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조 요구

 

1. 개요
2. 전개
2.1. 요구내용
2.2. 중국정부의 대처
3. 결과
4. 여담


1. 개요


일본 제국제1차 세계 대전위안스카이북양정부에 제출한 21개조의 강압적 요구사항.

2. 전개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협상국으로 참전하고, 독일 제국이 조차하고 있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반도 일대를 공격, 점령한 후 산둥성의 독일 이권을 접수하였다.
1차 대전중 일본군 산둥성 침공로
[image]
녹색: 중립지대, 황색: 영국 조차지, 자주색: 독일 조차지, 화살표: 일본군 진격로

2.1. 요구내용


1915년 1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5호 21개조의 요구를 하게 되는데,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호는 산둥권익에 대한 내용으로, 독일이 산둥에서 갖고있던 모든 영토와 권익을 물려받고 산둥성과 그 주변 해역을 남에게 넘기지 않으며 산둥에서 제남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윤허하고 산둥성의 주요 항구를 일본의 허락 없이 개항하지 않는다.
2호는 남만주와 동몽골에 대한 조항이며 여순, 대련과 남만주, 안봉, 길장철도를 99년간 조차, 임대하고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위해 토지를 제공하며 광산채굴권을 허여한다. 또 일본의 허락 없이 타국에 철도부설권을 넘기지 않으며 차관을 들이지 않는다. 필요할 경우 정치,재정,군사에 대해 일본의 고문과 협의해야 한다.

3호는 한야평공사[1]의 합판에 대한 내용이며, 한야평공사를 양국의 합판 형식으로 운영하며 일본의 허락없이 권리와 재산을 처분하지 않으며 동공사의 승인없이 한야평공사의 관할에 속하는 광산을 채굴하지 않는다.
4호는 타국에게 중국 연안의 항만 및 도시를 빌려주거나, 떼어주지 않는다.
5호는 권고사항이며
중국 정부의 정치, 재정, 군사에 일본인을 고문으로 초빙하며 경찰에 일본인을 배치하고 일본과 합작병기창을 설립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으며 중국남부의 철도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복건성의 철도, 광산, 항만의 설비에 필요한 자본을 필요로 할때 일본과 협의한다 등이다.[2]
즉, 일본은 서구열강이 서로 박터지게 싸우느라 중국에 눈돌릴 경황이 없는 틈을 타 배짱 좋게 21개조를 내밀어 '''중국을 통채로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2.2. 중국정부의 대처


1915년 1월 18일에 가토 외상이 중화민국 외교총장 루정샹에게 21개조를 제출했는데, 조항 하나하나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들어줄 경우 중국은 일본의 보호국 내지 식민지가 될 상황이었다. 북양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요구 내용을 외부에 흘려 열강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이게 먹혀서 미국, 영국 등이 크게 반발하며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은 경과를 지켜보다가 5월 7일 5호 항목을 뺀 나머지 조항을 중국 정부가 수락하던지 아니면 전쟁을 할건지 고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당시 북양정부의 수장이었던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서구열강이 전쟁 중이라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중국이 아직 일본에 맞설 힘이 부족하다 여겼기에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틀 뒤인 5월 9일에 이 요구를 승낙하고야 말았다. 국민들은 이 날을 국치기념일로 정하고 중국정부를 비난하며 일본상품의 불매운동을 벌였다. 또한 21개조 요구는 훗날 5.4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3. 파리평화회의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전승국 21개국이 모여 전후의 처리를 놓고 평화회의를 하게 되는데, 중국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승전국 입장에서 중국 내에 설치된 열강의 조차지를 포기 및 반환하며, 관세자주권을 승인하고 일본이 전쟁 중 빼앗은 영토와 권익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 등 열강의 중국에 대한 권리의 포기와 21개조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한 달여만에 참전해 독일을 산둥 반도에서 축출하는 전공이라도 있던 일본에 비해 전쟁이 다 끝날 무렵에 비전투병만을 파견해 전과가 미미했던 중국의 발언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일본을 밀어주기로 비밀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전쟁의 지분과 영프의 암묵적 지지를 앞세운 일본의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었고 중국의 요구는 거부되었다.[3]
[image]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주요 전승국 정상.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3. 결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의 민중들이 분노하여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고, 이게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대되자 결국 중국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의 조인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날로 폭주하던 일본의 침략야욕을 어느 열강보다 경계하던 미국은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여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고,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산둥성의 옛 독일의 권익을 돌려주는 등 21개조의 대부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23년 직예군벌의 수령 차오쿤은 영미의 지지와 민심을 확보하기 위해 21개조 요구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4. 여담


오랫동안 21개조 요구에 대해서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위해서 일본 제국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일본과 야합했다는 설명이 지배적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나름 저항했다는 것이 발굴되면서 처음엔 저항했지만, 안될 것 같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제 즉위를 받기 위해서 일본과 밀약을 맺었다...라는 식으로들 논지는 유지해서 설명했는데 근래에는 쑨원이 위안스카이를 음해하기 위해 살포한 날조라는 설이 정설이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반응은 매우 격앙된 것이었으며, 일본인 군사고문 반자이 리히치로를 소환해 일본은 중국을 우호국이 아니라 식민지로 여기고 있다고 격렬히 항의하고, 법률고문 아리가 나가오를 일본에 파견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차오루린 등 국내의 친일 인맥들을 총동원하고, 자신이 직접 외교부 회의에 매일 출석하여 관련보고를 받으며 루정샹, 구웨이쥔 등 친영미 외교관들을 통해서 미국과 영국에 하소연하는 등 전쟁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뭣보다도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오쿠마 내각은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대하던 정권으로,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하자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일본의 군사지원이 절실해서 21개조 요구에도 닥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서 좀 심하지 않냐고 한마디 할 정도로 막나가던 판이었다.
Ernest Young은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한 이유를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정도이며 Shan은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스카이가 터무니없는 음해를 당했다고 결론 내린다. 정작 위안스카이의 저항은 속임수에 불과하며 황제가 되기 위해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던 쑨원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 만주를 줄 테니 지원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1] 당시 중국 최대의 철강기업.[2] 자세한 조항 내용은 위키백과 참조바람[3] 조르주 클레망소는 중국 측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당신들도 베트만홀베크가 되고 싶느냐?"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