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화교배척폭동

 


1. 배경
3. 폭동의 전개
3.1. 당시 일본측의 태도
3.2. 인천
3.3. 인천 이후
3.4. 평양화교 학살
4. 사건 이후
5. 학계논의
5.1. 음모론 논쟁
5.2. 인식문제


1. 배경


1927년 배화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많은 화교가 중국으로 귀환하지는 않은 듯 하다. 1928년 화교수가 이전보다 현격히 줄기는 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1]
1927년 화교배척폭동 이후 일본당국은 중국인 입국을 더욱 강하게 단속했다. 1931년, 대규모 폭동과 학살이 일어나기 전인 1931년 6월 '상해시보'에서 총독부으로 적극으로 벌이는 화교구축정책과 학교 박해사례를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 보도에선 인천, 조치원, 개성 같은 각지 사례를 거론하고 있다. 비자나 거주허가증이 없는 노동자는 불시로 체포와 강제출국하며 허가증 심사를 강화하고 불법 체류자에게 벌금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일이다. 이 법령은 1910년대에 이미 제정했으나 유명무실했던 것은 일본당국이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던 것이다. 허가증 심사나 체포와 검색과정에서 일어난 힐문과 인격적 모욕이 공분의 대상이 됐다. 무역과 성압활동이 위축되고 1927년에 폭동이 일어났으나 화교 노동자 입국은 오히려 급증했고 조선인 노동자 실업문제가 조선의 신문 지상에 보도됐다. 화교노동자 단속 강화는 곧 화교노동자가 들어오는 것과 그에 따른 노동시장에서 민족갈등이 높아진다는 것을 반증했다. 1930년에 화교인구는 6만을 넘어 7만에 가까워졌다. [2]
그리고 만주사변 전해인 1930년 일본제국내에 중국인 거류는 일본에 3만명, 조선에 7만명, 대만에 5만명으로 조선이 가장 많았다.[3]
1929년 3월 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 따르면 음력 5월이 끝날 무렵이며 인천부두는 중국에서온 노동자 무리에 파 묻히고 그 수가 많으면 선박마다 한번에 1천 2~3백에 달한다고 보도하면서 상륙하는 중국 노동자 사진을 실었다. 1929년 3월 28일 조선매일신문(朝鮮每日新聞)에서 중국 노동자 무리가 인천에 조수와 같이 밀려든다고 하며 3월 한달동안 인천에 상륙한 중국인 9,233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1929년 4월 1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중국인 노동자가 최근 급증해서 1,2월에는 약 3천명이 평균인데 3월에는 약 1만 명이나 되고 4월에는 더욱 늘어나 선박마다 7백~2천여 명에 가까운 중국인이 건너와서 당시까지 1만수천 명이 들어왔다고 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4]
1931년 5월~6월엔 경기도 일대에 화교노동자와 화교 농민 문제가 크게 떠올랐다. 인천(仁川), 철원(鐵原) 등지에서 경찰관서는 화교노동자와 화교농민에게 거주허가증을 발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속을 강화해서 구금, 벌금, 강제출국을 하였다. 경성의 중국총영사관은 이 사건을 "중화금공피압사건(中華禁工被壓事件)"이라 부르며 조선총독부 외사과에 강하게 항의하였다. 경기지역이 문제가 된 건 고향에서 계절성 노동자를 고용해서 채소농장을 대규모로 경영하는 산동화교가 많기 때문인데, 예로 산동성 출신 강문환(姜文煥)에 따르면 노동 노동자로 고용한 산동성 화교노동자 7명에게 취로허가증 발급을 요청하면서 전해인 1930년 말 귀국 시에 '수원경찰서에 허가증을 반납하면 봄에 입국할 때 돌려준다'고 해놓고는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중국인 노동자 단속은 1910년부터 명문화됐지만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엄격하게 규정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1931년이 되면 일본과 조선 모두 세계대공황 때문에 경기가 나빠져서 일자리가 줄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강문환이 그렇듯이 재한화교들은 상점이든 농장이든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중국에서 동향인을 데려와 썼다. 조선총독부의 처지에선 조선인이 일할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화교의 이런 닫힌 동향주의는 달갑지가 않았다.[5]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게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이다.

