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드 쿠베르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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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에르 드프레디, 쿠베르탱 남작[1]
(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국적'''
프랑스[image]
'''생몰년도'''
1863년 1월 1일, 프랑스 제2제국 파리~
1937년 9월 2일, 스위스 제네바
'''직업'''
교육자, 스포츠 행정가
1. 개요
2. 생애
3. 비판
4. 기타


1. 개요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닌 얼마나 잘 싸우는 것이냐다."'''[2]

'''"모든 스포츠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3]


프랑스 파리에서 1863년 1월 1일에 태어나 1937년 9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프랑스의 교육자,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이자 드미트리오스 비켈라스와 함께 1894년 IOC를 설립하였으며 제2대 IOC 회장을 역임한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올림피아 제전 연구 및 올림픽 부활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서 스포츠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 물론 후술할 논란 때문에 비판도 받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를 감안한다면 이는 쿠베르탱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한계점이라 볼 수 있겠다. 오히려 쿠베르탱은 프랑스 귀족 출신임에도 자유주의적 사고와 국제주의적 사고를 가진, 그 당시로는 매우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2. 생애


1863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루이 드프레디 쿠베르탱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쿠베르탱은 노르망디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쿠베르탱은 프랑스가 과거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에 비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된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실상 보불전쟁 이전부터 1815년 나폴레옹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의 '역사적 역할'이란 역사의 뒤쪽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혁명은 1871년에 파리 코뮌이 피바다 속에서 파괴된 것으로 사실상 끝났고, 이들은 더 이상 혁명 세력이 되지 못하고 시민사회로 정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숙청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국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
이러한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쿠베르탱은 프로이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이 된 쿠베르탱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사관학교를 중퇴하고 교육학을 전공했다.
교육학을 연구하면서 쿠베르탱은 프랑스 몰락의 원인을 '''군인들의 체력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게 되는데 이는 그 당시 발굴되었던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의 연구와 맞물려 그가 고대 스포츠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
이외에도 쿠베르탱은 스파르타의 교육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는데 스파르타가 고대 그리스의 맹주로 떠오르면서 이웃 국가들과 맺은 동맹이 고대 올림픽의 안전장치로 작용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쿠베르탱은 후에 <프랑스 스포츠 연맹>을 조직하여 학교 체육의 활성화 및 프랑스 전국체육대회의 성격을 띤 경기대회를 추진하기도 하며 이곳에서 얻은 결과를 자신의 스포츠 철학을 구성하게 된다.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은 쿠베르탱은 편협한 민족주의 사상에서 한층 진보하여 '''스포츠를 통한 세계 청년들의 화합'''이라는 사상 아래 근대 올림픽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5]
그러나 그의 포부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세간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894년 6월 16일부터 23일까지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올림픽 경기의 부활을 위한 의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올림픽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이 회의에는 쿠베르탱의 작업을 국제적으로 지원하던 미국 및 영국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쿠베르탱은 자신의 설득과 지지자들의 성원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13명의 IOC 위원들이 선정되었고, 초대 위원장으로는 쿠베르탱의 추천에 따라 그리스의 왕자인 드미트리오스 비켈라스가 선정되었고, 자신은 사무총장이 되었다.
물론 쿠베르탱 이전에도 근대올림픽을 부활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17세기 초 영국에서 있었던 코츠월드 대회의 주최자인 로버트 도버는 이 대회를 올림픽이라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가 1838년에 올림픽 경기의 부활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스웨덴, 프랑스에서도 올림픽의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스포츠 대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회들은 지역적인 결속을 위한 대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로 근대 올림픽은 쿠베르탱이라는 어느 선각자가 갑툭튀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고대 문명에 대한 향수라는 그 시대정신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올림픽 부활의 시도 속에서 쿠베르탱의 근대 올림픽만이 성공한 이유는 시대를 읽을줄 아는 탁월한 안목 때문이었다. 지역적 특색과 국내 선전용 행사라는 한계가 분명했던 다른 대회들과는 달리 쿠베르탱의 대회는 세계화를 표방하는 대회이자 그의 출신 배경을 뛰어넘는 자유주의적 사고, 영국과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배운 '체육'과 체계적인 '스포츠'의 철학에 기초하여 탄생된 '''세계화된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어느 국가나 다른 인물에 의해서 시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근대 올림픽을 세계의 제전으로 발전시킨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3. 비판


올림픽 정신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르게 '''성차별주의자였으며''' 초기에는 여성의 올림픽 출전을 거부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쿠베르탱의 이와 같은 이중성을 다룬 내용을 방송했었다. 여성은 시상식에서 남성 메달리스트에게 메달이나 주면 된다느니 여자가 땀 흘리며 달리는 것처럼 꼴보기 싫은 건 없다는 발언까지 해댔다. 여기에는 그의 성차별 성향과 함께, 고대 올림픽에 여성의 참가가 없었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이에 여성계에서 분노해 여성 스포츠 국제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 때문에 올림픽이 피해를 입을 위기에 처하자 쿠베르탱은 막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대회의 인지도만 높여줘서 결국 제2회 1900 파리 올림픽부터 여성들도 올림픽에 자유롭게 참석하게 되었다. 후일담으로 쿠베르탱이 '''"이 조치는 내 일생 최대의 굴욕이다."'''라며 굉장히 분해하며 여성 선수들이 활약하는 모습은 일부러 안 보려고 했더니, 어린 손녀딸이 "할아버지는 여자가 땀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라며 직설적으로 비판하자 반론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독일의 올림픽 출전을 싫어하여 초대 올림픽 대회에 독일을 초청하지 않는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스포츠 진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프랑스의 보불전쟁 패배였고, 때문에 독일에 반감을 가졌던 점에서 기인한다.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의 흑역사인 인류학의 날에 연관되어 있다는 풍문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본인은 거기에 관계없다고 조직위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한다.

4. 기타


  • 1964 도쿄 올림픽부터 성적과 관련 없이 스포츠맨십을 구현한 인물에게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 이 사람이 고안한 종목이 바로 근대 5종이다. 해당 종목은 비인기 종목이지만 창시자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유지하고 있다.
  • 소행성 2190은 1976년에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가 발견하여 쿠베르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The most important thing in the Olympic Games is not winning but taking part; the essential thing in life is not conquering but fighting well."'''[3] '''"All sports for all people."'''[4] 이 단순한 결론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고, 실제로도 고대 올림픽의 스포츠는 군사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창던지기, 전차경주, 레슬링 등을 보면 실제 전투를 염두에 두고 신체 단련을 위해 만들어진 종목들이다.[5] 그러나 국제주의라는 이상 하에도 각 민족들의 선전용으로 올림픽이 활용된 면이 강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