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1. 소개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삿갓
홍서범의 <김삿갓> 중에서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자는 성심(性深)[1] . 호는 김립(金笠), 난고(蘭皐)이다.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807년(순조 7년)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22일) ~ 1863년(철종 13년[2] ) 음력 3월 29일. 어쩌면 김조순과 강화도령 철종보다도 유명한 '''세도정치기 최고 네임드'''.[3] 한 가지 특이한 건 안동 김씨, 그중에서도 성골인 노론 장동 김씨 일가였다.[4]
2. 생애
2.1. 유년 시절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 바로 말해 김삿갓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할아버지였던 무신 김익순(1764 ~ 1812)에게 있다. 그가 고작 5~6살이던 1811년 신미년부터 다음해 임신년 봄까지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당시 선천 부사 5품 관료인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했으며, 김삿갓의 삶은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복잡하다.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항복한 죄가 있으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 만큼 동정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원래 조정에서도 사형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온 것은 오히려 포상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5]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후략)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기사
문제는 김익순이 살기 위해 항복한 것이나 홍경래가 내린 벼슬을 받은 건 강요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전략)“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실록》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기사||
본인이 그나마 사실대로 말하고 선처를 구했으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걸 김창시의 수급을 돈 주고 산 뒤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여서 허위보고를 해서 처벌을 모면하려 하는 엄청난 짓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항복한 것 때문에 처벌 받을 것이 두려운 건 이해가 가는데, 조문형이 수령 김창시의 목을 잘라온 것을 '''돈을 주고 사서'''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였으니, 그야말로 기군망상(欺君罔上)[7] 의 막장테크다.[8]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작정하고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사약)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벌을 받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공노비 제도가 폐지된 이후라 가문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하겠지만 16세 이상 남성들은 사형당하거나 아예 신분 자체가 격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문이 가문인데다 강요로 반란에 가담한 점. 그리고 김창시의 수급으로 사기를 친 게 적극적으로 뭔가 얻으려는 게 아니라 처벌을 면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점 때문에 동정의 소지가 남아 있다고 봐서 본인만 참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양반 신분을 박탈하고 지방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끝냈다.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6]
《순조실록》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기사||
할아버지의 죄는 그 대로 끝났지만,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은 수치심에 의해 고작 39살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홀어머니(함평 이씨) 아래서 자란 김삿갓은 몰락했어도 양반집 자제였고, 그것도 그 유명한 안동 김씨, 그 가운데도 성골급인 장동 김씨 계통이다. 가문발 덕분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조부 김익순이 처형되는 걸로 끝나고 일가의 몰살은 면한 것이다. 덕분에 머리만큼은 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2.2. 왜 삿갓을 '썼을까'?
야사에 따르면 그가 성장하여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8권에도 소개되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김익순의 잘못을 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9] 급제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문제에 나온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할 정도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전국구 역적인데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얼씨구나하고 자기 할아버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답안지를 적어냈다는 것.
멘붕한 김병연은 무려 4년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혼인했는데, 아내 장수 황씨 황철주(黃哲周)의 딸[10] 이 절세미녀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다만 다른 기록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뭐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와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11]
근데, 저 김삿갓이 보았다는 그 과거가 정말로 "과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작문을 좋아하는 사또가 연 글짓기 대회였다는 전승도 있고, 친구들끼리 시짓기 도박을 해서 돈을 딴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 돈푼이나 따려고 조상을 욕했던 게 된 것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다만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다른 설로는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양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 양반들이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삿갓이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라 생각하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12]
군수 정시[13] 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탄김익순죄통우천 논정가산충절사)''''였다.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일생동안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그가 늘그막까지라도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렸다면 철종 시절 안동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볼때 (물론 죄다 설이라 확실한건 알 수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결국 김병연은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다.[14]
2.3. 왜 '삿갓'을 썼을까?
첫 번째 설론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했다가, 어느 날부터 자신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본명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이었다는 것이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15]
다음은 위와 관련해서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 (편역본 출처: 양동식의 '길 위의 시'.)
'''나와 삿갓'''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2.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 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이끌어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어 부르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는 위트와 뼈대가 있는 언어유희가 넘쳐난다.
- 마음 쓰는 폭이 좁은 친구의 파자를 풀어서 파자로 반박을 한 일화.
