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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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 해군항공기술창
생산 : 큐슈비행기
처녀비행 : 1938년
생산개시 : 1940년
전장 : 8.53 m / 전폭 : 10.98 m / 전고 : 3.39 m / 익면적 : 19.00 m2
중량 : 1,450 kg
최대속도 : 246 km/h
승무원 : 2명
동력 : 히타치(日立) 아마카제 12형(天風12型) 공랭식 9기통 엔진(340 hp) 1기
항속거리 : 882 km
실용상승한도 : 5,420 m
상승률 : 295 m/min.
무장 : 7.7 mm 기관총 1정 / 60 kg 폭탄 1발
'''영식 소형수상정찰기(零式小型水上偵察機 / 요코스카 E14Y)''', 이 수상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용기가 미국 본토에 폭격을 실행한 유일무이한 유인 항공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해군의 함정 진수부에서 요구한 잠수함에서 탑재하여 운용이 가능한 소형 정찰기인 12시 잠수함용 정찰기(十二試潜水艦用偵察機) 소요 제기에 따라 요코스카에 위치한 해군항공기술창(海軍航空技術廠)에서 1938년에 시제 초호기를 완성시켰다. 테스트를 거친 이 수상기는 1940년 12월에 일본 해군에 의해 잠수함대에 배치할 제식 함재기로 채택되었다. 탈착이 자유로운 플로트가 달리고 주날개가 뒤로 접히는 이 정찰기는 순잠 을형 잠수함의 내부 격납고에 수납이 되도록 처음부터 사이즈와 규모에 제한이 있었다.
1940년 12월에 도입했을 때만 해도 이 기체는 내령병(内令兵)에 따라 영식 1호 소형비행기 1형(零式一号小型飛行機一型)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942년에 해군이 내령병 제25호(内令兵 第25号)에 의거해 항공기 명칭 부여 방식을 바꾸면서 영식 소형수상기 11형(零式小型水上機一一型)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해군 분류기호는 '''E14Y'''였지만 연합군 정보국은 글렌(Glen)이라는 암호명을 붙이고 관리했다.
1937년에, 그때까지 사용되고 있던 '''96식 소형수상기(九六式小型水上機)'''의 후계로 해군 공기창에서 개발이 시작된 기체는 1938년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이 기체는 전금속제 프레임 위에다 우포를 씌우고 트윈 플로트를 가진 단엽기였다. 잠수함의 비좁은 격납고에 쉽게 드나들 수 있게끔 수직 미익의 높이를 최대한 낮추는 대신 꼬리 하단에 안정핀을 달았다. 주날개는 뒤로 완전히 접히며 플로트도 분리와 탈착이 자유롭게 하면서도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궁리가 되었는데, 실제로 이 부분이 기체의 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처음 만들어진 시제기는 날개를 펼치고 플로트를 달고 캐터펄트에서 발함하기까지 10분이 걸렸다. 원형기는 처음 예정한 것보다 중량이 초과되어 항속 성능이 떨어졌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어 개량과 개조 작업이 이어졌고 이런 이유로 인해 첫 비행으로부터 거의 2년이나 지난 1940년 12월에야 비로소 채택되었다. 공기창은 연구기관에 가까운 탓에 아무래도 생산 능력이 딸리므로 생산은 큐슈 비행기(九州飛行機)에서 이루어졌으며 원형기를 포함해서 138대가 완성되었다.
영식 소형수상기는 순잠 갑형(巡潜甲型)에 함재기로 실려 필요할 때 발진시켜 항공 정찰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순잠 갑형 이후 연달아 건조된 순잠 을형에도 실리게 된다. 영식 소형수상기의 첫 실전 임무는 취역 이후로도 한동안 미뤄졌다. I-10(伊10)의 함재기가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기 전인 1941년 11월 30일에 피지 제도의 수바 상공을 날면서 첫 번째 정찰 임무를 개시했고, 개전 후에는 I-9(伊9)의 탑재기가 1942년 2월 14일에 진주만에 정찰을 다녀왔다고 승무원들이 주장하고 있다. 남태평양 전선이나 쿠릴 열도 방면의 정찰에 활약했고 나중에는 미국 본토에 처음으로 폭탄을 떨구기도 했다.
1942년 9월에 후지타 노부오(藤田信雄 : 1911~1997) 병조장와 오쿠다 쇼지(奥田正治) 병조가 탄 I-25(伊25)의 탑재기가 2시간 동안 비행한 끝에 오리건주의 숲에 소이탄을 투하해 산불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용기가 미국 본토 공격에 성공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인명 피해는 전혀 없이 숲이 조금 붙타다 만 것일 뿐이었으나, 일본 우익들은 이 사건을 가리켜 미국 정부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체를 실은 잠수함의 작전 기록을 종합해보면 영식 소형수상기는 합계 52회의 항공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중에서 48회는 임무에 성공을 거두었고 40회는 무사히 돌아오는 의외로 괜찮은 생환율을 기록했다. I-10의 탑재기가 1944년 6월 12일에 실시한 마주로(Majuro) 정찰 작전이 이 기체가 운용된 마지막 기록이다. 이 무렵에는 미 해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쥐고 있어 잠수함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어 더 이상 활약할 기회는 없어졌다.
그 중에는 발함을 해서 비행하던 도중 모함이 격침되어 망망대해 위를 날다가 추락한 기체도 있었고, 잠수함 내부 격납고라는 열악한 운용 환경 탓에 소모가 심해 패전을 맞을 때까지 남은 기체는 겨우 17대밖에 없었다.
