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1. 개요
신라의 제37대 국왕.[4] 《삼국사기》의 구분에 따르면 신라 하대를 연 임금.
명칭이 비슷해서 제27대 선덕여왕과 헷갈리기 쉬운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원래 선덕여왕은 따로 여(女) 자가 들어가지 않는 선덕왕이라 불렸는데 먼저 집권했음에도 그 쪽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5] . 선덕왕 때부터 내물왕계 왕통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해 나간다.[6]
2. 출신과 가족
내물 마립간의 10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효방(金孝芳)이고 할아버지는 김원훈(金元訓)이다.[7]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8][9] 으로, 따라서 선덕왕은 효성왕과 경덕왕의 외조카이며 혜공왕의 고종사촌 형[10] 이다. 그러므로 선덕왕은 자신을 내물 마립간의 후손으로 내세웠으나 어머니가 태종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라서 모계 쪽으로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이었기에 무열왕계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덕왕은 5묘를 모실 때 외조부인 성덕왕을 함께 모시기도 했다.
선덕왕의 왕비인 구족부인(具足夫人)[11] 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기록마다 다른데 삼국사기에서 각간 양품(良品)의 딸 혹은 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각간 낭품(狼品)의 딸이라고 다르게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름인 양품과 삼국유사에서 기록된 이름인 낭품이 이름 표기가 음운이 유사해서 동일인이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는 의공 쪽의 관등이 6두품 진급 상한인 아찬에 걸려있기 때문에 구족부인은 진골로서 양품/낭품의 딸이고 후궁은 6두품으로서 의공의 딸로 본다.
3. 생애
왕위에 오르기 전 김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경덕왕 재위 기간인 764년 정월에 이찬 만종이 상대등, 이후 선덕왕에 오를 아찬 김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 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12]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 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이후 왕위에 오르는 원성왕과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지속적으로 올랐던 점으로 봤을 때는 전제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 세력의 득세라 보기는 어렵고 당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과 일본과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71년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 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감찰 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으로 선덕왕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12년에 경덕왕 시절 한화된 관제의 복구 작업을 주관하였다. 혜공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그나마 당시 혜공왕과 가장 가까운 인척은 김양상 뿐이었다는 사실과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김양상은 후대 시중의 지위에 오른 김주원과 함께 중립적인 범왕당파 세력으로 혜공왕을 도와 정책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에 따르면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였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김양상이 4월에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선덕왕이 혜공왕과 왕비를 시해한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면 그의 즉위가 태종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다.[13] 그가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고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덕왕은 뒷날 조선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잠시 즉위한 정종과 비슷한 바지사장 위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을 정도. 그런 기록을 통해 보면 신라의 왕위 계승 서열상 태종 무열왕계의 방계인 김주원보다는 성덕왕의 외손인 김양상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김양상이 김경신과 함께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김양상이 중립적인 성향의 범왕당파로서 혜공왕을 도와 정책을 펼쳤다가 자신의 군주가 시해당하는 사변 속에서 김경신 및 귀족들의 강압적인 추대로 인해 즉위한 것으로 볼 여지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난은 김양상이 아닌 김경신을 노린 난이었으며 이 때 김경신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김지정을 포함한 반란 세력을 평정한 뒤 혜공왕을 포함한 왕의 일가를 아예 쓸어버리고 범왕당파였던 김양상을 강제로 왕위에 올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선덕왕 사후 즉위한 원성왕이 선덕왕의 아내를 태후로서 예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하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의 아내가 사실상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다.
혜공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이찬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시점에 이미 사망했던 아버지를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선덕왕의 치적은 2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에 대한 개편이다. 780년에 어룡성(경덕왕 때인 752년에 설치한 왕 주변 관리를 관할하는 관청)에 둔 봉어(차관급)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14] 개척인데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산주(오늘날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783년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 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승하하니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선덕왕의 아버지인 김효방이 732년 9월~733년 정월에 당나라에서 숙위 중 사망했으므로 늦게 잡아도 7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사망 당시에는 최소 50대 중반으로 즉위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재위 기간이 짧은 것이다. 후사가 없는 가운데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승하하여 그의 사후 김복호의 후손인 김경신과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 사이에 차기 왕위를 놓고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5년 4월에 왕위에서 물러나려 했으며 6년 정월에 병에 걸리고 내린 조서에서는 왕위를 물러나고자 했던 의사 표현과 곧 죽을 것에 대한 내용 및 자신을 화장해 줄 것을 드러낸 점'에서 태종 무열왕계의 김주원을 후계로 삼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선덕왕 사후 처음에는 김주원이 의논되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원성왕의 즉위는 김주원에게 돌아갈 왕위를 상대등이였던 김경신이 자신의 세력으로 억누르고 즉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덕왕 사후 때마침 비가 내려서 강물이 불어났고 이로 인하여서 김주원이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김경신을 즉위시키니 비가 그쳤다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많은 사건을 함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이야기에서 선덕왕이 생사기로에 있을 때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김주원이 집에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의문점을 던진다.