>안주인이 "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리까?"하고 묻자 (다른 버전으로는 人良且八(인량차팔)이 있다.)
>그 친구가 "月月山山(월월산산)하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丁口竹夭(정구죽요)로구나 이 亞心土白(아심토백)아."[17]
>하고 가 버렸다.
人良 卜一 = 食(밥 식) + 上(윗 상) = 밥을 올리다 아니면 食(밥 식) + 具 (갖출 구) = 밥을 내놓다
月月 山山 = 朋(벗 붕) + 出(날 출) = 친구가 나가다
丁口 竹夭(혹은 天) = 可(옳을 가)[18] + 笑(웃을 소) = 가소롭다. 즉, 우습다.
亞心 土白 = 惡(나쁠 악) + 者(놈 자) = 나쁜 놈
犬者 (이미 개새끼란 의미지만..) 禾重 = 猪(돼지 저) + 種(씨 종) = 돼지 새끼
따라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된다.
>안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하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가소롭구나 이 나쁜 자식(혹은 돼지 새끼)아."
>하고 가 버렸다.
- 사멱난관(혹은 사멱난운)
>彼覓有難況此覓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一夜宿寢懸於覓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
>山村訓長但知覓 산촌의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 다음은 금강산에 가서 저녁에 한 사찰에 들렀을 때 절에 있던 선비와 스님이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김삿갓을 우습게 대하다가, 김삿갓의 말솜씨에 눌려 그 선비가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싯구로써 우위를 가리기 를 청했다가 망신을 당한 일화다.
>김삿갓: 좋습니다. 운을 띄워 보시오.
>선비: 타!
>김삿갓: 언문 풍월이오?
>선비: 당연하지.
>김삿갓: 그거야 간단합니다.
>(속으로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선비: 그럼 해 보시오.
>김삿갓: 사면 기둥 붉게 타![20][21]
>선비: 또 타!
>김삿갓: 석양 행객 시장타![22]
>선비: 또 타!
>김삿갓: 네 절 인심 고약타
- 어느 서당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밥을 얻어먹고자 근처에서 놀던 애한테 허락을 구하러 보냈는데, 훈장은 얼굴도 안 들이밀고 그 애를 시켜서 야박하게 문전박대하니 분기탱천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
>내 일찍이 서당인 줄은 알았지만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10명도 못되고
>선생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 그리고 방랑중 돈이 떨어진 김삿갓은 임시로 글을 가르쳐 돈을 벌려 했는데,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乃早知瑟琴 내조지슬금: 일찍이도 거문고를 탈 줄 알고
>速速拍高低 속속박고저: 박자와 고저 장단을 빨리도 알아서
>勿難譜知音 물난보지음: 어려운 악보와 음을 깨우첬구나
- 비처녀논쟁도 했다.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라고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네.
- 김삿갓의 "연유삼장(嚥乳三章)"을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소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則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위를 삼키고, 며느리가 그 아래를 삼키니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
>2장 二章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則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둘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하나를 삼키니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
>3장 三章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則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단것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신 것을 삼키니
>단것과 신것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 유명하지는 않지만, 함경도에서 어떤 부자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술 좀 달라고 했다가 되려 푸대접을 하니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서 부자들을 화나게 하기도 했다.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黃昏蚊簷至 황혼문첨지.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
>해 뜨자 원숭이가 마당에 나타나고
>고양이가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저녁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이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어느 절에 갔더니, 절에 있던 승려와 선비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만 보고 하대를 하고 푸대접을 하는 등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 이에 지필묵을 갖다 달라고 하고 시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儒頭尖尖坐狗腎 유두첨첨좌구신
>聲令銅令零銅鼎 성령동령영동정
>目若黑椒落白粥 목약흑초락백죽
>
>중의 둥근 머리는 땀이 찬 말의 X알이며
>뾰족뾰족한 선비 머리통 상투는 앉은 개 X지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솥에 굴리듯 요란하고,
>눈깔은 검은 후추알이 흰죽에 떨어진 듯 흉하구나.
- 경기도 개성에 가서 어느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주인이 '집에 불을 피울 장작이 없다'는 핑계로 문을 닫으며 쫒아냈다. 그러자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조롱했다.
-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도 썼다.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하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민함경도.
>趙冀永家兆豈永 조기영가조기영.
>
>선화당에서 화적같은 정치를 행하고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이 가문이 어찌 오래 가리오?
