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역사

 


화순군의 역사간략표
1. 삼한시대 ~ 통일신라시대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5. 대한민국
6. 기타


1. 삼한시대 ~ 통일신라시대


화순군은 삼한시대 마한의 판도아래 54국중의 여래비리국과 벽비리국이 있었다. 여래비리는 화순 능주 지역의 부족사회를 형성하였고 벽비리는 동복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천덕리 고분은 6세기 전후로 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백제 때 화순, 능주, 동복의 세개 현(縣)이 독자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는데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능주방면)(혹은 죽수부리군, 인부리군), 냇가변에 자리잡은 잉리아현(仍利阿縣:화순방면),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는 두부지현(豆夫只縣:동복방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신라에 와서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 및 두 자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은 능성군(陵城郡)으로, 잉리아현은 여미현(汝湄縣)으로, 두부지현은 동복현으로 변경되면서 곡성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2. 고려시대


940년에 이르러 능성현은 한자를 바꾸어 능성현(綾城縣)으로 하고, 여미현은 오늘날의 지명인 화순현(和順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동복현(同福縣)을 곡성에서 보성군 소속으로 변경하였다. 1143년에 처음으로 중앙에서 능성현에 감무(監務:현재의 군수)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으며 이어 충열왕 때인 1280년경 동복오씨 조영(祖英) 혹은 조염(祖琰)국사의 고향이라 하여 동복에도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고 고려말 1390년에 화순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남평현을 겸임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중앙행정이 직접적으로 이곳까지 미치게 되었다.감무관이 파견되기 이전에 이곳은 모두 자치고을로서 토호들에 의한 간접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복현이 있었던 자치고을로는 보령현(保寧縣:현 이서면지역), 대곡현(大谷縣:현 남면지역), 수촌현(水村縣:현 북면 수리부근), 압곡현(鴨谷縣:현 북면 옥리부근)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 이 군의 이름인 화순이 고려시대에 생기게 된다.

3. 조선시대


화순, 능성, 동복 이 세 현이 불과 몇 년만에 폐치분합을 거듭하게 된다. 처음 1396년에는 화순현을 없애고 능성현과 동복감무(화순현 겸임)만을 두었다가 1405년에 능성현, 화순감무(동복겸임), 1407년에 능성현, 복순현(福順縣.동복과 화순 합함), 1413년에 능성현, 화순현(동복겸임), 1416년에는 순성현(順城縣.화순과 능성 합함), 동복현으로 하였다가 다시 1418년에 이르러 세 지역의 통합이 불가하여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으로 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화순현의 백성들은 스스로 폐현을 자청 능성현에 합하였고 1611년에 이르러서야 화순현이 복현되기도 하였다.[1] 능성현은 1632년 인조대에 능주목으로 승격하였으며, 화순현과 동복현은 현으로 남았다. 이로서 화순지역에는 능주목, 화순현, 동복현의 세 고을로 이어져 왔는데 1655년 동복현의 객사와 전패[2]가 화재로 불에 타자 잠시 화순현에 합하였다가 다시 1664년 세 현으로 있었고 이 체제는 대한제국시대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 5월 1일 행정구역개편, 이른바 23부제에 의해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이 되었고, 1908년[3] 화순군이 능주군에 합병되어 능주군, 동복군의 2개 군으로 줄어들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능주군과 동복군을 통합하고 군청을 화순에 둠으로서 화순군이란 명칭이 부활하였다.
1932년에는 13개 면으로 조정하여 오늘날의 읍면체제를 갖추었다.

5. 대한민국


1963년 1월 1일 군청이 있는 화순면을 읍으로 승격시켰다. 1966년 5월 18일 영외, 묵곡, 용강출장소를 각각 설치하였다.[4] 이후 자잘한 구역 통폐합을 거쳐 현재 1읍 12면 1출장소 342행정리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2019년부터 북면, 남면, 이서면, 동면에 대한 면 명칭 변경이 진행되었고, 이후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 이중 북면과 남면의 명칭이 변경되는 걸로 결정되었으며 동면과 이서면은 개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0년 1월 1일부터 남면이 사평면으로, 북면이 백아면으로 개칭됐다. 그런데 명칭 변경을 하는 이유 중에 '일제 잔재 청산'이 있었으나, 명칭 변경 전까지 쓰였던 면명 자체는 일제가 작명한 게 맞지만 사실 일제가 면을 새로 짜기 전 조선시대에도 해당 지역의 면명에 다 동서남북이 들어갔다(...).

6. 기타


조광조의 유배지이자,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이 최후를 맞은 곳이다(이 때 몇 년을 살았는지가 영월군과의 논쟁거리. 화순군 측은 6년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때는 문홍헌과 최경회가 "전라우의군"을 일으켰다.
인구는 1966년 15만 998명으로 정점을 맞고 감소세이며, 2003년 초에 잠시 79,496명으로 증가 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2014년 11월 현재 인구 66,794명으로, 이 중 화순읍이 40,949명이다.[5] 1960년대~1990년대에 벌어진 경부ㆍ경인라인 중심으로 하는 경제 개발로 인해서, 화순군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각 시/군들이 인구 유출을 당할 때, 화순군 또한 인구가 크게 줄었들었고, 광주의 위성도시로 되면서 인구가 그나마 회복 중이다.


[1] 이 복현을 기념하여 당시 객관앞에 심은 것이 바로 화순군청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2]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대궐 전(殿)을 큼지막하게 새겨 전패라 불렀다. 관리들은 망궐례(望闕禮)라 하여 이 패에 절하는 의식을 매월 초하루와 보름, 설 추석이나 동지 같은 명절, 임금이나 중전의 생일 등 특별한 날에 행하였다.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했는데,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3] 이때 창평군과 옥과군도 통합되며(1914년에 다시 갈라선다), 낙안군은 2개로 잘려서 보성과 순천에 각각 편입되고 만다.[4] 현재는 한천영외출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출장소들은 폐지되었다.[5] 참고로 화순읍 인구가 이웃한 나주시의 시내(구 나주읍+영산포읍, 기존 시내와는 떨어져 개발된 광주전남혁신도시 지역인 빛가람동은 제외) 인구보다 더 많으나, 도심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나주의 읍면 지역+빛가람동, 화순의 면 지역)의 인구를 비교했을 때 나주시가 더 많기 때문에 시군 전체로 비교하면 나주의 인구가 더 많다. 화순읍이 광주의 위성도시화 된 것이 화순군으로서는 천만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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