2.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3. 폭동의 전개



3.1. 당시 일본측의 태도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시데하라 기주로 당시 외무대신이 생각하기에 만보산 사건은 '우연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였다. 5월 31일 부터 6월 4일까지 일본 거류민은 일부 중국관헌에 탄압받는 사건이 있었다. 택시기사나 트럭기사가 폭행 당하거나 농장 제방수축을 방해받은 사건 같은 것들이다. 외무대신은 이것과 같은 맥락이라 해석했다. 외무대신이 심각하게 여긴 건 이런 사건들이 중국관헌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악화된 여론'을 억제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6] 당시 시데하라는 만보산 사건 때문에 1927년 화교배척폭동같은 사건이 재발할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중국 측의 구축 방침이 최근 더욱 노골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조선 내의 민심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일부 조선인 사이에는 조선 내 거주 중국인에 대해 보복적 수단으로 복수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자가 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1927년과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7]

그러면서 이렇게 나빠진 여론을 억제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8]
이런 생각은 조선총독부측과도 일치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는 "만보산 사건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뭔가 반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중국이 조선인을 "괴롭혔기 때문에 조금 당해도 이것은 자업자득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단속을 느슨히"했다. 그런 상태에서 신임 경무국장이 보안과장에게 인수인수 업무를 위해 출장올 것을 요구했다. 배화사건은 이 때 일어났다. 보안과장은 사건이 커진뒤에야 "엄중하게 단속"했다고 한다. [9]다나카 다케오는 사건이 커지지만 않았다면 그다지 엄중하게 단속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3.2. 인천


1931년 6월 당시 총독부는 일본 내각과 관계가 계속 나빠지던 중이었다. 총독은 17일 사임하고, 18일엔 정무총감, 26일에는 경무국장이 사임했다. 총독부의 주요한 국과장이 교체됐다. 총동, 정무총감, 경무국장들이 새 사람으로 교체됐다. 총감 7월 7일에 경성에 착임하고 총독은 14일이 부산상륙을 했다. [10] 7월 3일부터 평양에서 학살이 벌어진 7월 5일까지 총독부의 치안책임자인총독, 정무총감, 경무국장, 경무국 보안과장 등 조선총독부의 치안책임자는 모두 경성에 없었다. 1936년 당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경우와도 유사하다. 1936년 당시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신문을 전국에 뿌렸을 때도 총독은 물론이고 총독부의 고위 간부중 누구도 경성에 없었다. [11]
1931년 7월 3일 오전 1시, 인천에서는 폭우가 들이쳤다. 이때를 틈타 한국인 수십명이 인천 외리 지역에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발관과 요리점을 테러했다. 날이 밝아지자 사태는 더욱 커져 화교들은 다투며 중국인 거리로 몸을 피했다. 당시 아침 8시, 인천사무소(仁川分事務所) 주임 장문학(蔣文學)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폭동이 확산되는 걸 말려줄 것을 요청하며 총영사관에 사태발생을 보고하였다. 그 뒤 인천경찰서가 경계해서 잦아드나 했다. 그러나 당일 저녁 폭동에 참가한 한국인의 숫자는 3천명을 늘어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 인천 전 지역이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화교들은 영사관 내 화교 학교로 다투면서 피신하였다. 인천에서 3리 거리인 송림리에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유가게로 피난가기도 했다. 경찰병력 30여명이 이곳으로 파견돼 경계를 했다.
그런데도 한국인 200여명이 습격을 시도했다. 경찰은 방관했고 화교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8시 30분부터 파출소 앞에서 약 4천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중들은 화교가 있는 거리로 가[12] 화교상점에 돌을 던지고 화교를 구타하면서 행진했다. 행진하던 군중들은 인천부청 앞에서 군중 1천명과 합류한 뒤 화교마을을 습격했다. 3일 밤에도 군중들은 모여 거리로 나가[13] 화교의 가옥을 습격해서 건물과 기물을 파괴했다. 사태가 커지자 장문학은 상회주석(商會主席)과 함께 경찰서를 방문하여 무장경찰을 출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서장은 상부(道廳)의 명령을 받지 못했다면서 거절하였다.
4일 오전에 총영사(總領事) 장유성(張維城)은 인천사무소(仁川分事務所)쪽에서 긴급연락을 받고 오후 인천에 도착해서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경찰과 교섭했다. 경찰서장은 사태진압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총영사는 경성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사태는 다시 나빠졌고 저녁 9시경부터 외리 지역에선 각목·칼·도끼 따위 흉기를 든 한인 5천명이 모였다. 당시 시내에서 군중들한테서 포위당했던 화교들 수는 약 1,500명인데 이들중 중국가에 있는 인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찰한테 보호받지 못했다. 인천경찰서가 폭행자 검거와 시위세력 해산을 시도했지만 부족했다.
군중은 다른 곳[14]에 있는 화교가옥도 습격하러 갔다. 이 때 군중들은 광목을 가로수 사이에 메어서 기마순사가 오는 걸 차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뒤 외리파출소를 파괴하고 점령하였다. 그리고 전화와 전보선을 잘라 외부와 연락할 수단을 차단한 뒤 화교상점을 습격하고 약탈하고 테러를 벌였다. 오전 1시경 경성경관응원대가 현지에 도착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중은 화천군에 있는 곳(2013년 기준 도화동에 해당)으로 가서 화교가옥을 습격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오전 2시 전후에는 군중 100명이 한 동네로 가[15] 화교의 가옥을 습격했다. 중국식 빵집을 경영하던 연괴산(連魁山)은 이 동네에 피난을 와 있었는데 군중들은 연괴산(連魁山)을 죽여버렸다. 이준길(李俊吉)도 군중들에게 살해됐다. 5일 오전 1시까지 군중들은 화교 가옥 68동에 피해를 입혔다.[16]
당시 인천상황을 한 화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밤 10시. 내가 막 잠들려고 하는데 길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 절규가 너무 처참하여 차마 문을 열고 바라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은 이미 문앞으로 다가와 손에 칼, 몽둥이, 돌 등을 들고서 만나는 사람마다 두들겨 팼다. 질서가 크게 무너지고 길에는 조선인들만이 가득했다. 우리 華人은 감히 저항하지 못한 채 재빠르게 도망쳤으나 남녀노소 울부짖음이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여기저기 살려달라는 자가 있고, 아들을 찾고 어미를 찾는 절규가 있어, 곧 지옥세계와 다름없었다. 모두들 살고 싶어 했지만 누구도 돌봐줄 겨를이 없었다. 동서남북으로 뛰어 성 밖으로 죽어라 도망칠 뿐이었다. 하지만 원한을 품은 조선인의 함성이 뒤따르는데 그 형세가 호랑이와 이리같이 위협적이었다. 해가 뜰 때 무렵 시내에 그 많던 화인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17]