1. 제원
개발 : 해군항공기술창
생산 : 큐슈비행기
처녀비행 : 1938년
생산개시 : 1940년
전장 : 8.53 m / 전폭 : 10.98 m / 전고 : 3.39 m / 익면적 : 19.00 m2
중량 : 1,450 kg
최대속도 : 246 km/h
승무원 : 2명
동력 : 히타치(日立) 아마카제 12형(天風12型) 공랭식 9기통 엔진(340 hp) 1기
항속거리 : 882 km
실용상승한도 : 5,420 m
상승률 : 295 m/min.
무장 : 7.7 mm 기관총 1정 / 60 kg 폭탄 1발
2. 개요
'''영식 소형수상정찰기(零式小型水上偵察機 / 요코스카 E14Y)''', 이 수상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용기가 미국 본토에 폭격을 실행한 유일무이한 유인 항공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해군의 함정 진수부에서 요구한 잠수함에서 탑재하여 운용이 가능한 소형 정찰기인 12시 잠수함용 정찰기(十二試潜水艦用偵察機) 소요 제기에 따라 요코스카에 위치한 해군항공기술창(海軍航空技術廠)에서 1938년에 시제 초호기를 완성시켰다. 테스트를 거친 이 수상기는 1940년 12월에 일본 해군에 의해 잠수함대에 배치할 제식 함재기로 채택되었다. 탈착이 자유로운 플로트가 달리고 주날개가 뒤로 접히는 이 정찰기는 순잠 을형 잠수함의 내부 격납고에 수납이 되도록 처음부터 사이즈와 규모에 제한이 있었다.
3. 명칭 변경
1940년 12월에 도입했을 때만 해도 이 기체는 내령병(内令兵)에 따라 영식 1호 소형비행기 1형(零式一号小型飛行機一型)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942년에 해군이 내령병 제25호(内令兵 第25号)에 의거해 항공기 명칭 부여 방식을 바꾸면서 영식 소형수상기 11형(零式小型水上機一一型)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해군 분류기호는 '''E14Y'''였지만 연합군 정보국은 글렌(Glen)이라는 암호명을 붙이고 관리했다.
4. 개발 및 생산
1937년에, 그때까지 사용되고 있던 '''96식 소형수상기(九六式小型水上機)'''의 후계로 해군 공기창에서 개발이 시작된 기체는 1938년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이 기체는 전금속제 프레임 위에다 우포를 씌우고 트윈 플로트를 가진 단엽기였다. 잠수함의 비좁은 격납고에 쉽게 드나들 수 있게끔 수직 미익의 높이를 최대한 낮추는 대신 꼬리 하단에 안정핀을 달았다. 주날개는 뒤로 완전히 접히며 플로트도 분리와 탈착이 자유롭게 하면서도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궁리가 되었는데, 실제로 이 부분이 기체의 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처음 만들어진 시제기는 날개를 펼치고 플로트를 달고 캐터펄트에서 발함하기까지 10분이 걸렸다. 원형기는 처음 예정한 것보다 중량이 초과되어 항속 성능이 떨어졌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어 개량과 개조 작업이 이어졌고 이런 이유로 인해 첫 비행으로부터 거의 2년이나 지난 1940년 12월에야 비로소 채택되었다. 공기창은 연구기관에 가까운 탓에 아무래도 생산 능력이 딸리므로 생산은 큐슈 비행기(九州飛行機)에서 이루어졌으며 원형기를 포함해서 138대가 완성되었다.
5. 잠수함에 실려
영식 소형수상기는 순잠 갑형(巡潜甲型)에 함재기로 실려 필요할 때 발진시켜 항공 정찰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순잠 갑형 이후 연달아 건조된 순잠 을형에도 실리게 된다. 영식 소형수상기의 첫 실전 임무는 취역 이후로도 한동안 미뤄졌다. I-10(伊10)의 함재기가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기 전인 1941년 11월 30일에 피지 제도의 수바 상공을 날면서 첫 번째 정찰 임무를 개시했고, 개전 후에는 I-9(伊9)의 탑재기가 1942년 2월 14일에 진주만에 정찰을 다녀왔다고 승무원들이 주장하고 있다. 남태평양 전선이나 쿠릴 열도 방면의 정찰에 활약했고 나중에는 미국 본토에 처음으로 폭탄을 떨구기도 했다.
6. 유일무이한 미국 본토 공습
1942년 9월에 후지타 노부오(藤田信雄 : 1911~1997) 병조장와 오쿠다 쇼지(奥田正治) 병조가 탄 I-25(伊25)의 탑재기가 2시간 동안 비행한 끝에 오리건주의 숲에 소이탄을 투하해 산불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용기가 미국 본토 공격에 성공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인명 피해는 전혀 없이 숲이 조금 붙타다 만 것일 뿐이었으나, 일본 우익들은 이 사건을 가리켜 미국 정부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체를 실은 잠수함의 작전 기록을 종합해보면 영식 소형수상기는 합계 52회의 항공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중에서 48회는 임무에 성공을 거두었고 40회는 무사히 돌아오는 의외로 괜찮은 생환율을 기록했다. I-10의 탑재기가 1944년 6월 12일에 실시한 마주로(Majuro) 정찰 작전이 이 기체가 운용된 마지막 기록이다. 이 무렵에는 미 해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쥐고 있어 잠수함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어 더 이상 활약할 기회는 없어졌다.
그 중에는 발함을 해서 비행하던 도중 모함이 격침되어 망망대해 위를 날다가 추락한 기체도 있었고, 잠수함 내부 격납고라는 열악한 운용 환경 탓에 소모가 심해 패전을 맞을 때까지 남은 기체는 겨우 17대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