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파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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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0년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올림픽.
22개국 1319명의 참가자들로 전 대회에 비해 외형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엑스포의 부수 흥행행사로 전락한 대회. 모국에서 훌륭하게 올림픽을 꾸려보려던 쿠베르탱의 이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산산조각났고 올림픽을 관객 동원용으로 생각한 박람회 측은 IOC의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낚시 대회와 소방수 경연, 비둘기 날리기 대회 같은 종목(?)을 채택하기도 하는 등, 다음의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와 함께 역사상 가장 실패한 올림픽이 되었다.
2. 개최
전 대회인 아테네 올림픽에서 생각 외로 이득을 봤는지(?) 그리스 측에서는 계속 아테네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고 싶어했지만,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IOC에서는 다음 올림픽은 1900년에 아테네가 아닌 파리에서 개최된다고 하였다.[1]
같은 해에 열린 1900 파리 엑스포의 부속 행사로 열렸다. 대회가 엑스포 일정에 맞추어 무려 6개월동안 종목별로 분산개최가 되었다. 그 때문에 이 대회는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아닌 국제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원래 개막 예정일은 7월 14일. 즉,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어서 하는 수 없이 개막을 하루 연기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이서 미국에서는 반발. 하지만 국제 스포츠 무대의 1인자로 떠오른 미국을 경계하기 위해 프랑스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날 개막식을 열어 일부 미국 선수들의 불참을 불러온다.
이 대회부터 미국의 언론은 국가별 메달 집계를 보도하기 시작하였으며, 금메달을 획득한 나라의 국가가 울려퍼지는 동안 다른 메달리스트는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민족주의적 의례가 시작된 것도 이 대회부터이다. 국가별 경쟁을 막으려는 IOC 헌장에도 불구하고 초기 대회부터 국가 단위의 격전장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실패
간단히 말하면 엑스포 관람객들을 위한 보너스 볼거리 정도로 취급했다. 따라서 관람객 중 일부가 즉석 참가하기도... 이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정도의 막장운영이었다. 종목별 시상과 기록도 몇달 후에나 이루어지고 종합적인 대회 보고서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엑스포의 부속행사로 치루어지다보니 각종 예술 경연이 대회 종목으로 포함되고 실제 시상도 이루어졌다. 이부분은 현재 IOC에선 인정하지 않고 별도 행사로 표기하고 있다.[2]
별도의 올림픽 대회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지 않고 엑스포 주최측이 행사를 주도하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4. 이색종목
- 인명 구조(...) - 물에 빠진 진짜 사람을 구해 응급처치까지 하는 일종의 수영 경기인데... 진짜 사람이 익사해 폐지되었다. 지금은 월드 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체택되고 있는데 당연히 진짜 사람을 구조하는게 아니고 마네킹으로 대체하고 있다.
- 비둘기 사격 - 말 그대로 비둘기를 사격(!!!)하는 경기. 당연히... 폐지되었다. 사실 현대의 클레이 사격이 이 경기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에서야 클레이 원반을 날려 사격하지만 클레이 사격의 시초는 원반이 아닌 날려보낸 청비둘기를 사격하는 것이었다.
- 비둘기 경주 - 말 그대로 비둘기를 풀어놓고 하는 경주인데... 비둘기들이 번번히 멀리 날아가버려 대실패해 폐지.
- 대포 발사 - 파리의 넓은 안전 지대에 대포를 쏴 거리와 정확성을 재는 대회였는데 어느 농가에 불이 번지는 큰 사고가 나 역시 폐지.
- 잠영, 줄다리기 정도면 양반이고, 그 외에도 열기구 레이싱, 연 날리기, 200m 장애물 수영, 승마 멀리뛰기(...), 승마 높이뛰기(!!!), 소방 등이 있었다.
5. 여담
여성이 최초로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아마 그리스에서 계속 개최되었으면 상당히 늦게나 여성이 참가했을 것으로 보인다.[3] 하지만 쿠베르탱 남작은 여성이 참가하는 걸 무척 싫어해 반대해왔는데 그는 여성은 남성 메달리스트에게 메달을 건네주면 된다(...)라고 자주 말해왔다. 결국 열불터진 여성 스포츠계가 아예 올림픽과 무관한 여성 스포츠 대회를 만드는데 이게 의외로 올림픽 못지않게 흥행에 성공하면서 결국 IOC와 쿠베르탱 남작이 여성 스포츠도 올림픽에 포함시키고 다시는 제외시키지 않겠다고 애원하여 합쳐지면서 여성 스포츠 대회는 사라진다.
여성이 최초로 참가한 대회이니 당연히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게 된다. 영국의 테니스선수로 출전했더 샤롯데 쿠퍼가 그 주인공으로 고대, 현대를 통틀어 최초의 올림픽 여성 금메달리스트이다.[4]#
전 대회에서 레슬링과 역도가 제외되었으며, 2016년 올림픽에 부활하는 골프와 럭비를 포함하며 13개의 종목(그외에 양궁 / 크리켓 / 경마 / 축구 / 펠로타 / 폴로 / 조정 / 요트 / 줄다리기 / 수구가 채택되었다.)이 새로 신설이 되었다. 그리고 1896 아테네 올림픽에 써져있는대로 종목은 남아있지만 좀 이상한 몇몇 종목은 제외가 되었다.
