해서 점차 정체 혹은 쇠퇴[23]하고 있었고 신식 무기의 등장과 함께 기병과 유목민족이 가지던 힘이 약화되었다. 무기의 변화로 불리함에 놓인 것은 확실히 농경민족보다는 기마민족이다. 기병은 소수 인구로 다수를 정복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수단에 활이 주무기였기 때문에, 말타고 싸우는 법만 안다면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여지가 있었지만 신식 무기 앞에 소수정예 기마궁술은 유물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만주족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시대가 변하면서 한족 지배층들이 개혁을 하기 시작해서 유목민족들과 힘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몽골의 군사력만 해도 청나라 전반기에는 상당히 강력했으나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복드 칸국안휘군벌 쉬수정외몽골 출병으로 자치가 취소되고 중화민국에 복속되어 1920년 안직전쟁으로 안휘군벌이 몰락하고 담딘 수흐바타르,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의 독립운동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개입한 개판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독립할 정도였다.[24] 후의 국공내전에서도 이제 소수민족들은 한족 세력이나 외부 세력의 지원이 없으면 그냥 잉여가 되었다. 냉병기로는 기관총과 야포, 전차, 항공기에 도저히 맞설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국가적인 난관을 겪으면서 쓸만한 인재가 부족하고 근대화가 시급해지자 정책 변화가 있었는데 한족 견제정책을 거의 폐기하고 한족들에게 관직을 마구 퍼주게 된 것. 특히 태평천국의 진압 때, 한족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팔기군이 건륭제 말기에 막장화된 이후, 청나라의 군권 및 실질적인 권력은 이런 한족 의병을 지휘했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의 손에 넘어간다.[25] 그러니 한족들의 폭풍 출세를 경계한 북방 지역 지도자들은 황실에 항의하고 한족들은 나라를 망쳤다고 반발하고...여기에 러시아를 막아보기 위해 한족들에게 만주를 개방해 만주를 한족 천지로 만들었다. 청나라가 봉금령을 풀어버리자 한족들이, 특히 당시 아편전쟁으로 인한 해안 방어 정책으로 청이 해안에만 투자를 하자 산동 서부, 하남 등이 가난해졌고 이 지역의 한족들이 우르르 만주에 몰려갔다. 한족들이 만주로 몰리자 만주인들과 한족의 숫자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졌고, 수로 우위에 서게 된 한족들은 결국 만주족들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증국번은 "그 백면 유생의 호령 한마디에 무수한 사람이 일제히 호응하여 무한을 함락했습니다.[26] 따라서 장래에 그가 꼭 나라의 복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족 측근들은 그를 부추겨 만주족 왕조를 멸하고 다시 한족 제국을 세우려 하기도 하였다. 또 서태후와 광서제의 대결에서 광서제의 통수를 친 원세개는 청나라가 충분히 무력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멍청한 서태후는 한족의 힘을 빌려 권력을 독점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광서제는 훗날 큰어머니인 서태후를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독살당하고 만다.
결국 광서제 사후 한족들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해가는 사이에 내부 갈등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수준까지 와버린 청나라는 결국 신해혁명을 맞아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한족국가였고, 결국 만주족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개중에는 몽골인과 만주인이 합심한 만몽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신해혁명 이전부터 청나라의 망조를 감지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계획한 것이다. 이걸 지원한 일본인들은 1차 봉기가 실패하고 2차 봉기를 계획하던 중 자신들에게 이득이 없을 것 같자 그들을 가차없이 내팽겨쳤다. 그렇게 만몽독립운동은 무산되고 나중에야 그것을 빌미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는 만주를 먹어치우고 괴뢰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있었기에 요직은 전부 일본인과 친일 한족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만주족들은 일본한테 이용만 당했고, 일제 특유의 막장 통치로 인해 만주인들이 만주국을 적대하게 되기까지 한다. 게다가 몽강국과 러시아처럼 만주국은 유목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니 정체성이 더 더욱 약화될 수밖에(...) 결국 이는 일제 패망 이전부터 만주족들이 스스로 만주국을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당시 일본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로 진비후이(카와시마 요시코)가 있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만주사변의 핵심 배후였다.