당시 인천 군중에서는 동포가 중국인에게 피살당했다는 이야기에 "별로 아무런 느낌도 없거나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이 가므로 따라갔을뿐"이라는 증언이 있다. 만보산 사건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군중심리"에 이끌려 군중에 참여했다.[18]
당시 경찰은 군중해산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한 증언에선 "인천 신정新町(1946년 이후 신포동 - 글쓴이)에 200~300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일제경찰의 해산명령이 있었으나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다."고 한다.(경찰이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직접 해산을 시도하진 않은 것). 군중이 돌을 던지고 있을 때는 "경찰관은 전연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경찰관은 칼을 뽑아들고 있었는가?"라는 일제경찰의 질문에 "못 보았다"는 증언이 있으며, "그대가 통행 중 군중에 대하여 경찰관이 해산을 명하고 있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못 들었다"고 답변한 증언이 있다.[19]
7월 2일 인천폭동에서는 붉은 색 바지에 녹색 웃옷을 입은 사람 1명이 폭동을 지휘했는데 경찰은 주위에서 방관만 하였다.[20]
인천분사무소는 다시한번 총영사관에 전보를 보냈고 總領事 張維城이 총독부당국과 교섭해 무장경찰과 헌병 17명이 5일 새벽 3시 인천에 도착해 질서를 유지하였다. 6일부터 상황은 어느정도 안정되었다. [21] 인천경찰은 1927년와 마찬가지로 1931년에도 치안활동에도 실패를 반복했다. 1931년 7월 3일 새벽 1시 인천에서 시작해서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데도 경기도경찰부에서 응원경찰이 도착한 건 3일 오후 4시 30분이고, 경찰이 무장을 한 것은 4일 오후 9시, 헌병이 경성에서 도착한 것은 5일 새벽 2시였다.[22]