- 걸식 도중 쉰밥을 얻어먹고 분노하여 이런 시도 지었다.
>四十村中五十食 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기유칠십사
>不如家歸三十食 불여가귀삼십식
>
>스무(스물) 나무 아래에 서러운(서른) 나그네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쉰) 밥이네
>사람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선, 설익은)[31]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 또한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2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그른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 회갑축시
> 疑是天上降神仙(의시천상강신선)
> 膝下七子皆盜賊(슬하칠자개도적)
>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
>
> 저기 앉은 늙은이는 사람이 아니니
>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 같구나
> 슬하 일곱 아들 모두 도둑놈이니
> 천도복숭아를 훔쳐다 잔치를 빛내는구나
- 시가 아닌 말장난 중에도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머슴이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김삿갓이 잡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하니 "사람이 죽어 부고를 쓰러 간다"고 했다. 김삿갓이 "내가 글을 알고 있으니 써주겠다"고 했는데, 쓴 것은 유유화화(柳柳花花)[33] . 글을 모르는 머슴은 "고맙다"고 하고 그것을 받아갔다. 그런데 국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버들버들꽃꽃', 그러니깐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해졌다. 즉, 생판 모르는 남의 죽음을 희화화한 것이 된다.
2.5. 방랑생활의 종지부
그는 말년에 접어들어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고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지인 집의 사랑방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숨지는 것으로 방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도 뭔가 가련한 느낌을 준다.
뒤에 ''''어머니가 보고 싶소''''라고 했다고 한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은 아들 김익균이 직접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던 셈. 김삿갓의 묘지는 고향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안 초시,[35]
춥구려. 이제 잠을 자야겠으니 불을 꺼주시오…"
그래도 사후에는 워낙 유명해져서 임금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삿갓의 손자인 김영진이란 사람[36] 이 절에서 스님[37] 으로 있었는데, 절에 다니던 궁녀를 통해 그걸 알게 된 임금이 일부러 궁으로 불러서 김익순의 죄를 사면해주고 환속을 시켜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후 김영진은 망국 후에 양조장을 차려 큰 부자가 되었으나 자신이 번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다가 정작 본인이 가난해졌다고 한다.[38] 사실인즉 가문의 힘으로 복권된 게 아닌가 한다. 이미 고종 즉위 이후라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이미 쫑난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가문의 힘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유야 어떻건 두령의 목을 잘라왔으니 가문의 힘을 쓰면 복권이 가능하긴 했다. 또 당시에는 거지들이 김삿갓 흉내를 내면서 구걸하는 일과 그의 흉내를 내며 삿갓을 팔았던 삿갓팔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삿갓, 윤삿갓 하는 별의별 짝퉁들이 어설픈 흉내를 내고자 시도 썼으나 역시 짝퉁들이라 실력은 영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로 문중에 김삿갓이 남긴 시와 글이 있었지만 6·25를 거치는 중 훼손되어 폐기크리. 당시 국군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비웠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돌아왔을 무렵에는 김삿갓의 유물에 곰팡이가 피어서 썩어버렸다고 한다. 동복면에는 마을부흥 차원에서 김삿갓이 돌아갈때 머물던 집이나 기념비, 관련 공원 등이 존재하나 역시 남은 유물이 거의 없어 볼 것이 별로 없다.
3. 평가
왠지 은거기인이나 도사틱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은 일생을 주유한 방랑자였다. 비슷한 인물로는 해학으로는 정지윤(=정수동)과 정만서, 실존 인물이 아닌 이로는 봉이 김선달, 시대가 겹치는 인물로는 고산자 김정호가 있다. 다만 실제 김정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것. 문학계에서는 김삿갓이 문학적,예술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남기었다기보다는 재치있는 작품들을 남겼다고 평해진다.
3.1. 문학과 대중매체에서
성황당,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1911~1991)이 소설 김삿갓을 쓴 바 있는데,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39]
그 밖에도 1980년대 후반, KBS에서 만든 교통안전 홍보 애니메이션(안전운전 365일)에서도 김삿갓이 나오기도 했다.
이 애니에서 김삿갓을 노인들이 "여보시오. 삿갓 양반."이라고 불렀다. MBC 드라마 <상도>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오기도 한다.