청나라를 멸망시킨 중화민국의 국가 정당인 중국 국민당은 한족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만주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고 그들을 일관되게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그래서 국공내전에 참여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중국 공산당이 한족 민족주의가 아닌 평등을 구호로 내세운 탓도 있을 듯. 일부 만주족 중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결탁했던 일파도 있었는데, 이들은 국공내전 때 중국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 섬으로 이주하였으며 오늘날 중화민국 내 만주족의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다. 그 이전에 이주한 만주족들은 거의 다 한족과 동화되었다.

3.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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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만주족의 분포도. 2010년 기준으로 지급시요녕성 단둥(31.6%), 번시(28.4%), 후루다오(25.5%), 진저우(24.9%), 푸순(24.3%), 그리고 하북성 청더(承德; 38.2%) 시에서 만주족 비율이 20%를 넘긴다.
공산당은 소수민족 보호를 약속했기 때문에, 국민당이 통치할 때와 달리 탄압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청조 몰락 이후에 만주족은 정체성을 숨기고 민족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중화민국 시기부터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있었고 20세기 만주국 시절에도 만주국에서는 만주어가 아니라 한어(표준중국어)[27]가 쓰이고 있었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만 하더라도 만주어를 전혀 모르고, 중국어만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 만주족의 문화는 거의 자취가 없어질 정도로 사라졌다. 현재는 한족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현재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좡족(약 1,600만~2,000만 명)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이다.[28] 약 1,068만 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2000년도 통계). 성(省)급 행정구역인 만주족 자치구는 없으나, 자치현은 11개(하북성 4, 요녕성 6, 길림성 1), 자치향(鄕)도 요녕성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 있다. 유독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이다. 애신각라 신라 떡밥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정말 만주족이 저 정도 규모로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많은 한족들이 세제혜택이나 두 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 민족으로 등록하곤 한다. 또한 청 말기부터 학살을 당하기도 했고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거의 한족이나 마찬가지인 회족과 함께 청대에 고유 문화로 규정된 언어가 거의 소멸된 채 표준어만을 사용하는 민족이라 한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다. 물론 반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내무부 소속 보오이[29]거나 팔기한군[30]에 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 게 가능하다.[31] 입관(1644년)당시 기준으로 팔기군 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32]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은 금나라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통념상의 여진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임에도 그러하다(...).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든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 있다(가령 헤이룽장성 싼자쯔 마을(三家子村)). 그나마 귀족이 아닌 하층민일 경우에는 결국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고,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그 나름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쪽에 주둔군으로 파병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코르친 몽골에 종속되어 있던 여진족의 한 갈래다.[33]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 허나 안준을 비롯한 시버족 언어학자들은 만주어와의 방언적 관계를 부정한다.
B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비중이 40%를 넘는다. 중앙아시아와 몽골 등의 다른 유목 민족에게서도 B형이 많이 나타난다.
청나라 때 고위직을 점유해서 그런지, 중국의 만족 중에는 학계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인 한족보다도 교육 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소수 민족이 받는 우대 조치와 인구를 고려하면 객관적인 조건에서 어느 민족이나 한족 평균보다 높게 올라가기 쉬운 편이다. 2003년 자료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만주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은 유명한 저출산 지역이다. 이곳은 만주족 뿐만 아니라 한족도 인구가 감소했다.

4. 문화


역사적 편견 때문인지 문명이고 뭐고 없는 야만족같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34][35]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36]
또한 청나라 후기를 거쳐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만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그들이 쓰던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중국어 방언인 북경 방언[37]과 동북 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만주족 때문에 관화의 m음과 입성음을 비롯한 받침음이 사라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최근에 부정되고 있다.[38]
다만 발음면에서는 아니어도 차용어면에서는 동북지역을 비롯한 토착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남긴것은 맞다. 예를들어 심양 방언은 화자 상당수가 산동반도에서 건너온 한족과 한족화된 만주족 혈통이 섞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만주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단어가 많아 보통화와 어법이나 단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청나라 시대 만주어로 쓰여진 각종 문헌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전문가 수의 부족으로 아직 다 해독이 되지 않고 있다.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과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 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 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본관을 떠올리면 쉽다.[39]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40]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41]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신라와는 관련이 없다.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이 할라와 무쿤이라는 씨족 단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할라 단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무쿤이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조직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할라 간의 잦은 통혼으로 인한 할라 단위 구분의 무의미함, 잦은 인구 이동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해체 및 무쿤 조직의 독립성 강화 등이 꼽히지만, 무엇보다 명, 조선, 몽골, 야인 여진[42] 등 외부 세력과의 대립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붕괴와[43] 이로 인해 좀 더 유기적이고 위기 대응에 용이한 무쿤 조직이 살아남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다만 이는 해서 및 건주 여진에 한정된 부분이고, 야인 여진의 경우 할라와 무쿤의 원형을 대부분 보존하고 있었다.
