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시호'''
'''경덕왕(景德王)'''
'''관등'''
파진찬(波珍飡)
'''성씨'''
김(金)
''''''
헌영(憲英)
'''왕후'''
사량부인(沙梁夫人) 김씨,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
'''왕태자'''
김건운(金乾運)
'''부왕'''
성덕왕
'''모후'''
소덕왕후(炤德王后) 김씨
'''묘지'''
모지사 서잠(毛祇寺 西岑)
'''생몰년도'''
음력
(추정년도 - 722년 ~ 724년)[1] ~ 765년 6월[2] (42세 ~ 44세)
'''재위기간'''
음력
742년 ~ 765년 6월 (23년)
1. 개요
2. 생애
3. 전국 지명, 관직명 한화 정책
4. 귀족들의 압박과 녹읍의 부활
5. 경덕왕 대의 사회와 문화
6. 후계자
6.1. 아들 혹은 사기꾼?
7.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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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35대 임금. 그동안 명군으로 알려져 왔으나 연구가 진행된 현대에 들어서는 평가가 갈리기도 하는 왕이다. 경덕왕의 주요 정책 중 하나가 한화 정책과 녹읍 부활이었는데 각각 왕권 강화(한화 정책)와 귀족 세력 강화(녹읍 부활)라는 모순된 방향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2. 생애


제33대 성덕왕삼남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제34대인 효성왕의 동복 동생으로 원래대로라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적었지만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고 왕위에 올랐다. 왕비로 사량부인(沙梁夫人)[3]과 만월부인(滿月夫人)[4]이 있다.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소원해졌다가 성덕왕 대에 다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정립한 이후 경덕왕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류가 크게 늘었으며 제도, 지명, 관직 등을 당나라 식으로 개편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펼치는 동시에[5] 산업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신라 중대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때부터 신라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원인은 전제 왕권 구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가 전성기였다는 것은 "742년 10월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친일본파와 친당파와의 오랜 싸움에서 친당파가 승리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고 500여 척의 배를 동원하는 등의 준비를 했지만 최종 책임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죽고 흐지부지되었다. 일본이 침공을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발해가 동의하지 않아서였는데 발해는 대충 일본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신라 침공 계획에는 차일피일 미루는 식으로 회피해버렸던 것. 자세한 것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 참조.
재위 24년째인 765년 6월 승하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릉 문서 참조.

