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다카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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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4대 내각총리대신
가토 다카아키
加藤高明 | Katō Takaaki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60년 1월 25일
오와리국 카이토군 사야정
(現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사망'''
1926년 1월 28일 (향년 66세)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재임기간'''
제24대 내각총리대신
1924년 6월 11일 ~ 1926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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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가족'''
'''이와사키 야타로''' (장인)
이와사키 키세 (장모)
가토 하루지 (아내)[4]
시데하라 기주로 (동서)
'''학력'''
구제 도쿄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약력'''
미쓰비시 부사장
오쿠마 시게노부 비서관
주영국 일본전권공사
제15·18·25·27대 외무대신
초대 입헌동지회 총리
귀족원 의원
초대 헌정회 총재
제24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3. 외교관 및 정치인 생활
2.4. 내각총리대신 취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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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정치인, 외교관, 일본의 제2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재산과 관계 없이 25세 이상 성인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했으나,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숨통을 끊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가토 다카아키는 오와리 번[1]하급 무사 집안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지만, 곧 외가 쪽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1년 7월에 (구제) 도쿄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의 신제 도쿄대학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2.2. 미쓰비시 생활


그런데 그는 그 당시 엘리트들이 통상적으로 밟는 관료의 길로 가지 않고, 민간회사인 미쓰비시에 취직하고 영국지사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886년에 귀국한 뒤로 미츠비시의 부사장에 취임하여[2], 기업인으로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2.3. 외교관 및 정치인 생활


1887년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의 비서관으로 이직을 했고, 이후 6년이나 주(駐)영국 일본공사를 맡았으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친영파가 되었는데, 단순히 친영 정도가 아니라 영빠 수준으로 영국의 의회정치제도를 흠모했음은 물론, 영일동맹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 깽판쳐도 좋다는 사고를 고수하여 후일 러일동맹, 불일동맹, 중일, 미일 우호관계 설립을 요구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격렬한 마찰을 빚게 된다. 1900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제4차 내각 하에서 외무대신(1900년 ~ 1901년)을 맡고 외교관으로서 승승장구했으며 생애 4차례나 외무대신을 맡았다. 영빠답게 외교도 영국식으로 원로와 군부의 간섭없는 외교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외무성이 독립적인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원로들의 간섭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것까진 좋은데 그렇게 얻은 독립성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친게 문제....
1911년에는 2차 사이온지 내각, 1913년에는 3차 가쓰라 다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했으며, 가쓰라 다로야당인 '입헌동지회(立憲同志会)'의 창당에 참여했고, 가쓰라가 죽은 후 입헌동지회 총리가 된다. 1914년에는 제2차 오쿠마 내각의 외무대신(1914년 ~ 1915년)을 맡으면서 캘리포니아의 일본인 이민 문제로 불거진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에 있어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기존의 야마모토 내각의 정책을 연약외교라고 비판, 기존 미일합의를 파기해버리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고, 일본 제국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도하여 칭다오, 남양군도 등 독일 식민지들을 공격적으로 점령하여 영국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후 1915년, 악명높은 21개조 요구를 중국에 제출하여 이중 16개조를 받아냈다. 영미 등 열강의 경계를 사게 되었으며 야마가타 등의 원로들에게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최후통첩 같은 무식한 방식을 동원해서 괜히 반일감정을 키웠다."라고 욕을 처먹게 됐다. 이미 1898년에 확립된 원로회람제도를 폐지해서 원로들의 외교문서 열람권을 없애버리고, 세계대전 참전, 러일동맹 수립, 런던선언 가입 건에서 사사건건 원로들과 각을 세우던 가토에 대한 원로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여 이노우에 가오루,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이 모두 가토의 경질을 요구하며 오쿠마에게 가토를 쫓아내지 않으면 오쿠마 내각을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1915년 7월, 내무대신 오우라가 12대 총선에서 뇌물을 뿌린 것이 걸리자 원로들이 엄청나게 열받은 것을 눈치챈 가토는 그 핑계로 동반사퇴했다. 이후 외무대신직은 오쿠마 총리가 겸임하다가, 10월에 주불 일본공사 이시이 기쿠지로가 취임하였다.
해를 넘겨 1916년, 오쿠마는 퇴임하면서 가토를 후임 총리대신으로 천거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덴 겐지로 등 원로들은 입을 모아서 이를 무정견 그 자체로 맹비난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신임 총리로 천거했다. 결국 가토는 데라우치에게 연정을 제시하며 데라우치 내각에서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데라우치는 거국내각을 고집하는 한편, 고토 심페이 등 반 가토 인사들을 대거 중용하면서 명백히 가토를 물먹이는 인사를 강행했고 결국 가토와 데라우치의 연정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후 가토는 외무대신 퇴임 이후 야마가타가 살아있는 동안은 공직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10년 동안 재야 생활을 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도 영국통인 가토가 단장으로 고려되었지만, 야마가타의 반대에 프랑스통인 사이온지(프랑스 소르본대학 유학 경험이 있다.)를 단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2.4. 내각총리대신 취임


[image]
24대 총리 취임 후
가토 다카아키는 1924년 6월 11일부터 1926년 1월 30일까지 599일간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선거공약이었던 '25세 이상 성인 남성에게 재산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의 실시'를 위해서 '보통선거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최초로 개설하기 위한 조약인 약칭 '일소기본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일본 내 식량 부족현상이 이어지는 터라 전국적으로 쌀 소동이 이어졌는데,[3] 가토 다카아키는 쌀 소동의 모든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떠넘기고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가 중심이 된 사회운동(노동운동, 무정부운동 등)도 절멸시키려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끝나 버렸다. 1925년 11월, 중국에서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처음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궈쑹링이 일본의 특수권익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시라카와 요시노리 관동군 사령관에게 지시하여 반봉사건 진압에 협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1월 22일일본제국 의사당에서 폐렴이 악화되어 쓰러졌고, 6일 뒤인 1월 28일에 66세를 끝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후부터 이틀간 와카쓰키 레이지로 당시 내무대신이 권한대행하다가 1월 30일에 총리직을 승계하였다. 이후 다이쇼 덴노가 붕어하고 쇼와 덴노가 즉위하여 와카쓰키 총리는 다이쇼 시대쇼와 시대의 연결자가 되었다.

3. 여담


최초의 도쿄대학 출신 내각총리대신이라고 한다.
44대 총리대신이었던 시데하라 기주로와는 동서지간이다.

[1] 오와리 번은 현재의 나고야시 일원이다. 여담으로 전국시대오다 노부나가가 활약하던 그 동네가 맞다.[2] 이무렵 미쓰비시 재벌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장녀와 결혼을 한다.[3] 같은 시기에 일본 제국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바탕으로 수확한 을 남김없이 일본으로 보내는 바람에 조선 사람들은 굶주리고 더 나아가 아사하는 경우도 속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