다만 만주 수렵민족 시절의 씨족 사회가 영향을 주어서 만주족이 성씨나 풀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중원에 입관하면서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게 생겨났는데,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 글자 성씨처럼 쓰는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이름인 '오보이'의 첫글자를 따서 '오 대인'으로 불린 게 대표적이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만주족 대다수가 성씨를 한족식으로 바꾸었다. 대체로 만주식 성씨의 뜻이나 발음에서 따와 한족식 성씨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조상이 만주족에 귀화한 한족인 경우 후손 대에 조상의 한족식 성씨가 다시 쓰였으며, 만주족 아버지와 한족 첩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경우 어머니의 한족식 성씨를 쓰기도 했다. 만주족화된 조선인[44]의 후손들은 조상의 조선식 성씨를 썼다.
한족이 를 식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
언어에 관해서는 만주어 문서 참조. 청 왕조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그 당시 국어라고 하는 건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흔히 대중매체에서 전족을 제외하면 중국 전통이라 알려진 것들도 본디 만주족의 풍습이다. 차이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치파오가 만주족의 복식에서 유래했고, 그 외에도 강시영화의 강시복장, 변발, 속칭 'UFO모자'라 불리는 청 관모, 그리고 '''물만두'''가 바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요리의 경우는 만주 요리를 참조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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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특한 헤어스타일인 만주식 변발을 선호했는데 이는 몽골인들이나 튀르크인들이 선호하던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는 장발식 변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머리를 거의 다 밀어버린후 한 갈래의 머리카락만 땋는 대머리식 변발이 유행하였는데, 당대로선 매우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전자를 알타이식 변발, 후자를 퉁구스식 변발이라고 한다. 알타이식 변발은 몽골군의 이미지를 퉁구스식 변발은 황비홍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될 듯.
반면 동북 쪽의 야인 여진은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 밀도 또한 낮은 관계로 나머지 두 부족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그 야인 여진의 분파가 사할린, 홋카이도에도 소수 거주하는 윌타족이다.
전통 악기는 주즈하프, 몽골의 텁쇼르와 비슷한 주워르거, 만주식 산시엔인 텅어리, 궁호(弓胡), 팔각고, 몽골의 이킬과 비슷한 쿠머시가 있다.
중국의 졘즈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만주 전통상 흰색 나무껍질로 만들었으나 한족의 문화가 주류가 되다 보니 한족이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만들게 되었다.
만주족을 상징하는 비공식 문장, 두번째 버전. 팔기군의 색을 기반으로 만든 듯하다. 비공식적으로 쓰이는 깃발도 있다.

5. 한국과의 관계


한국-만주 관계에서 소수민족과의 관계 참조.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만주족은 가장 흡사하고, 과거에는 부여, 고구려와 발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이기까지 했지만 현재는 문화적으로도 국가 가치관적으로도 꽤 다르다.

6. 동북공정


중국에서는 중화민족이라는 일종의 민족의 상위개념을 만들어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모조리 중화민족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장백산 문화론. 백두산에 가보면 이 산은 중화민족의 하나인 만주족의 영산이므로 우리 산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문을 볼 수 있는데, 이 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부근의 공무원은 만주족의 복장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사실 누가 봐도 명백한 역사 왜곡이지만, 한국을 겨냥한 대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대내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즉 한족의 영역에 포함된지 얼마 안되는 만주를 중국 고유의 것으로 확정하고 분리 독립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7. 유명한 만주족 인물


현대 중국에서는 학계와 예술계 쪽에 만주족들이 많다. 원래는 만주지역에 살던 변방 민족이였지만, 청나라 때 입관한 이후 귀족 신분으로 살아서, 고급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45] 집안의 전통이 되어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금수저로서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기 때문.
  • 청나라 역대 황제들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서태후[46] 등등 황족들은 모두 만주족이다.