작가 이문열은 그의 일생을 <시인>으로 소설화시켰다. 이문열 최고의(혹은 마지막) 걸작으로, 작가의 주변 문단이나 문학적 생애를 집대성했다.
스핀오프 작으로 <도둑과 시인>이라는 작품도 있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작중 초기 김삿갓은 언어유희의 달인이다. 다만 실지로 김삿갓의 작품사에서 이런 언어유희는 극히 일부다. 그래서 다만 작가는 이런 시풍을 써낸 시기를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시절'로 간주한다. 이 작품에선 김삿갓이 방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김삿갓이 조부인 김익순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시험장에서 문제가 출제되자 갈등 끝에 자포자기 격으로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쓴 뒤 방랑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맹꽁이 서당에서 김삿갓을 한번 다룬적이 있던 윤승운 화백이 만화광장에 김삿갓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성인대상 작품으로 의외로 수작이다. 단행본은 연재 때문에 못다한 김삿갓의 후손들 이야기도 넣었는데, 손자는 일제 연간에 합방 은사금 수령도 거부한다. 불과 150~200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김삿갓의 증손자가 197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압권은 소주병이 가득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의 묘 앞에서의 대사 "저는 만화를 그리는 윤가입니다" '''"옹야, 만화 잘 그리그라."'''. 이 만화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도 김삿갓 무덤을 둘러보고 연구하던 사람도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어린이 버전으로도 상당히 두껍고, 거기에 김삿갓의 시를 다룬 해설까지 있어 대단히 괜찮은 책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웬만한 김삿갓의 야사나 시는 다 안다 싶을 수준의 수작.[40]
KBS 제1라디오와 사회교육방송에서 1964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했던 반공 라디오드라마 김삿갓 방랑기의 주인공 이름도 김삿갓이다. 해당 캐릭터는 성우 오정한(현재 이민), 김현직, 구민, 탁원제, 김정호 등이 이 배역을 거쳐가기도 했다.
멜랑꼴리를 그리는 작가 비타민이 뜬금없이 그에 관한 일화를 종종 올리는 걸 볼 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주인공 이영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한다. 헌데 이름은 김병연인데 거의 이름으론 불리지 않는다. 후에 이자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이 역사와는 좀 다르게 그려지지만 쨌든 참 아련하기 짝이 없다.
2016년 KBS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일단 본명으로 등장하지만 웹소설과는 달리 처음부터 엄청 큰 삿갓을 쓰고 다닌다. 별명은 삿갓을 쓸 때 제일 멋있어서 갓병연.
다음 웹툰에서 제피가루가 영월군 브랜드 웹툰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을 그렸다.
3.2. 노래
김삿갓(노래) 문서 참조.
4. 여담
이름의 특성 때문인지 국어나 문학 시간에 김삿갓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일부러 "김'''삿갓이'''" 이런 식으로 노려서 강조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만약 낄낄댄다면...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이 있는데 2009년부터 하동면에서 변경된 것이다. 오지라 피서 목적의 펜션 등이 많은데 어째선지 상호에 김삿갓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점포가 많다. 영월에는 자매품(?)으로 '한반도면'과 '무릉도원면' 있는데, 김삿갓면과 같은 공식 행정구역명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는 도로명주소로 '김삿갓로'가 있으며[41] 앞서 언급했듯이 화순 동복은 김삿갓이 숨을 거둔 장소다.
1996년에 보해양조에서 이 인물을 모델로 한 소주를 출시했으며 '''소주 위의 소주'''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프리미엄 소주'를 표방하며 감미료로 '''꿀'''을 집어넣고, 기존의 투명한 소주병이 아닌, 새카만 색의 전용 소주병을 사용했다. 당시 소비자 가격은 무려 1,400원.[42] (출시기사). 의외로 인기를 끌자 진로의 '참나무통맑은소주', 두산경월(현 롯데칠성음료)의 '청산리벽계수' 등이 발매되면서 프리미엄 소주 시장을 이끌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철퇴를 맞은 뒤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근데 그래봤자 희석식 소주. OTL. 지금은 김삿갓 소주 광고가 있는 오래된 간판을 간간히 볼 수 있다.
삿갓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삿갓 캐릭은 죄다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모치즈키 소카쿠, 라이덴, 대전차병(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등등등.
대전지방법원에서는 판결문에 김삿갓의 난고평생을 인용하여 판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