3. 전국 지명, 관직명 한화 정책


경덕왕 시대에 펼쳐진 한화 정책은 말 그대로 중국화 정책이다. 757년 전국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 식으로 바꾸어 한자화했는데 한국사 최초의 지리덕후가 경덕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읍면 단위까지 전국에 경덕왕이 건드리지 않은 지명이 드물 정도로 대대적으로 바꾸었다.[6] 759년 중앙 관직명도 한자화하는데 집사부 중시를 시중, 국학을 태학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많이 바뀌었다.
경덕왕이 한화하기 이전 고유 지명은 한자 표기에 의미가 좋지 않은 한자를 사용하는 지명이 많았다. 예를 들면 주검 시()자가 들어가는 고시산군(古尸山郡, 충청북도 옥천군)이나 우시산(于尸山, 울산광역시), 저족현(猪足, 강원도 인제군, 족발이란 뜻이다.)처럼 한자 뜻으로 읽을 때 이상하거나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처음에야 음차하는데 바빠서 발음만 맞으면 대충 갖다붙였지만 이후 중국에 맞먹는 한문 능력을 갖춘 지식인이 늘고 이두향찰도 보급되어 사회 전반에 한자가 널리 퍼진 신라 중대에 이르면 놔두기 껄끄러운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 때 모든 지명을 뜬금없이 완전히 다른 중국식 지명으로 바꿔버린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원래 고유어 지명의 음과 한자의 뜻, 어감까지 고려해서 바꾸었다. 예를 들어 경덕왕이 바꾸고 지금까지 사용하는 전라남도 보성군을 보면 이전 백제 때 지명은 복홀군(伏忽郡)이었다. '복홀'은 "보라는 이름의 성"이라는 의미의 지명을 음차한 것인데[7] 옛 지명의 음을 살리면서도 의도적으로 '보배롭다'(寶)라는 좋은 뜻의 한자를 끼워맞춰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다.
이때 처음 시도되었던 지명 한화 정책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한자어 지명의 기초가 되었고 21세기 현대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전국 각지의 지명들은 경덕왕 대에 지어진 이름 그대로거나 경덕왕 버전에서 도중에 약간 바꾼 것이 상당히 많다. 나무위키에서 xx시, yy군 문서 아무거나 들어가서 역사를 보면 십중팔구는 지명 변천에서 경덕왕이 언급되고 있다.
간혹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 때문에 고유 지명이 잊혀지고 중국과 비슷해져 버렸다고 경덕왕을 까는 경우도 있지만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경덕왕이 고치기 이전 고유어 음차 지명들도 전부 기록에 남아있다. 즉 경덕왕이 고쳐서 고대의 고유 지명이 잊혀졌다는 것은 오해이고 경덕왕이 건드린 지명의 원래 이름들은 지금도 기록에 남아있다. 단지 후손들이 이전 이름과 경덕왕 버전 지명 중 후자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거지, 이전 옛 지명들도 경덕왕이 남겨놓은 기록을 통해 당시 신라가 지배하고 있던 범위 안에서 시군 단위로는 모두 고증이 가능하다.
사실 한화 정책이라고 하지만 상당수의 행정 구역은 한화 이전의 토착 지명을 본따서 만들었거나 어원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상주의 경우 한화 이전의 명칭을 사벌 혹은 상락이라고 하는데 대고을을 뜻하는 주를 더했을 뿐 이전의 고유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안동의 경우에도 고타야에서 고창으로 바뀐 사례로 고유 지명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하동은 한다사라는 고유 명칭과 발음이 비슷하며 의성은 소문이라는 고유 어원을 문소로 바꿨을 뿐이다.
경덕왕의 한화 정책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만 정작 이런 한화 정책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완성되었다. 당장 경덕왕 다음 혜공왕 때 많은 지명이 원상복귀되기도 했었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국가답게 신라는 고유어로 된 왕호나 관직명, 관등 체계(갈문왕, 매금, 파진찬 등)와 같은 토착적인 문화를 하대까지도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에 반해 새롭게 새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고려는 토착문화 대신 당대의 최신 시스템이었던 당제(唐制)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운용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덕왕 대의 한화 정책은 토착 문화를 어느 정도는 유지했고, 이러한 일시적인 한화 정책마저도 혜공왕 대에 폐지되었다. 오히려 고려 시대에 지어진 새로운 지명은 신라 시대와 달리 철저하게 중국식 어원을 가지고 지어진 지명이다.[8]
따라서 경덕왕대에 처음 시도된 한화 정책을 고려시대부터 다시 되살려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조선시대까지 쭉 이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진 관직명만 살펴봐도 삼국시대, 신라고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9] 다만 한화 정책을 처음 시작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한화정책은 녹봉제와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해 시작된 경덕왕의 야심찬 정책이었지만, 결국 지명과 제도, 관직이 임금의 의지로 바뀌었어도 귀족 세력의 약화는 뚜렷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위 내내 버라이어티한 자연재해가 일어났고,[10] 이를 핑계삼아 귀족들이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757년, 녹읍제가 부활한다.'''