  • 카와시마 요시코 - 본명 아이신기오로 셴위. 청나라의 황족이었으나 일본인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커서는 청 왕조 부흥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여 스파이 노릇을 하였고 이때의 행적 때문에 동양의 전설적인 스파이 중 하나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이적행위로 처형당했다.[47]
  • 아이신기오로 울히춘(愛新覺羅·烏拉熙春) - 여성 학자. 건륭제의 후손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만주어 전문가로 매우 유명하다. 이 외에도 여진어, 거란어 등을 전공하였다. 후에 중국사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 요시모토 미치마사(吉本道雅)와 결혼하여 성이 요시모토가 되면서 이름을 요시모토 치에코(吉本智慧子)로 바꾸었다. 울히춘(Ulhicun)은 만주어로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일본식 이름에 지혜를 뜻하는 치에(智慧)를 포함시켜서 지은 것은 원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현재(2010)는 리츠메이칸 대학 아시아태평양학부의 교수이다.
  • 존 푸(1934 ~ 2010) - 중국명 푸루런(傅履仁),[48] 미군 육군 소장.
  • 라오서(老舍, 1899 ~ 1966) - 유명 작가.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하지 못하고 홍위병들에게 버클이 달린 허리띠로 구타당하고 모욕감에 자살.
  • 아이신기오로 치싱(爱新觉罗启星, 1983 ~) - 배우.#[49] 할아버지가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사촌이라고 한다.
  • 관지림(1962 ~) - 홍콩 여배우. 정확히는 만주족 아버지와 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며 만주족 중에서도 꽤나 명문가라고 한다.
  • 관샤오퉁(1997 ~) - 만주족이라서 그런지 북방계 미인형이다.
  • 우징(오경, 1974 ~) - 영화배우.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액션스타였으나, 2017년 전랑 2로 대박을 내기 시작해서, 2019년에만 출연한 영화들(등반자, 나와 나의 조국, 유랑지구)이 합계 2조 5천억원의 매출을 벌어들였다.
  • 랑핑(1960 ~) 톈진시출신의 중국 여자 배구 선수.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올림픽 금메달을 딴 유일한 인물이다.
만주족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퉁구스 계통으로는 슈퍼주니어의 전 멤버 한경이 있다. 한경은 말갈족 계통의 나나이족 출신이다. 나나이족과 만주족은 같은 남퉁구스계 민족이다.
관련 영어 신문 기사
만주족 씨족 리스트

8. 관련 문서



[1] 대만의 만주족은 대부분 외성인과 동화되었다.[2] 엄밀히 말해서 말갈, 여진족과 만주족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이 살던 요동 지역은 한반도와 달리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었고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편입과 이탈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여진족 상당수는 만주족으로 이어졌지만 일부는 다른 갈래로 나뉘었다. 사실 역사를 거치며 계속 외부혈통이 유입되는건 한족이나 한민족도 마찬가지지만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 등 지형 장벽이 없는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져, 고인골을 조사해 보면 인종 자체가 지금과 다른 경우가 많다.[3] 만주는 문수보살에서 유래했고, 구룬(gurun)은 국을 뜻한다.[조서] 是日,汗曰:我国原有之名为满洲 、 哈达 、乌拉、 叶赫 、辉发其无知之人称之为诸申。夫諸申乃席北超墨爾根之親誼,與我們何干。此後所有等稱我國原有之名滿洲,若稱諸申,罪之。《만문원당》天聰九年十月庚寅諭曰「我國原有滿洲、哈達、烏喇、葉赫、輝發等名.  向者無知之人,往往稱爲諸申。   夫諸申之號乃席北超墨爾根之裔,實與我國無涉。   我國建號滿洲,統緖綿遠,相傳奕世。   自今以後,一切人等,止稱我國滿洲原名,不得仍前妄稱。」《청실록》[4] 우데게족, 나나이족, 어룬춘족, 어원키족 등으로 나누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퉁구스계에 속할 뿐, 만주족이라는 민족으로는 볼 수는 없는 셈.[5] 이 점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금나라의 여진족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금나라의 여진족은 문화적으로 청나라의 만주족보다는 오히려 만주족과 대립하던 야인여진과 더 비슷했다. 또한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적지 않은 일부 거란인들과 같이 살면서 여진족들은 부분적으로 거란족화되었고, 반면 여진족과 같이 살던 거란족들은 혼혈되면서 여진족에 동화되어 흡수되었고, 금나라와 동하가 멸망하고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몽골족과도 혼혈되어 몽골의 영향도 받았다. 거란과 몽골 등 몽골계 민족들의 문화도 들어오면서 섞이게 되어 어느 정도 몽골화되는 등 문화적으로 거란과 몽골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6] 인구 100만이라는 칭호가 붙은 도시들도 실제로는 60만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7] 한군 팔기 혹은 워이갸씨(건륭제의 후궁이자 가경제의 생모인 효의순황후), 퉁갸씨(순치제의 후궁이자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등 일부 "갸"자가 붙은 성씨들은 원래 한족이지만 만주족으로 편입된 사람들이다.