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대회 기수로 기산되는 정식 대회는 아니지만 1906년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문서를 참고하자.
'''1904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III Olympiad |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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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기간
1904년 7월 1일 ~ 1904년 11월 11일
개최 도시
미국 / 세인트루이스
참가국
12개국
경기 종목
16개 종목, 95개 세부 종목
참가선수
651명
(남자: 645명, 여자: 6명 )
개회 선언자
데이비드 R. 프랜시스
루이지애나 매입 기념 박람회 조직위원장
주 경기장
프랜시스 필드
이전 대회
1900 파리 올림픽
다음 대회
1908 런던 올림픽
1. 개요
2. 상세
3. 사건사고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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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3회 올림픽이자 '''20세기 최초의 올림픽'''이자 미국이 치른 첫 번째 올림픽.[1] 원래는 시카고가 개최권을 얻었으나 같은 해에 세인트루이스 박람회가 열리게 되어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세인트루이스에서 같이 열도록 하였고 IOC가 받아들임으로써 세인트루이스로 결정된다.
앞의 파리 대회와 쌍벽을 이루는 파행의 대회. IOC위원장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시 만국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이 대회는 교통사정 때문에 유럽에서 5개국 26명만이 참가했을 뿐(외국 선수 모두 합쳐도 77명), 한마디로 이 대회는 526명을 출전시킨 미국의 전국체전이었다. 중고등대학부의 별도 대회가 치러졌고 프로 경기도 끼어드는 등 난맥에 있어서는 앞의 대회를 확실히 앞질렀다.

2. 상세


루이지애나 구입 100주년 박람회의 부속행사로 올림픽을 활용하려는 중서부 실력자들의 욕심으로 치러진 최악의 대회. 개회식과 폐회식의 절차도 없이 올림픽이 그냥 진행되었다.이 대회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이 사진 하나로 증명된다. 골목에서 펼친 이 허들 경기의 장면이 이 대회의 실상을 잘 알려준다..
1900 파리 올림픽 때도 그랬지만 이 올림픽은 아예 올림픽과 만국박람회가 같이 열렸으며, 기간도 그에 맞춰서 상당히 길게 진행이 되었었다. 다만 기간이 길긴 했어도 당시 러일전쟁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졌던지라 거리가 먼 국가에서는 참가를 하지 못했으며, 대부분 미국 선수나 캐나다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여자선수가 참가하긴 했지만 고작 6명만 참가했을 정도. 대회 자체도 망했지만, 이 망한 대회를 어떻게든 끌어올려보려고 계획했던 인류학의 날 행사가 기획부터 문제였던지라 욕만 대차게 먹은 올림픽이기도 하다.
만국박람회와 러일전쟁등 국제정세로 두차례나 올림픽이 유명무실해지자 IOC는 아테네에서 유럽국가를 중심으로 한 중간대회를 개최키로 합의, 그리스는 적국인 오스만 제국까지 참가시키면서 중간 대회에 열의를 보였으나 첫 대회 직후 크레타 전쟁에서 참패하고 발칸반도 일대의 긴장이 누그러들지 않는 상황이라 중간 대회 이후 그리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대회에서 제외되었던 역도와 레슬링이 추가되었으며, 복싱과 한손 역도(바벨), 레슬링 자유형과 근대 10종경기가 정립되고 정식종목으로 추가되었다. 농구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추가된것 이외에는 전대회와 크게 차이가 없는 종목을 보여준다.
참고로 1, 2, 3위에게 금, 은, 동메달을 수여하기 시작했던 대회가 이 대회부터였다.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종목수도 상당히 세분화되었고 메달도 많이 걸렸지만, 유럽 쪽 선수들이 거의 참가를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메달을 미국이 쓸어갔다.''' 미국 선수단도 가장 많은 526명이 참가하였으며, 세부종목까지 포함해서 메달을 전부 미국이 쓸어간 종목[2]도 있고, 메달이 많이 걸린 육상도 대부분의 메달을 싹쓸이 해갔을정도.[3] 이쯤 되면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거의 미국 국내 대회 수준이다. 1, 2회 대회 때 미국의 가능성을 봤던 쿠베르탱은 이 대회에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만국박람회의 시시한 부속행사 수준으로 전락하자 매우 실망한 나머지 아예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회는 엉망이었어도 숱한 신기록이 쏟아졌다. 미국의 찰스 드보락은 3.50m를 넘어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했다. 수영에서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잠영경기[4]가 사라진다.
미국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수영과 사이클에서는 미터가 아니라 마일로 측정하기도 하였다.
이 올림픽의 주 경기장이었던 프랜시스 필드는 현재 워싱턴 대학교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소유로, 학교 스포츠 팀의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3. 사건사고


전 대회에 이어 마라톤 경기에서 또 하나의 사고가 터졌는데, 뉴욕에서 온 미국의 프레드 로즈 선수는 경기 도중 탈진해 주저앉았다가 자신을 태워준 승용차를 타고 스타디움 앞 6km 지점에서 내려 스타디움으로 들어갔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우승컵을 수여할 때 진짜 우승자 토마스 힉스가 들어왔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로즈는 자신의 행위를 실토함으로써 우승은 힉스에게 돌아갔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지만 마라톤 코스 40km[5]중에서 17.6km나 차를 얻어타고 오는(...) 대담한 짓거리를 벌인 로즈의 기록은 당연히 말소되었다.
이 외에도 당시 남자 개인 마라톤 경기에는 문제가 많았는데, 기온이 섭씨 32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40km나 되는 코스에 음수대가 딱 하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탈수와 탈진으로 중도 탈락했다. 출전선수 32명 중 완주한 선수가 부정행위를 저지른 로즈를 포함해도 15명밖에 안되었을 정도. 로즈의 탈락으로 우승자가 된 토마스 힉스도 탈수증세로 닥터스탑이 걸렸다가 트레이너가 신경자극제인 스트리키닌을 탄 브랜디를 먹이는 극약처방으로 간신히 달린 것이라고 하며, 결승선에 도착할 즈음에는 탈수와 스트리키닌에 의한 환각증세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고 한다.
이 대회 최대의 반영웅은 육상에서 미국의 완전독식을 저지한 캐나다의 56파운드 투해머 선수 에티네 데스마테우, 그로 인해 일국의 육상종목 완전 석권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록은 다행히(?) 세워지지 않았다.[6]

4. 관련 문서



[1] 이 올림픽 이후 미국은 하계와 동계를 통틀어 8번의 올림픽을 더 치르게 됐다.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32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96 애틀랜타 올림픽,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등을 치렀고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2] 양궁, 복싱, 사이클, 로크, 테니스, 줄다리기, 수구, 레슬링[3] 어느 정도냐면 당시 1위했던 미국이 '''금 78, 은 82, 동 79, 총합 239'''개이며, 그나마 그 차점인 쿠바가 '''금 5'''개, 3위인 독일이 '''금 4, 은 4, 동 5, 총합 13'''개로 거의 넘사벽 수준으로 따버렸다. [4]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물 속에서 가장 오래 가는 것을 겨루는 경기.[5] 이 당시엔 아직 마라톤 코스 거리 관련 규정이 정립되기 전이라 공식 경기에서도 코스가 42.195km가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당시 코스 길이는 24.85마일, 약 39.99 km였다.[6] 위의 마라톤 우승자 토마스 힉스도 당연히 미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