4. 귀족들의 압박과 녹읍의 부활


흔히 경덕왕은 녹읍 부활을 들어 귀족들 세력 견제에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는 최신 학설을 싣는데 가장 보수적인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이나 교과서를 따르는 각종 시험에서는 그 정도로 간단히 가르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반박하는 설도 많이 제기되고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는 경덕왕이 진골 귀족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부활시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정작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녹읍 부활 이후를 보면 경덕왕은 이후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정치를 펼치고 있다. 지방 행정 한화 정책이나 관직 한화 정책은 모두 녹읍제를 부활시킨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녹읍 부활은 757년 3월이고 지방 행정 한화 개편은 757년 12월부터 시작했으며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편한 것은 759년 정월부터다. 만약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경덕왕이 이런 정책들을 펼칠 수 있었을 리 없다. 오히려 이는 경덕왕의 왕권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경덕왕 대에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고 이전 왕들 대부터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국가 재정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지사. 신문왕 대에 제정된 녹봉제가 확실히 진골 귀족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녹봉제는 국가에서 일일이 지급에 신경을 써야 하니 관리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족한 국가 재정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경덕왕도 귀족들이 자기 몫 땅을 알아서 관리하니까 유지 비용이 덜 드는 녹읍제를 시행한 것이다.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에게 이익인 것을 경덕왕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후로도 경덕왕이 자신의 정책을 계속 시행했던 것으로 보아 경덕왕의 왕권은 충분히 강력했고 이로 볼 때 녹읍제를 실시해도 왕권이 강력하므로 자신이 관리를 잘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다가 국가 재정 문제까지 합쳐져서 녹읍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758년 2월에 경덕왕은 "중앙 관리나 지방관이 휴가를 청한 것이 만 60일이 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시대 당나라는 관리가 1년을 기준으로 약 100일까지 휴가를 쓸 수 있었고 후대의 고려시대에는 관리가 받았던 공식적인 휴가일만 60일이었으며 개인이 임의로 쉴 수 있는 날까지 합치면 1년에 100일에서 120일 정도였으므로 밑에서 일하는 관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혹하고 힘든 조치였다.[11][12] 이런 조치에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했겠지만 이런 불만을 안고도 경덕왕은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만큼 왕권이 강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무 관료전 체제를 붕괴시켜 오히려 문무 관료전을 통한 무인들에 대한 토지 지급이 끊긴 덕택에 이후 혜공왕 때는 규모가 큰 반란이 일어났는데 알다시피 문무 관료전은 무인들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을 뺏긴 것에 불만을 품어 96각간의 난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왕권의 강화가 되려 무예에 능한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만 폭발시킨 셈이 된다. 흔히 통일신라를 문치주의가 가장 강했던 시기라고 하는 것도 실은 경덕왕이 만들고 원성왕이 이것에 대해 절정을 끌어올렸기에 그러했다. 이로부터 반란은 거듭되는데 반란을 완전히 해결한 사람들이 신무왕이 집권하기 전까지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무장 세력이었던 장보고와 그를 돕던 신무왕이 반란을 일시적으로 종식시키는데 애석하게도 신무왕은 단군 이래 재위가 가장 짦은 왕이 되었다. 신무왕은 본시 무장 세력들을 돕던 왕이었었고 문무왕 이후 '신무'라는 무의 시호가 붙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상대등 김사인이 왕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귀족들이 경덕왕을 압박한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데 사실 김사인은 태종 무열왕의 3남인 김문왕의 손자로 성덕왕이찬을 지냈으며 김사인의 아들인 김유정 역시 경덕왕에게 중용되어 중시까지 지냈으니 김사인은 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근왕 세력이었다.[13]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고 이듬해 병으로 물러났다는 것도 그가 성덕왕 때부터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연로해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등 김신충과 시중 김옹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물러났다는 것 역시 잘못된 설명이다. 김신충은 김사인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선왕 효성왕의 측근이었던 인물이고 김옹의 경우는 경덕왕의 첫 장인인 김순정의 손자다. 본래 상대등은 시중과 달리 매우 길게 재임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신충은 6년째 재임 중이었고 김옹은 3년째 재임 중이었는데 그런 관직이 교체된 것은 오히려 왕이 이런 관직들까지 교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권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다. 후임으로 김양상을 시중으로 임명한 것도 이상하게 볼 것 없는게 김양상이 내물왕계의 인물이라지만 김양상의 외할아버지가 성덕왕이므로 경덕왕에게 김양상은 조카가 되는 것이기에 근왕 세력으로 보는 것이 맞다.[14] 이전에 김양상은 제6위 아찬이었는데 신라에서 시중은 제5위 대아찬 이상부터 임명될 수 있었던 관직이다. 김양상을 시중에 임명한 것도 경덕왕의 정치적 안배.
이로 볼 때 경덕왕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으며 견제에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골 귀족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책을 그대로 수행해 성사시킨 것을 보면 오히려 그는 통일신라의 국왕 중 신문왕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다.

