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년 경주 지진

 

779년 경주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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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시
(UTC)


779년 3월경 (혜공왕 15년)
진앙
북위 35.8도, 동경 129.2도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선두1길[1]
진원의 깊이
불명
규모
(추정)

'''M6.3''' (NOAA)
'''M6.7''' (KMA)
'''M7.0''' (손문 부산대 교수)
최대 진도
(메르칼리, 추정)

VIII (NOAA)
IX (KMA)
(일본 진도 적용시)
'''6강'''(경주)
피해상황
(추정)

사망자
100명 이상
부상자
불명
재산피해
많은 가옥이 무너짐
1. 개요
2. 기록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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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79년 경주 지진'''은 779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한국의 역사지진(CE 2~1904) 중에서, 세번째로 강력했던 지진이자 내륙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다. 추정규모는 M6.3~M7.0 급이다.
진앙지로 추정되는 위치는 북위 35.8도, 동경 129.2도인데, 이 위치는 2016년 경주 지진으로부터 '''매우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 한다. 전진이 북위 35.76도, 동경 129.19도였고 본진 북위 35.77, 동경 129.18도였으니...

2. 기록


때는 신라 중기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당시에 발생했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휘둘려 다니던 혜공왕은 덩달아 터지던 각종 반란과 자연재해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재해가 바로 지진이었다.

혜공왕 3년[2]

여름 6월, 지진이 났다.

4년[3]

여름 6월, 지진이 났는데 그 소리가 벼락 소리 같았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다.

6년[4]

겨울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13년[5]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여름 4월, 지진이 다시 발생하였다.

'''《삼국사기》제9권 신라본기 제9 혜공왕'''

혜공왕의 선대왕인 경덕왕이 사망하던 765년 4월에도 지진이 발생했다는 걸 감안하면 765년부터 약 12년간 6차례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밖에 호랑이가 궁에 들어온다던지, 황룡사로 큰 별이 떨어졌다던지, 각종 기이한 일들과 함께 지진이 굉장히 자주 발생한 기록이 드러난다. 특히 정치적으로도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었는데, 777년 3월과 4월에 연이어 지진이 발생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良相)이 왕에게 "정치를 똑바로 하십시오!"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러다 혜공왕 15년인 779년에 수도 경주에 큰 지진이 발생하게 된다.

15년 봄 3월, 경도(京都)[6]

에 지진이 있어 민옥(民屋)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十五年 春三月 京都地震 壞民屋 死者百餘人(십오년 춘삼월 경도지진 괴민옥 사자백여인)

'''《삼국사기》 제9권 신라본기 제9 혜공왕'''

100여명이 죽었다는 피해자 수까지 명시될 정도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이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지진기록 중, 몇 안되는 지진 피해 사상자 기록이다.[7]
한편 혜공왕은 지진이 벌어진 달에 백좌법회[8]를 열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혼란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서 열은 건지는 알 수가 없다.

3. 관련 문서





[1] 舊.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1931-173 부근[2] 서기 767년[3] 서기 768년[4] 서기 770년[5] 서기 777년[6] 수도 경주시를 말한다.[7]삼국사기》, 《고려사》 등을 뒤져봐도 몇 개 되지 않으며, 이 지진 말고도 사상자 기록이 있는 지진으로는 1643년 6월 9일 터진 진주 지진을 들 수 있는데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따지면, 사망자 2명이 발생했다.[8] 부처가 앉는 자리인 사자좌 100개를 준비한 후 고승 100명을 초대해 설법하는 대규모 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