3.3. 인천 이후


신의주에서는 6일 오후 9시 30분부터 군중 수백 명이 화교거주지를 습격했고 7일에도 채소밭에 있던 화교를 습격했다. 오후 11시에는 압록강의 한 섬에서 60여 명의 조선사람 군중이 화교노동자의 가옥을 습격했고 화교 1명을 살해했다.[23]
7월 4일에는 개성, 대전, 군산, 공주에서 5일에는 원산에서 6일에는 재령, 진남포, 사리원, 해주에서, 7일에는 목포, 의주에서 8일에는 부산에서 화교를 배척하는 테러가 벌어졌다.[24]
경성 3일 오후 5시에 종로 탐동공원뒷길목에서 권오봉이란 청년은 재만조선 동포에 대한 신문호외를 들고 있었다. 때마침 초홍전이란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권오봉은 그 사람에게 신문호외를 보여주고 그 사람을 구타했다. 이런 사고는 4일 오전까지 12건이 넘게 일어났다. 서소문정, 관수동 같은 중국인거리에도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크게 번지지 않았다.[25] 4일 오후 8시경 광희문 신당리 에 있는 등정 농장에서 일을 하는 중국인 70명이 조선인 약 백명(대개 노동자)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중국인 가옥들도 파괴되어있었다. 중국인들은 저항을 위해 곤봉과 칼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 한 중국인이 조선인 하나의 머리를 후려쳐서 부상을 입히자 조선인 군중들을 더욱 격분했다. 동대문서장과 그 밑의 동대문쪽 경찰근무원 다수와 경찰부응원경관대는 현장으로 달려가서 해산을 시켰다. 중국인들은 장충상 뒷산을 넘어 피난하였다.[26]
경성에 있는 조선청년총동맹은 재만동포 위해(危害) 문제에 대한 항의문을 중국 국민정부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냈고 총동맹의 세포단체인 청년동맹들에게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키도록 지령을 발송했다. [27]
강원도 영월에서는 좌경 청년들이 도처마다 선전활동을 하고 화교를 배척하는 폭동을 벌였다. 해당지역 경찰서에서는 주야로 진압하고 화교를 보호했다. 원주에서는 7월 20일, 조선청년단이 화교를 무력을 써서 쫒아내는 일이 일어났다.[28]
조치원에서도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에서 조치를 하여 청년 20여명을 체포했다. 춘천에서는 7월 6일 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해서 중국인 떡집과 잡화점을 테러했다. 같은 날 양주에서는 회천면 덕정시장에서 중국 요리점에 테러를 벌이고 중국인을 구타했다. 덕정주재소 순경은 봉양리 청년 15명을 검거했다. 사리원에서 5일 저녁 10시 경 청년 노동자 수백여명이 곤봉과 돌맹이를 들고 모여들어서 중국사람이 경영하는 요리점 동승루를 포위하고 전선을 절단해서 전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뒤 가게를 습격하고 가구를 파괴했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3-4곳의 요리집과 10여 곳의 포목상, 야채상을 습격해서 테러를 벌였다. 이리의 지경(地境)에서도 5일 밤 9시경 청년 수십명이 모여서 중국인 빵집을 테러했다. [29]
평남 안주에서는 4일 오후4시에 매일신보 지국에서 임시 의장 이선욱이 사회를 보며 장춘현 삼성보 동포구축 문제에 대한 시위 행렬에 관련된 구체안을 결의했다. 그리고 6일 밤 안주에서는 읍내 중국상점을 습격하여 유리창과 간판을 파괴하는 테러가 벌어졌다가 경계하던 경관이 제지하자 해산했다. [30]
경성은 인천 평양보다는 빨리 대처했다. 7월 4일 새벽부터 배화폭동이 일어나자마자 군중들은 왕십리 방면으로 몰려갔다. 하왕십리 소재 화교 15명이 연화공장에 피난와 있던 상태였는데 그 곳을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순사는 이미 그곳에 잠복해 있었다. 6일 서대문경찰서에서는 서소문통과 태평통을, 수표정파출소에서는 관수동을 일대를 중심으로 시내에 흩어져있는 화교삼정에 한명씩 경관을 철야교대하며 경계했다. [31]
1931년 화교배척폭동 당시 일본 경찰이 사전에 준비하고 질서를 유지한 곳에서는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나지않거나 일어나더라도 규모가 작았다. 예로 남쪽 지역은 1927년 화교배척 테러가 격렬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경찰은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초기에 진압하여 큰 충돌이 없게 했다. 대전 같은 충남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일본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중국상인도 미리 대책을 강구해서 대체로 평정을 이어갔다. 충남 선장(仙掌)은 조선인과 화교 사이에 친선의 정이 두터워 더욱 평온했다. 전북 고창도 1927년에는 격렬한 테러와 폭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1931년에는 경찰서장이 특별히 보호해서 별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북부지방은 시위와 화교에 대한 테러가 징후가 있는데도 경찰은 대응이 미숙했고 질질 끌었다. 북부지방에서 드문 경우는 평북 厚昌인데 화교가 1,500명 있었으나 경찰서장이 명령을 내려 실탄을 장전하여 화교를 보호하자 역시 별일은 없었다. 경찰 뿐만 아니라 지역 청년단체같은 사회단체가 사태를 진정시키거나 화교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밀양에서는 청년동맹 같은 기타 사회단체와 중국인 대표가 서로 양쪽 민족을 보호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산에서도 한중간에 일이 터지기전에 마산 노동연맹에서 방지책을 위해 방지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32]
일제치안당국은 화교 피해가 대규모로 커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인천에서는 배화사건이 일어난지 이틀이 지난 5일 오전 1경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경관대가 도착해서 사건 관련자 40여명을 체포했다. 경성에서는 화교배척 문제로 체포된 조선인이 7월 5일까지 300여 명이다. 평양에서는 사건 발생 이틀 뒤 6일부터가 되어서야 무장경찰이 투입됐다. 평양 경찰서의 경찰과 헌병 70명, 소방대원 약 200명을 동원했고 조선인 57명을 체포했다. 7일까지 체포된 사람은 28명이다. 11일에는 평양경찰서 경관 300명이 호별로 수사를 하며 사건관련자를 체포했다. [33] 13일까지 전국적으로 체포된 인원은 1,840여명에 달했다. [34] 하지만 이미 평양에서는 대규모학살이 벌어진 뒤였다.