5. 경덕왕 대의 사회와 문화


아버지 성덕왕 대에 건설한 물시계(漏刻) 관리 부서 누각전에 천문학자를 추가 배치하고, 당시의 대학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는 등 학문적 진흥도 이뤄졌다.
국력이 강대했고 이 때 실질적으로 신라는 옛 고구려 남부 핵심 영토였던 패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패서는 나당전쟁 승리와 성덕왕 시대에 당나라에 영유권을 인정받은 뒤 느슨한 형태로 옛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있었는데, 경덕왕 시대에 들어 여러 성을 새로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많은 군현을 설치한다.
당나라 대종 황제에게 만불산을 보내는 등 외교 관계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유지되었던 시대였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는 의전 문제로 여전히 투닥투닥했지만 크게 충돌이 있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그의 치세는 차츰차츰 신라 전성기의 마지막 시대이자 쇠망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황금기의 마지막이란 점에서, 훗날 조선정조와 비슷한 위치인지도.
한편 성덕대왕신종의 건립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으나, 이는 계속 실패했고, 아들 혜공왕 재위 때인 771년 완성되었다.[15] 하지만 그 외에도 754년 황룡사 대종(皇龍寺大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편 경덕왕은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랑들을 지도하던 승려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는데 이 때 향가가 발전하기도 했다. 월명사, 충담사가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6. 후계자


사량부인 김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폐비[16]하고 만월부인 김씨를 새로 들인다. 만월부인과의 사이에서 다음 왕인 혜공왕을 낳는데,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표훈대덕 문서도 참조. 여하간 아들을 너무 늦게 낳은 탓에 후계자인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쇠퇴의 원인 제공자.
이 설화에 의하면 경덕왕의 음경 크기가 8촌(약 20cm ~ 21cm)[17]이었다고 한다.[18] 결국 아들을 못 보는 건 부인 탓으로 돌아갔고 그래서 사량부인도 폐비됐던 것인데, 만월부인은 누구보다도 음기가 가득한 기운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 양기가 넘치는(?) 경덕왕과 적격이었다. 그리고 아들을 보기 위해서 표훈대덕 스님을 불러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했는데 상제한테 갔다온 표훈대덕이 아뢰기를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경덕왕이 다시 표훈대덕에게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표훈대덕이 하늘을 갔다와서 상제가 바꿀 순 있지만 그렇게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경덕왕은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겠다고 말했으며, 이후 만월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때문에 혜공왕은 원래 딸이었던 것을 아들로 바꾼 운명이기 때문에 여자아이 놀이를 좋아하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혜공왕이 젊은 나이에 피살되면서 그의 대는 끊기고 무열왕 계통은 왕위에서 멀어지게 되며, 신라도 수백년에 걸쳐 쇠락기로 접어든다.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에 의하면 김일성이라는 사촌형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현대로 치면 외교관격인 숙위로 당나라에 파견된 후 평생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당나라 여성 장씨와 결혼하고 거기서 죽어 묻힌 점을 미뤄보면,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방계 왕족으로서 동시기 경덕왕의 신라 조정으로부터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경덕왕 역시 위와 같이 관련 설화까지 있을 정도로 아들을 늦게 보았을 정도로 후계구도가 불안정했기에 정황적 근거는 있다.

6.1. 아들 혹은 사기꾼?


752년 윤 3월 22일, 신라 왕자 대아찬(大阿飡) 김태렴과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金弼言) 등 700여 인이 7척의 배를 타고 와서 하카타[19]

에 입항했다.