[8]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nchu_clans[9] 1936년 1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녀자가 지나가는 군인에게 젖을 주는 등, 일제 시대 조선인들 기준으로는 음란한 성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0] 몽골족, 팔기에 편입된 한족 포함.[11] 물론 청나라 초반엔 효장태후 같은 몽골인도 있었는데, 이는 칭기스칸의 핏줄인 황금씨족에 한정되었다[12] 청나라의 만한전석을 재현하는 행사에서도 이러한 말이 나온다.[13] 그 외에도 민족갈등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도 있다. 중국은 대학입시에서 소수민족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등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으로 인해, 적지 않은 한족들은 역차별 받는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 상황에서 전족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때 만주족이 한족들을 학살하고 차별하는 걸 역사 그대로 보여주기 어려운 점도 있다. 중국의 검열 문서 참고 바람.[14] 말이 병영이지, 성 내에 성을 하나 더 지은 것이다. 한인은 출입할 수 없게 했다. 노비나 유모만 빼고. 특히 한족 남자는 해지기 전에 모두 내쫓았다고 한다.[15] 특히 청나라 황실은 망할 때까지 공주를 한족에게 시집 보낸 적이 거의 없다. 예외는 있는데, 누르하치의 손녀와 결혼한 이영방과 같은 케이스나 강희제의 여동생 건녕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간 예가 있다. 평서왕 오삼계 일족과 다른 항복한 명나라 출신 군사집단들은 일반 한족으로 대우하지 않고 팔기군에 포함된 한군기인(漢軍旗人)이며, 일반 한족과 다른 취급이었다. 거기다가 건녕공주는 김용의 소설과 달리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이름 없고 신분이 낮은 한인 출신 후궁의 딸이다. 순수 만주족이 아니라는 의미.[16]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했을 때는 변발부터 끊었다.[17] 이들은 대륙에서 희소한 박씨였기에 정체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18] 한군기인 대부분은 1742년에 건륭제가 이들을 한족으로 선언한 이래 출기(出旗) 정책을 시행됨으로써 광주의 주방과 북경 내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기되었다.[19] 사실 이는 만주족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났을 때도 같은 사태가 벌어져 수많은 여진족과 몽골족이 중앙의 방관 아래 그들에게 악감정이 단단히 쌓였던 한족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20] 아이들은 죄가 없다고 처형 대신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되었다. 정화가 바로 그런 인물.[21] 하얼빈이나 다롄 같은 도시에 러시아풍의 고건축이 많이 남아 관광지가 된 것도 이 시기 사실상 러시아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 시베리아 횡단철도 계획도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그냥 만주를 자기 나라 땅처럼 관통해 지나가는 루트였는데, 러시아가 청나라를 사실상 호구로 보고 만주는 러시아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22] 백련교도의 난 때 만주팔기의 상태가 심히 막장이었는데, 만주인 총독 늑보(勒保)는 만주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다. "만주족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 사실상 그나마 이와 같은 상태로 만주족이 중국 대륙에서 오래 버틴 것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낸 강희제, 옹정제 같은 황제들 덕분일 것이다.[23] 청나라는 키메라 제국이라는 말도 들을 만큼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만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상당히 잘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막장화가 가속화되어 한족들이 수적 질적 우위로 차지하고 다른 민족들에게서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 것 때문에 그 체제가 붕괴된 면이 있다.[24] 사실 유목민들 중에서도 머리가 좀 깨어있던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을 가거나 했다.[25] 그러나 증국번, 이홍장은 과거시험을 통과한 고급 관료 출신이다.(좌종당은 증국번이 초야에서 발탁한 인재이다.) 증국번은 청나라 조정 내에서 후한의 군권을 틀어쥔 조조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계속 받았으나, 본인 스스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성리학의 대의에 충실하려 했음인지 이를 물리쳤다.