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중국 대홍수

 


1. 개요
2. 발단
3. 재앙
4. 여담


1. 개요


1931년 7월부터 시작해서 11월까지 연속해서 발생한 홍수이다. 양쯔강, 황허 유역에서 발생했으며 사망자는 최대 '''400만 명''', 이재민은 '''2,8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유사 이래 사망자가 가장 많은 홍수, 그와 같이 '''사망자가 가장 많은 자연재해이다.'''

2. 발단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중국에서는 계속 긴 가뭄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홍수 이전 진짜 비정상적인 날씨는 1930년 겨울로 추정되며, 이 해 겨울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확연히 많은 규모의 폭설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심한 폭우의 영향과 겨울에 쌓였던 눈이 봄에 거의 다 녹아 버리면서 강으로 유입되고, 그 때문에 강들의 수위는 확연하게 높아져 버렸다.
1931년 7월과 8월에는 폭우가 더 심해졌는데 공교롭게도 1931년은 태풍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해였다. 그 해 7월에만 '''9개'''의 태풍이 지역을 강타했는데, 중국은 평균적으로 1년에 태풍이 2번밖에 내습하지 않는 국가이다.

3. 재앙


7월부터 8월까지 양쯔강에서 극심한 홍수가 이어졌다. 7월 한 달 동안만 '''610 mm'''의 비가 내렸다. 그리고 양쯔 강에서 화이허에 이르는 홍수는 난징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문제는 난징이 당시 중국의 '''수도'''였다는 것이다. 도시는 한동안 섬처럼 고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익사하거나 티푸스, 콜레라 따위의 전염병으로 사망하여 그 수는 수백만을 헤아렸다. 이 와중에 여자들은 팔려가고, 먹을 것이 없자 식인이나 유아 살해까지 벌어졌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장시성, 충칭시, 한양구, 후난성, 후베이성 따위의 지역도 홍수의 영향으로 해를 입었다. 8월 19일에는 한커우에서 정상 수치를 '''16 m'''나 넘어선 수위가 측정되었는데, 이는 상하이 와이탄의 높이보다도 1.7 m나 높다. 8월 25일에는 대운하를 통과한 물이 가오유 호수의 제방을 파괴하는 바람에 잠자다가 익사한 사람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황하 역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사회, 경제,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7월부터 무려 11월까지 범람이 이어졌으며 2천만 에이커가 침수되었고, 100~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익사만 1백만 명 정도로 추측된다.

4. 여담


1931년 한반도에서는 기록적인 이상 저온으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 7월 월평균기온 역대 최저를 경신했다.[1] 우연의 일치로 2020년 들어 강한 힘을 가진 장마전선이 북상할 기미를 안 보이며 중국에 엄청난 홍수 피해가 발생했는데 한국에서는 이 때(7월에) 이상 저온이 발생하여 1931년과 비슷한 상황을 보였다.[2]

[1] 서울은 1954년 7월에 월평균기온이 더 낮았으나 1931년 7월도 기온이 매우 낮았다. 12일에는 그 덥다는 대구광역시조차 최고기온이 19 °C를 보여 20도에도 못 미쳤을 정도이다.(4월 수준이다. 당시 기준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4월 말 평년에 해당된다.)[2] 두 해 모두 전조가 있었는데, 4월에 이상 저온이 찾아 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1931년 4월이 평균기온에서 압도적으로 낮다. 서울의 1931년 4월 평균기온은 '''8.8 °C'''로 평년의 12.5 °C보다 4 °C가량 낮으며 역대 최하위 기온이다. 2020년 4월에도 서울 월평균기온이 11.1 °C를 기록하는 저온 현상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