6월 14일 신라 왕자 김태렴이 신라 국왕의 사명을 받들어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다. -《속일본기》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신라 왕자라고 자칭하며 코켄 덴노 시대의 일본을 방문한 김태렴(金泰廉)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국내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진짜 경덕왕의 아들인지 국제 사기꾼인지 왈가왈부가 있는데, 따져보면 사기꾼일 확률이 더 높아보이는게 일단 김태렴은 일본에 무리를 끌고 가선 왕자를 자칭하며 "신라가 일본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식으로 현혹하고 많은 물건을 팔아치웠지만, 정작 일본 조정에서 다음 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자 신라는 되레 일본 사신이 무례하게 군다는 이유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김태렴이 저자세로 나간 것과는 정반대.
그리고 김태렴이 신라의 왕자라고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752년 당시 경덕왕에겐 '''왕자가 없었다는 것'''. 그냥 왕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 넘어서, 삼국유사를 보면 만월부인과 표훈대덕 이야기 등 왕위를 이을 왕자를 얻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758년에야 겨우 훗날 혜공왕이 되는 왕자 김건운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차라리 왕자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으면 '왕자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기록이 부실하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는데 경덕왕은 '왕자가 없었다'는 기록까지 있으므로 빼박인 것. 그러니 752~753년 당시에 경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을 리가 없다.
또 당시 경덕왕의 나이는 752년 기준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30대 초반이었다. 왜냐하면 경덕왕의 어머니는 소덕왕후 김씨인데 그녀가 성덕왕에게 시집을 온 때는 720년이었다. 그러므로 효성왕과 경덕왕은 모두 720년 이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다. 소덕왕후는 724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김태렴이 일본을 방문했던 752년에는 경덕왕의 나이는 29~32세였다.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경덕왕에게 외국에 입조시킬 만큼 장성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경덕왕 본기'''
一年夏五月 경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일본국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二年春三月 가 한번에 송아지 3마리를 낳다
二年春三月 당나라에서 효성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하다
二年春三月 당에서 경덕왕을 책봉하고 전왕의 관작을 잇게 하다
二年春三月 당 황제가 직접 풀이한 효경을 1부 주다
二年夏四月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
二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二月 왕의 아우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二年冬十二月 당이 신라 사신에게 관직과 관복을 주다
三年春一月 유정[20]을 중시로 삼다
三年春閏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夏四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다
三年 요사스러운 별이 나타났다가 열흘 만에 사라지다
四年春一月 김사인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夏五月 날이 가물다
四年夏五月 대정을 중시로 삼다
四年秋七月 동궁을 수리하다
四年秋七月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을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年夏四月 죄수들을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五年夏四月 150명에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다
六年春一月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다
六年春一月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다
六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 진평왕에 벼락이 치다
六年 날이 가물다
六年 눈이 오지 않다
六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퍼지다
七年春一月 천구#s-3.1가 땅에 떨어지다
七年秋八月 태후가 영명신궁으로 거처를 옮기다
七年秋八月 정찰 1인을 두다
七年秋八月 북쪽 변경을 검찰하게 하고 14개 군현을 두다
八年春二月 폭풍이 불다
八年春三月 천문박사와 누각박사를 두다
九年春一月 시중 대정이 물러나고, 조량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春二月 어룡성에 봉어를 두다
十一年春三月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다
十一年秋八月 동궁아관을 두다
十一年冬十月 창부에 사 3인을 더 두다
十二年秋八月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접견하지 않다
十二年秋八月 무진주에서 흰 을 바치다
十三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五月 성덕왕비를 세우다
十三年夏五月 우두주에서 지초를 바치다
十三年秋七月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다
十三年秋八月 가물고 누리가 있다
十三年秋八月 시중 조량이 물러나다
十四年 웅천주 향덕의 효행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다
十四年 망덕사 탑이 흔들리다
十四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秋七月 죄수를 사면하고 노약자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다
十四年秋七月 김기를 시중으로 삼다
十五年春一月 상대등 김사인의 간언을 받아들이다
十五年春一月 당현종에게 조공하니 시를 지어 주다
十五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五年夏四月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치니 벼슬을 주다
十六年春一月 신충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三月 녹봉을 없애고 녹읍을 주다
十六年秋七月 영창궁을 다시 수리하다
十六年秋八月 조부에 사 2인을 더 두다
十六年冬十二月 9주의 이름을 고치고 군현을 소속시키다
十七年春一月 염상을 시중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휴가가 만 60일이 된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다
十七年夏四月 의학에 뛰어난 사람을 내공봉에 임명하고, 율령 박사를 두다
