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
1. 고려, 조선의 통치 기구
1.1. 고려 때의 정부기관
고려 성종 대에 중국의 육전체제(六典體制)를 참고하여 군사 관계의 일, 즉 군무(軍務)를 다스리는 기관으로 설치한 병부(兵部)가 그 시초다. 원 간섭기에 군부사(軍簿司)로 격하되었다가 1298년(충렬왕 24)에 실세 충선왕이 병조로 개칭하였다. 나중에 선부로 통합되었다가 도로 독립, 총부와 군부사를 반복하다가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하면서 병부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병부와 군부사를 반복하다가 1389년(공양왕 1)에 군부사를 병조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이 1392년 7월을 기하여 조선 병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1.2. 조선 때의 정부기관
1.2.1. 개요
兵曹. 6조의 하나로서 군사에 관한 일과 무관을 선발하고 역참 교통에 관한 일 및 궁궐문의 수비, 무기 및 군수기재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 다른 이름으로 기성, 기조, 서전, 하관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방부에 해당한다.
1.2.2. 오위도총부와의 관계
군무는 크게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으로 나뉜다. 군정은 양병 즉 군사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군사정책에 관한 일이며, 군령은 용병 즉 군사력을 지휘하고 운영하는 작전에 관한 일이다.
병조는 군에 관한 인사, 군수, 교통에 대한 일을 담당하여 군정(軍政)을 총괄하는 관서였다. 조선 초기에는 군령(軍令)에 관하여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이를 장악하고 있었다. 1405년에 병조가 승격되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1] 를 그 예하에 두면서 병조는 군령상으로도 총괄하는 지위를 획득하였다.
1409년 8월에 병조가 모두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설치되었다. 삼군진무소가 군령을 장악했는데 이것이 세조 때에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어 성종 때 경국대전에 수록된다.
하지만 병조는 여전히 군령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병조는 군정을 총괄하였기에 군 인사권을 쥐고 있어 오위도총부는 병조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실제로 임금이 군령을 발하는 데 있어 병조의 낭청과 삼군진무소의 진무가 함께 승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같은 양 기구의 관계는 현대의 각 군 본부와 합동참모본부의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육군참모총장은 육군에 대한 군정권을 행사하며 합참의장은 군령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합참의장이 육군참모총장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1.2.3. 역사
1392년 (태조 1년)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군무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은 도평의사사가 하고 있었고, 일상적인 군무는 중추원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병조의 위상은 미약하였다.
1393년에 군무를 총괄하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설치되었고, 정도전을 판의흥삼군부사로 하여 사병 혁파 등 강한 군정을 펴나가는 동안 병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년) 4월에 의정부가 성립되고, 1405년(태종 5년)1월 육조 격상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육조 중심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병조의 임무와 권한이 완전하게 되었다. 이는 경국대전이 편찬된 성종 대로 이어진다.
1.2.4. 조직 및 인원
병조에는 무선사, 승여사, 무비사 3개의 속사[2] 가 있었다. 병조의 속아문[3] 으로는 훈련원[4] , 사복시, 군기시[5] , 전설사, 익위사[6] , 선전관청[7] 이 있었다.
소속 관원으로 판서[8] , 참판, 참의[9] , 참지[10] 각 1인, 그리고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이 각각 4인[11] 의 벼슬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참지 1인과 정랑·좌랑 각 1인, 총 3인의 벼슬아치는 6조 가운데 병조에만 추가로 부여된 인원이었다.