한편 원성왕은 태종 무열왕 사후 지속된 왕위 계승자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방계 출신이다.[15] 즉 제2왕통의 시작, 진정한 신라 하대의 포문을 연 군주는 선덕왕보다는 원성왕부터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 왕의 부모를 추존하고 처를 왕비로 삼다
一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의공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 어룡성 봉어를 경으로 고쳤다가 다시 감으로 고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秋七月 사자를 보내 주와 군을 위로하다
三年春閏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옮기다'''
三年秋七月 시림 벌판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四年春一月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삼다
四年春一月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리다
五年夏四月 왕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하다
六年春一月 당에서 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 왕이 병이 낫지 않자 유조를 내리다
一年春一月十三日 선덕왕이 죽다
삼국사기 9권은 효성왕부터 시작하여 선덕왕에서 끝난다.
[1] 이미 성덕대왕신종(771년)엔 각간 관등을 가진게 확인되는데 삼국사기엔 이찬 관등만 보인다.[2] 혜공왕때 반란을 일으킨 대공을 《삼국사기》는 '일길찬'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는 '각간'이라고 표시하며, 이후 전국에서 96각간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기록 을 생각해보면 '角干'이라는 명칭은 '干'이라는 관등을 가진 귀족들을 아우르는 명칭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보면 정식 관등은 '이찬'일 것이다.[771년] A B 성덕대왕 신종 기록. 檢校使肅政臺令 兼 修城府令 檢校感恩寺使 角干[3] 어머니인 사소부인이 704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에 맞추어 대강의 출생연도를 추정함. 선덕왕의 아버지인 김효방이 732년 9월 - 733년 정월에 당에서 숙위 중 사망했으므로, 늦게 잡아도 7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주왕산 급수대의 유래에서 언급된 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5] 본 문서는 '宣'德王이고 여왕은 '善'德王이다.[6] 아이러니한 점은 선덕왕은 모계 쪽으로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어서 무열왕계에도 해당된다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덕왕은 과도기 때의 임금이고 진정한 내물왕계의 시작은 원성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7] 성덕왕 1년에 아찬 관등에 중시(中侍)로 임명된 인물의 이름도 원훈(元訓)으로 동일인이라면 성덕왕의 측근 세력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김양상이 귀족파의 수장이 아니라 왕당파의 일원이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김양상이 경덕왕이 죽기 얼마 전인 경덕왕 23년 아찬으로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경덕왕에게 아들을 도와줄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8]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남편인 김효방의 사망연대로 보았을 때 성정왕후의 소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 선덕왕이 즉위한 후에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되었다.[10] ...이기는 한데 선덕왕은 대략 719년생, 혜공왕은 758년생이므로 무려 '''40살'''이나 차이난다...[11] 구족왕후라고도 불린다.[12] 21세기 대한민국의 지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은 다음 혜공왕 대에 사실상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의미가 없지는 않은 게 나중에 다시 부활시키고 오락가락하다가 고려시대에 들어 완전히 한화 지명이 자리잡았다. 결과적으로는 경덕왕이 구상했던 대로 된 것이다.[13] 김주원도 혜공왕 시해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덕왕의 어머니인 태종 무열왕계 사소부인은 김주원을 왕태자로 책봉한 상태였기 때문이다.[14] 오늘날의 황해도와 평안남도(대동강) 인근 지역으로 고구려 후기의 중심지로서 신라는 삼국통일 100여 년만에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신라 영향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느슨한 형태의 간접 지배를 하고 있었고 성덕왕 때 패강에 수자리를 설치하는데 그쳤었다. 약 50년만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사 시설인 진을 설치한 것이다.[15] 정확히 말하자면 원성왕의 증조할머니가 태종 무열왕의 딸이기는 하다. 그러나 성덕왕의 외손자인 선덕왕과 달리 다른 태종 무열왕계 왕들과 촌수가 너무 벌어져 내물왕계로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