十七年秋七月 왕자가 태어나다
十七年秋八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八年春一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二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三月 혜성이 3월에 나타났다가 가을에 사라지다
十九年春一月 도성 동쪽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다
十九年春一月 궁궐 안에 큰 못을 파다
十九年春一月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다
十九年夏四月 김옹을 시중으로 삼다
十九年秋七月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책봉하다
二十年春一月 하늘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다
二十年夏四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一年夏五月 6개의 성을 쌓고 태수를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秋七月 서울에 큰 바람이 불다
二十二年秋八月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다
二十二年秋八月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관직에서 물러나다
二十二年秋八月 이순이 경덕왕에게 간언하다
二十三年春一月 만종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양상을 시중으로 삼다
二十三年春一月 살별이 나타나고, 이 나타났다 사라지다
二十三年冬十二月十一日 많은 유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四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벼슬을 주다
二十四年夏六月 유성이 별을 범하다
一年夏六月 경덕왕이 죽다
[1] 추측 시기는 722년 ~ 724년이다. 생모 소덕왕후가 부왕인 성덕왕과 함께 산 기간은, 720년 3월에 혼인해서 724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다. 형 효성왕이 721년 ~ 722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경덕왕은 722년 ~ 72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2]삼국사기》에 각주로 "옛 기록(古記)에는 765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767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쪽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되어 있다.[3] 김순정의 딸로 삼모부인(三毛夫人)이라고도 불린다. 사량부인의 어머니는 유명한 미녀 수로부인으로 추정된다.[4] 743년(경덕왕 2년)에 맞이한 후비(차비)이다.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 경수왕후(景垂王后), 경수태후, 경목왕후(景穆王后)라고도 불린다.[5] 현대에 대한민국에서 쓰는 수많은 지명들이 대부분 이 때 처음 만들어졌다.[6] 고구려, 백제, 초기 신라 때 사용한 지명을 경덕왕이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백제 시대 지명을 그대로 유지한 아산시 탕정, 임실군 등.[7] '-홀' 지명은 전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미추홀[8] 경주, 진주, 안동, 의성 등이 고려 시대에 지어진 지명인데, 이러한 이름은 앞에서 언급한 상주, 고창, 하동, 문소 등과 달리 고유 지명과 단절되어 있다.[9] 발해의 경우도 나라가 한 번 망하고 새로 건국했다는 점에서 고려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비슷한 관제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한 두 나라는 당제를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10] 대략 이상 기후나 이상 현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 해가 없는 해보다 적은 정도로, 천구성이나 혜성과 초신성, 폭풍우와 벼락, 지진, 가뭄 등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11]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녹읍제와 관련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데 당나라는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급여가 반 정도로 축소 지급되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공식 휴가 기간을 빠듯할 정도로 줄여서 녹읍을 포함한 보수를 줄여 국가 재정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라고 해석하고 있다.[12] 오늘날 직장 생활로 비유하자면 회사가 허용하는 휴가 일자가 절반이나 줄었으며 휴가 신청 횟수가 줄어든 허용 일자를 넘어가면 자동으로 회사에서 잘라버린 거라고 볼 수 있다.[13] 이 날의 기록을 보면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자 왕이 무시한게 아니라 '가납'(간언을 받아들임)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경덕왕이 비판을 수용하는 유교군주상을 지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사례라고 할 수 있다.[14] 사실 김양상도 원래 혜공왕의 근왕 세력이었다가 그가 시해당하자 훗날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의 강압으로 임금이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더욱이 선덕왕 사후 그의 아내가 원성왕에 의해 출궁당하는데 사실 선덕왕이 직접 권좌에 오른 것이라면 사후에 이러한 장면이 나오기 힘들다. 선덕왕 본인 역시 재위 기간 중 자주 왕위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도 위의 의심을 부추기는 부분.[15] 아버지 성덕왕이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기리는 종의 주조 역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16] 다만, 사량부인을 폐한 것은 단순히 아들을 못 본 것 뿐 아니라 일본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대귀족 김순정 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존재한다.[17]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24cm 정도 되지만, 옛날의 길이 단위는 오늘날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18] 그런데 경덕왕이나 지증왕을 비롯한 몇몇 왕의 거대한 음경 크기에 대한 기록은, 그 왕들의 권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는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남성다움이나 건장한 육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이룬 왕에 대해 실제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음경 크기를 과장하는 방법으로 그 왕을 추앙하는 경향이 었었다는 것이다.[19] 현재의 후쿠오카[20] 혜공왕의 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