엉터리 올림픽이었지만 그래도 영웅은 탄생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3관왕에 오른 레이어리가 그 주인공인데, 올림픽 첫날 벌어진 제자리 높이뛰기에서 168cm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우승했다. 2위의 기록이 120cm 내외임을 감안할때, 그리고 도움닫기 높이 뛰기의 당시 기록이 180cm임을 감안할때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금도 세계신기록으로 남아 있다. 1912년 스톡홀롬 대회를 끝으로 이 종목이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
대회는 관객 유치를 위해 아동용 경기도 여는 등 아수라장이었지만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종목이기도 한 투원반에서 헝가리의 루돌프 바우어는 투원반 사상 처음으로 몸을 회전시켜 던지는 기술을 선보이며, 36.04m 올림픽 기록을 세우고 우승한다. 이 금메달은 비록 미처 조직위가 준비하지 못해 나중에 우송되었지만 헝가리가 이 대회에서 유일하게 획득한 것이다.
다국적 혼성팀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는 대회였다. 줄다리기에서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혼성팀이 줄다리기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폴로도 영국/미국으로 구성된 팀이 1,2위를 했으며 영국/프랑스로 이루어진 팀이 3위를 했을정도.
이 최악의 올림픽과 동행하는 희대의 반영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영웅적인 장르인 마라톤에서 나왔다. 마라톤 참가자들이 베르사유 궁전을 왕복하는 예정코스의 답사를 모두 끝낸 상황에서 경기 직전 사이틀 경기장 주변 골목길을 도는 것으로 코스가 엉뚱하게 변경되면서 사건은 시작한다. 외국 선수들은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경이 골목길 지리를 잘 아는 자국 선수들을 우승시키기 위한 간계라고 항의했으나, 간단히 묵살되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골목의 먼지 속에서 거행된 이 경기의 우승자는 당연히(?) 프랑스의 빵집 배달부 미셸 데아토였다. 5위로 들어온 미국의 아서 뉴톤은 경기 초반에 프랑스 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나서 어떤 선수도 자신을 앞지른 이가 없는데 막상 결승점에 도착해 보니 프랑스 선수 3명이 들어와 있었다면서 IOC에 항의 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더군다나 그의 기록이 종전의 세계기록을 45분이나 단축 시킨 2시간 59분 4초였다는 것도 뉴톤의 항의가 설득력 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예증. 하지만 마지막 코미디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데이토 자신은 12년이 지나도록 자신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사실을 몰랐던 것.
2인용 조정 경기에서는 인원 정리가 안돼서 관객과 선수들이 뒤섞였고, 이 와중에 네덜란드 팀은 키잡이가 인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다. 네덜란드 조정팀은 어쩔 수 없이 지나가던 프랑스 소년을 길거리 캐스팅해서 키잡이 자리에 앉혔는데 우승했다. 소년은 시상식에는 참석했으나 네덜란드 팀과의 사진 한장만 찍은 후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떠나서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사진상으로는 7~12세 정도로 추측되어 올림픽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로 여겨진다.
이 대회는 역대 하계 올림픽 중 유일하게 윤년이 아닌 '''평년에 개최된 대회'''이다.[5] 그레고리력에서 4의 배수인 년도 중 100의 배수이면서 400의 배수가 아닌 년도는 윤년이 아니기 때문. 단 100의 배수인 년도 중에서도 400의 배수인 년도는 윤년이다. 따라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윤년이고, 다음 평년 올림픽은 2100년 올림픽이다. 그때까지 올림픽이 남아있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19세기에 열린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올림픽'''이기도 하다.
6. 폐막 이후
올림픽 운동의 주창자 쿠베르탱 남작은 자신의 모국에서 열린 이 막장 올림픽을 두고두고 창피해하다가 명예회복을 위해 결국 1924년 다시 한번 파리에 개최권을 주었다. 그리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1924 파리 올림픽은 그럭저럭 성공적인 대회가 된다.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도 박람회와 함께 열리긴 했지만 쿠베르탱 남작과 IOC의 개입으로 철저하게 별도 행사로 치루어졌다.
[1] 이는 IOC 위원장인 비켈라스와 사무총장인 쿠베르탱과의 의견 대립 때문이기도 했다. 비켈라스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행사를 쿠베르탱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 심지어는 소방수 불끄기, 인명 구조 등의 경기도 열렸다. 거의 동네 운동회 수준이었던 것이다.(...)[3] 고대 올림픽이 오직 남자만의 행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에 여성 스포츠 대회는 완전히 분리돼서 별개 운영되었다.[4] 고대에는 여성들이 출전할 수 없었으므로.[5] 그렇기 때문에 폭망했다는 사람도 있고, 2100년 올림픽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