특히 병조판서는 척신들이나 훈신들, 또한 그 외의 권신들 및 권신들의 측근들이 많이 차지하기도 했는데, 숙종 때의 삼척인 민유중, 김만기, 김석주, 그리고 자의대비의 친척인 조사석, 김만기의 동생인 김만중, 민유중의 형인 민정중, 김석주의 아버지인 김좌명 또한 병조판서를 한 적이 있다. 그 외에 김만기의 아들인 김진구, 그리고 민유중의 장남인 민진후도 병조판서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다. 그리고 민정중의 아들인 민진장도 병조판서를 했고 민시중의 아들인 민진주도 병조판서를 했다. 소론의 영수인 남구만, 윤지완도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 외에도 노론 4대신 중에도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병조판서 자리를 차지했으며 훈구파의 창업멤버인 한명회, 신숙주도 병조판서에 있었고 집현전 기술관료였던 정인지도 병조판서에 있었다. 또한 훈구파 영수인 김국광도 병조판서에 있었다. 선조 때의 명재상인 유성룡도 병조판서에 있었다. 연산군 초에 국가원로였던 이극배도 병조판서에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의 장인인 신승선도 병조판서에 있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도 병조판서를 했으며 훈구파의 대신인 성준, 이극균도 병조판서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 광해군과 사돈을 맺은 박승종도 병조판서를 한 적이 있다. 또한 김종서와 황보인의 측근인 조극관과 민신도 병조판서에 있었다. 또 기사환국 이후 남인의 2차집권기에 희빈 장씨의 측근인 민암도 병조판서를 했고 민암의 일족인 민종도와 민암의 측근인 목창명도 병조판서를 했다. 그리고 영조의 척신인 홍봉한도 병조판서를 했고, 동생인 홍인한도 병조판서를 했다. 소론의 5대신 중에 조태구, 최석항, 유봉휘, 조태억, 이광좌도 모두 병조판서를 했다. 그리고 이광좌의 형인 이태좌도 병조판서를 했다. 그리고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도 모두 병조판서를 했다. 서인 산림의 양대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도 모두 병조판서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도운 이사명도 병조판서를 했다. 인조 때 권신인 김자점 또한 병조판서를 했다.
1.2.5. 기타
병조는 의정부 서사제가 실행되는 시기에도, 6조 중 유일하게 직계제가 적용되어 왕이 직접 관리했다. 이는 군사권을 왕이 장악하여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다.
2. 해군에서 쓰던 계급
일본 제국 해군과 초기 대한민국 해군과 대한민국 해병대에서 사용하던 부사관, 준사관의 계급이다.
일본 제국 해군에선 1897년부터 1920년까지 준사관을 병조장(兵曹長)과 상등병조(上等兵曹)의 두 계급으로 나누었고 1920년부턴 병조장으로 통일했다. 1941년 6월부터 병조장(준사관), 상사는 일등병조, 중사는 이등병조, 하사는 삼등병조로 나타냈다가 1942년 11월부터 상등병조(상사), 일등병조(중사), 이등병조(하사) 로 나눴다.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도 1962년까지는 병조장(상사), 일등병조(상사와 중사 사이), 이등병조(중사와 하사 사이), 삼등병조(하사)란 호칭을 썼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군 체계를 정리하면서 하사-중사-상사 체계로 갔다.
[1] 의흥삼군부의 후신[2] 현대의 행정용어로 풀이하면 보조기관이다. 부서라고도 한다.[3] 현대의 행정용어로 풀이하면 하급행정청이다.[4] 군의 훈련을 담당하던 관청 오늘날로 치면 육해공 사관학교이면서 군 훈련소[5] 군의 무기 제작을 담당하던 관청. 현재의 국방과학연구소,방위사업청 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편하다.[6] 세자의 호위를 맡던 관청[7] 왕명 출납과 궁궐 경비를 맡던 관청오늘날로 치면 대통령경호처의 기획관리실장[8] 정승이 되기 위해서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반드시 거쳐야 했던 만큼,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못 거치고 정승이 된 사례도 있는데, 적어도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는 거쳐야 했다.[9] 병조참의, 정3품의 당상관 벼슬의 하나.[10] 병조참지, 정3품의 당상관 벼슬의 하나.[11] 정랑 4인과 좌랑 4인을 합하여 낭청(郎廳) 8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