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다츠 덴노

 


'''한풍 시호[1]'''
비다츠 덴노(敏達天皇, 민달 천황)
'''화풍 시호'''[2]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
(他田渟中倉太珠敷尊[3], 沼名倉太珠敷命[4])
'''별호'''
오사다노오오키미(他田天皇, 訳語田天皇)
'''능호'''
고우치노시나가노나카노오능(河内磯長中尾陵)
'''생몰'''
538년 ~ 585년 9월 14일
'''재위'''
572년 ~ 585년 9월 14일
'''황거'''
쿠다라노오오이노미야(百済大井宮)
오사타노사키타마노미야(訳語田幸玉宮)
1. 소개
2. 가족관계
3. 백제와의 관계
4. 신라와의 관계


1. 소개


일본의 제30대 천황. '오사다 덴노(他田天皇)'라는 별칭이 있었다. 28대 센카 덴노까지가 '''고훈 시대'''로 취급되며, 비다츠 덴노를 '''아스카 시대''' 첫 번째 오오키미로 보고 있다. 안칸과 센카의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과 달리 비다츠 덴노는 치세가 길었다.
긴메이 덴노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센카 덴노의 황녀인 이시히메노히메미코(石姬皇女)였다. 비다츠 덴노의 황후인 스이코 덴노는 긴메이 덴노와 소가노 기타시히메의 딸로 이복남매였으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4명의 황후와 16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한다. 부황인 긴메이 덴노에 의해 황태자가 되었고, 황위를 계승하였다.
비다츠 덴노의 재위기간에는 '''소가 가문의 세력이 점점 부상하여 모노노베 가문과의 정치적 갈등이 첨예화되는 시기였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외래종교인 불교 숭배가 문제되고 있었는데, 특히 소가노 우마코와 모모노베노 모리야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비다츠 덴노 자신도 불법을 믿지 않고, 문학사학을 애호했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577년(비다츠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규모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의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583년에는 비다츠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소가노 우마코도 아버지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참고로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그의 재위 3년에 신라가 일본 서쪽 변방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당시 신라가 진흥왕의 전성기 직후로 팽창의지가 강했고, 백제와 가야를 지원하는 왜군과 충돌한 적도 여러 번이라 개연성은 있지만 더 오래된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583년 임나[5] 부흥을 위해 멸망한 탁순국의 왕자로 백제의 달솔[6]로 있던 일라를 불러들였지만 그 정책이 백제에게 불리한 내용이었기에 백제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달솔 일라가 소환된 것을 백제에 의한 쓰쿠시의 신국 건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여 소가 가문과 모노노베 가문의 권력투쟁으로 일라가 사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다츠 덴노가 571년부터 58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571년부터 572년까지 친정하였고, 572년부터 585년까지는 소가노 우마코가 대리청정하였다.
585년 8월, 비다츠 덴노가 병으로 죽고[7]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처남인[8] 요메이 덴노가 즉위했지만, 황위 계승 문제가 얽히면서 결국 소가 가문과 모노노베 가문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일본서기 비다츠 14년(585년) 음력 3월 30일자 기사에 “종기가 나서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하였다.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이, “몸이 불타고 두들겨 맞고 부서지는 것 같다”고 하며, 울면서 죽어갔다”는 기사가 있는데, 천연두 유행으로 추측되며 천연두 발생 사례의 가장 이른 사료기록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가족관계


  • 황후皇后 : 히로히메(広姫, ?~575)[9]
    • 장남 :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
    • 딸 : 사카노보리 황녀(逆登皇女)
    • 딸 : 우지 황녀(菟道皇女)
  • 황후皇后 : 누카타베 황녀(額田部皇女)
    • 딸 : 우지노카이타코 황녀(菟道貝蛸皇女)
    • 아들 : 다케다 황자(竹田皇子)
    • 딸 : 오하리타 황녀(小墾田皇女)
    • 딸 : 우모리 황녀(鸕鶿守皇女)
    • 아들 : 가즈라키 황자(葛城王皇子)
    • 아들 : 오와리 황자(尾張皇子)
    • 딸 : 다메 황녀(田眼皇女)
    • 딸 : 사쿠라이노유미하리 황녀(桜井弓張皇女)
  • 부인夫人: 오미나고(老女子)
    • 아들 : 나니와 황자(難波皇子, 560전후~587)
    • 아들 : 가스가 황자(春日皇子, 560 경~615)
    • 딸 : 구와타 황녀(桑田皇女)
    • 아들 : 오오마타 황자(大派皇子, 585 이전~?)
  • 채녀采女: 우나코(菟名子)[10]
    • 딸 : 후토히메 황녀(太姫皇女)
    • 딸 : 누카데히메 황녀(糠手姫皇女, ?~664)

3. 백제와의 관계


비다츠 덴노와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11]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비다츠 덴노의 백제 관련 행적들이다.
비다츠 덴노의 손자가 '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신찬성씨록>이라는 일본의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비다츠의 손자인 '백제왕'은 34대 조메이 덴노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이 통사에는 '''“비다츠 덴노가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고 쓰여져 있다. 비다츠 덴노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천황들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없었는데 비다츠 덴노가 최초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백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비다츠 덴노가 백제왕궁을 지었던 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애초에 백제계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었기에 비다츠 덴노는 그의 궁궐인 '백제왕궁'을 당당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비다츠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이 나라 지역에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참고로 33대 스이코 덴노의 남편이었던 비다츠 덴노만 '백제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후대 천황 또한 ‘백제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츠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舒明, 629~641년 재위)덴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고 전한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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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천(百濟川) 근처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고 기록한 일이다. 비다츠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 덴노가 '백제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었다.
즉, 조메이 덴노가 나라 지방 백제천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츠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즉, 당시 왜국에 거주하고 있던 백제계 도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4. 신라와의 관계



신라와는 관계가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평왕 치세에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안정복동사강목에서 해동기(海東記)를 인용해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서기 583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일본의) 서변을 토벌하였다"는 전승을 실었다. 다만 더 오래된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학계에서 주목하는 기사는 아니다.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일본서기[4] 고사기.[5] 금관가야의 이칭 또는 가야연맹체의 총칭. 6세기 이전 왜는 백제가 아니라 거리상 가장 가까운 가야와 가까워 한국사서에 나오지 않는 가야 국가에 대한 기록도 있다.[6] 16관등 중 두 번째.[7] 고사기에는 584년.[8] 아내인 스이코 덴노의 친오빠다.[9] 오키나가노마테 왕(息長真手王)의 딸.[10] 중국사의 후궁 제도에서 채녀采女가 급이 낮은 후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출신 신분은 다른 아내들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11] 14세기경 편찬. 11세기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