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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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설 배경과 준비
실업축구로 진행되던 한국의 성인 축구리그는, 최순영 前신동아회장이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프로화의 닻을 올리게 된다. 최 회장의 공약 중의 하나가 바로 프로화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실업 리그를 1부 리그와 2부 리그로 나누고 승강제를 진행하려는 노력이 1975년에도 있었고, 1980년에도 시도하려다 실업팀의 반발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또한 당시 정권의 3S정책에 힙입은 바도 있었고, 무엇보다 전두환 대통령이 축구광이란 점이 가장 큰 배경이었다.[1] 1981년 5월 청와대 비서관들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프로스포츠를 만들기로 했고, 6월에 실업야구 롯데 감독 박영길과 최순영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최 회장은 축구의 프로화계획에 대해 물어보기에 축구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지만, 청와대 수석 참모들이 축구 대신 야구를 밀어줬다고 회고한다. 박영길 감독은 1976년 재미사업가 홍윤희가 주도해만든 프로화 청사진이 이미 있다고 어필했다. 청와대는 어느 종목이든 정한 것이 아니었고 어느쪽이든 구체적인 실현 가능한 계획이 나오기를 바랬던 것. 축구계는 경기장 시설 투자 등 프로화 비용으로 139억원을 국비로 지원해줄것을 요구하였는데, 야구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요인물이었던 이호헌과 이용일이 정부 자금 지원 없이 프로야구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정부는 야구를 일단 프로화 하기로 한다.[2]
1981년 10월 기사를 보면 기존의 할렐루야 팀에 1982년 3개팀을 추가해 4개, 1983년 4개팀을 추가해 총 8팀을 만들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1983년 2월에는 슈퍼리그 창설위원회가 축구협회 산하에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장애물들은 등장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브라질 프로팀 초청건이었다. 국가대표팀과 브라질 프로팀과 초청경기를 통해 축구열기를 지핀다는 계획은 참신했지만, 당시 지방의 각 시도의 협회 지부는 "프로야구 때문에 관객유치가 곤란하다. 적자를 내면서까지 대회를 유치할 수는 없다"며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프로화에 대해 오히려 실업팀이나 프로팀마저 슈퍼리그에 제각각의 이유를 대며 딴지를 거는 통에 협회는 내부간 싸움까지 겹쳐 어수선한 상태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한 것은 그해 개최된 대통령배로, 협회는 첫 개막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를 무료로 개방함으로써 72게임 동안 20만명의 관중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주택은행과 한일은행, 그리고 현대자동차[3] 가 슈퍼리그 참가를 요청해올 정도로 열기는 무르익게 된다.
2. 대회 방식
당시 대회 방식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춘천, 마산, 안동 등 총 9 도시를 '''순회'''[4] 하며 모두 40경기를 벌이는 것이었다. 하루에 두 경기씩 토요일, 일요일에 경기를 개최했고, 형식상 각 팀당 지역연고는 존재했으나 사실상 미약했다.
3. 클럽 순위
- 승리 시 승점 2점, 무승부는 승점 1점을 획득한다.
- K리그 1983 시즌 우승
- ⑴ 할렐루야 독수리는 구정컵 국제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하였다.
4. 의의
본격적인 프로 리그의 출범이자 원년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흥행도 평균 2만여명을 동원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한 해였다. 뿐만 아니라 시즌 경기가 TV를 통해 중계됨으로써[5]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고, 그동안 사그러들던 축구열기를 다시 지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총 5팀 중 프로팀은 2개, 실업팀은 3개로 구성되어 있어 아직 진정한 의미의 프로리그라고 보기가 힘들었고, 하루에 2경기씩을 개최하는 살인적인 일정 또한 아직 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슈퍼리그의 출범으로 인하여 기존의 실업팀 중 프로화를 생각하는 팀이 늘어났고, 프로화는 대세가 되었다.
5. 다른 시즌 보기
[1] 전두환은 육사 시절 교내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맡을 정도로 축구에 능했다.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옆에서 축구 해설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프로스포츠 계획안을 열어보자 나왔던 첫 마디 역시 "어? 뭐야? 야구야? 난 축구인 줄 알았지" 였을 정도로 전두환 대통령은 축구의 프로화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2] 돈 안들이는 방법은 당연히 구단들의 모기업이 돈을 내는것. 이와 관련된 융자혜택을 주고, 야구장 입장세도 수년간 면제해 주는 등의 방식을 제안했던 것이었다.[3] 오늘날 울산 현대[4] K리그 팬 사이에서는 유랑극단 방식이라고 부른다.[5] K리그는 KBS가 열성적으로 중계를 해줬는데 한 해 먼저 출범한 KBO 리그의 TV 중계가 상당한 자극제가 됐다는 후문이다. 출범 초창기의 KBO 리그는 자사 산하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MBC가 일주일에 1~3번은 반고정으로 야구 생중계를 편성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