3.4. 평양화교 학살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4. 사건 이후


이 사건 이후 수많은 화교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특히 동북지방정권은 귀국한 화교를 적극 수용했다. 1931년 화교배척 당시 많은 화교들은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귀국하였는데 대부분은 조선과 가장 가까운 요녕성을 골랐다.
조선에 인접한 안둥현(安東縣)[35]에서는 화교배척이 일어난 뒤 7월 7일까지 귀국한 화교가 2,000여명에 달했고, 7월 10일까지 3,700여명이 도착하였다. 동북지방정부는 이미 귀국한 화교들을 수용했고, 앞으로 귀국할 인원을 대비해 압록강에서 선박으로 화교를 인도하게 하였다. 7월 10일까지 안동현의 각 여관과 가옥에 거주하게 된 화교는 모두 3,000여명이었고 7월말까지는 9,000여명에 이렀다. 화교들에게 식료품도 제공하였고 당시는 여름철이라 전염병을 막기 위해 의료서비스도 제공하였다. 피난한 화교들 중에 고향으로 돌아기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는 귀향 경비도 지급했다. 조선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화교들이 있으면 동북정부가 직접 일본과 교섭을 맡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특별기부금을 모금해 화교들에게 나누어주었다.[36]
이렇게 1931년의 대규모 배화폭동 이후 수많은 화교 난민들은 당시 봉천군벌의 지도자였던 장쉐량 측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얼마 안가 만주사변까지 발생하자 분노한 장쉐량의 군대는 수많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약탈을 실행하였다. 당시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선총독부 관방외사과로 보낸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재만조선인들이 입은 피해 규모는 사건 이후부터 7개월 동안 살상, 약탈 등은 2,500여 건에 달하였고, 학살당한 사건만 193건이나 되었다.
반면 일본 조선군사령부 측의 자료에 의하며, 1931년 10월 말까지 조선인 피해의 장소와 시간이 밝혀진 사건만, 학살 323건, 능욕 50건, 소실가옥 300건, 약탈호수 약 2,000건에 달하였고, 확실하지만 조사 중인 사건이 학살 180건, 능욕 100건, 소실가옥 500건, 약탈호수 1,000건을 헤아렸으며, 이외에 조사가 불가능한 오지 방면의 피해 수는 이보다 배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 보도된 피해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보다 더 심하였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1년 9월 20일부터 1932년 1월 9일까지 재만조선인의 피해 상황은 사망 843명, 행방불명 807명, 부상 362명, 납치 110명, 금품강탈 36건, 구타 13명, 강간 6명 등이었다.[37] #

5. 학계논의



5.1. 음모론 논쟁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부에선 이것이 일본의 사주라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책임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가 체험한 것으로 몇 가지 활례를 들어보겠다. 그 하나는 만주의 만보산 사건이며, 그 둘은 동경 대진재 사건인데, 그것은 모두가 터무니없는 일종의 낭설을 전포시킴으로써, 한․중이나 한․일 간에 정략적인 유혈극을 연출케 한 일본군벌의 조작극이었다.』[38]

『동포의 수난 원인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친일분자를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 (중략) 망국근성의 소유자인 매족도배가 일정의 앞잡이로 가서 가위 경쟁적으로 중국인의 권익을 침해하였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만주사변의 서곡이었던 만보산 사건의 준비공작이었다.』[39]

이런 경우는 한두 사례가 아니다. [40]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있다.
예로 일본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가설에 반박이 있다.
이사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관동군 참모부군에서는 '만몽영유계획' 골격을 이미 1931년 6월에 갖춘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보산 충돌 음모 → 만주사변 이라는 음모가설은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이 부족한 비약이란 지적이다. 그렇기에 손승희 교수는 다음같은 지적을 한다.