[26] 이것은 태평천국의 난 시점의 일로 당시 청나라의 기존 군사세력이었던 팔기군과 녹영은 무능 하고 부패하기 그지없어 외침과 반란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이에 청 황제는 지방곳곳에 교지를 내려 민병을 창설하여 대적(對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증국번은 조정의 한족 관리(2품)였는데 모친상으로 상을 치르러 고향에 있던중 황제의 교지를 받고 의병을 조직했다. 그가 만든 의병 '상군'은 특유의 시스템과 무수한 전공으로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고 그 밖에도 조직된 다른 의병은 많았으나 그의 상군만이 끝까지 태평천국과 대적하여 난을 진압시킨 주역이 되었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정규군 노릇을 했다고 한다.[27] 만주국에서는 이 표준중국어를 "만주어"라고 했다.[28] 인구 수로 만주족 바로 뒤를 잇는 소수민족은 후이족(회족)이다.[29] 흔히 한역 음차로 '포의노'(包衣奴)로 알려져 노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비는 아니다. 음차할 때 당시 한인들도 생소한 개념이라 노비를 뜻하는 이름으로 음차했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정복당한 한인이 대부분이라고 알려진 기존 통설도 틀렸고 만주인이 오히려 숫적으로 다수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 정복 이전 만주 사회에서 생산 계층을 담당한 이들로 평민에 해당한다. 다른 팔기군이 기적에 포함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군인 호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보오이를 소유하는 건 만주 귀족만 허용된다. 내무부 소속 보오이는 황제 휘하 상삼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팔기군 하오기 산하 만주 귀족 보오이로 속한다. 청조에서 이들은 어쨌든 기인은 기인이라 팔기 외의 민인들보다는 조금 나은 위치에 있었으나 입관 이전부터 청조와 운명을 함께해온 명문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 일종의 컴플렉스가 존재했고, 출세하여 황족에까지 연결되는 연줄을 확보한 경우 상삼기 신분으로 대기되기도 했다. [30] 팔기군 내에서 한족 출신.[31] -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32] 나머지는 보오이를 제외하면 팔기몽고 20~22%, 나머지 35~40% 팔기한군.[33] 일각에서는 선비/실위-시버 간의 음운학적 연속성이라는 가설과 Y DNA를 근거로 실위선비의 후예로 보기도 한다.[34] 만주족의 '만주'라는 단어가 문수보살의 만주어 발음(만주시리mañjuśri)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35] 여진족이었을 때는 화엄종 등 다른 대승불교를 믿었으나 "만주족"이라고 개명한 이후 몽골(내몽골, 외몽골 모두 포함)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도 받아들였다. 청더 시에는 만주족이 세운 티베트 불교 사원들이 남아있다. 다만 근현대에 만주족이 한족에 거의 동화되면서 한족들이 많이 믿는 정토교선종으로 개종하는 만주족이 생겨나기도 했다.[36]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시기 때만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문자를 만들고 나름의 문명 부족으로 주변의 몽골족들을 야만부족으로 멸시를 했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거란과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를 높이려고 하기도 했다.[37] 북경 방언과 북경 표준어(보통화)는 약간 다르다.[38] 대개 원나라 시기 몽골인의 영향으로 보는 듯하다.[39]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40]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41]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42] 여진 사회에서 야인 여진은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외부 야만족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만주 통합 이후에도 야인 여진은 만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했다. 사실 해서와 건주도 서로 같은 민족으로 여긴 경우는 거의 없지만...[43] 여진족은 외부의 공격을 받을 시 복수라는 명분에 의해 오히려 더욱 똘똘 뭉치고 강해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조선 및 명의 토벌대는 여진족을 공격할 때 아예 싸그리 멸족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했다.[44]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대표적이다.[45] 원래 청나라 초기 만주족 남성의 직업은 전원 팔기군에 소속된 군인이었으나 이렇게 만주족들이 싸움보다 공부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 팔기군은 약체로 전락하고, 반란진압은 한족의 의병에 의존하게 된다.[46] 원래는 부찰씨로 아버지가 팔기군 양황기 소속의 귀족이었다.[47] 하지만 그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는 음모론이 있다.[48] 참고로 그의 집안이 원래 사용했던 성은 푸차(ᡶᡠᠴᠠ, Fuca)였지만, 신해혁명 후에 성을 푸(傅)로 바꾸었다.[49] Ariel Aisin-Gioro라는 영어 이름도 사용한다. 중국 밖에서 활동한 이력은 딱히 없지만...[50] 과거 캐릭터가 만주족 의상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