이시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한 관동군 참모부의 '만몽영유계획'은 1931년 6월 골격이 이미 갖춰져 있었고 만주국 1년 예산안도 관동군에 의해 이미 완비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본다면 만주사변의 주동적 원인을 만보산사건과 같은 우연적 사건에 찾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41]

상호 인과관계의 정합성을 밝히지 못한 채 논리적 비약으로 귀결된다면 만주사변의 원인(遠因) 혹은 근인(近因)으로서의 만보산사건은 성립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럴 경우 만보산사건과 같은 충돌은 당시 만주에서의 일상적 사건이 우연히 확대된 것에 불과하고 만주사변의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42]

그 밖의 사건의 원인을 음모론으로 보는 것에도 비판이나 반대의견들이 있다.

『화교배격사건의 원인을 일단 한국인의 화교배척감정(華僑排斥感情)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민족성 문제는 韓·中間을 이간질 시키려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것이고,이는 과거 개화파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중국인 멸시관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이 민족성 문제가 화교배격사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으나,직접적인 관련은 없기 때문』[43]

『이러한 일본의 책동설은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그것이 다 사실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일본의 대륙 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이 각본처럼 연결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책동설의 근거가 부족하고 만보산 사건에서 만주사변 에 이르는 연쇄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44]

『일본의 책임은 확인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사주’ 혹은 ‘음모’를 사건의 주된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항일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고 하거나, 오보를 양산하고 식민지조선인을 사주하여 눈엣가시인 화교를 축출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서 배화폭동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더라도 1931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화교학살 폭동에 대해 한국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역사적 책임감과 그에 따른 엄중한 반성의 당위성까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45]

오히려 지구사로 따지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였다. 딱히 '제국의 인위적인 음모'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1927년의 배화폭동을 계기로 인적 교류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특히 중국노동자에 대한 단속문제가 한중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미 일본에서는 조선에 한 발 앞서,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경쟁, 관동대지진 때의 중국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 과정은 넒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학살과 1903년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금지령의 전개와 흡사하다. 즉, 공업화 정도에 따라 해외노동력이 유입될, 그리고 그를 흡수할 수요가 발생하기까지의 시간이 틀리기 때문에, 시차를 두면서 유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가 미국의 경우 19세기 중․후반이었다면, 일본은 제1차 대전 호황기의 1910년대로 볼 수 있다. 외국노동자가 자국사회에 충격을 줄만한 규모로 유입되면, 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논리와는 별도로 사회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의 경우 그 시기는 1930년대였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단초가 나타나고 있었다』[46]

김준현은

‘만보산 사태’를 획책한 배후로 일본을 지목한 상태에서는, 다른 갈등주체들의 능동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성도 내재해 있다.

는 점을 지적했다.[47]

5.2. 인식문제


만보산 사건은 화교배척폭동과 성격이 다른데도 이둘을 묶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이미 비판이 나온 상태이다.

『만보산사건 연구물들을 보면, 만주를 매개로 형성된 동북아 각 민족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민족관계들을 포괄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한↔중 또는 중 ↔일 양자 차원의 상호인식이나 쌍방관계에만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 연구들은 표면상 연계되어 있지만 발생지역이 다르고 별도의 발생요인들까지 내포하고있던 만보산사건과 조선화교배척사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설명함으로 써 두 사건의 차별성을 간과해버리고 있다.』[48]

학자들은 이점을 지적한다.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는 입을 모아 그 학살의 대상에 갓난아이도 포함될 정도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배화 사건’은 조선인의 손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이민족에 대한 증오 공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기억은 ‘만보산 사건’의 기억보다 더욱 마음 편히 접근하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배화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억압되어 있었다. ‘배화 사건’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는 한국문학사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찾기 힘들며, 전국적 규모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이만큼 문학적 형상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9]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그러나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현 시점이야말로 ‘배화 사건’을 불러내어 그 의미와 파장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 일 것이다.』[50]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배경

1927년 화교배척폭동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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