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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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용일
생년월일
1931년
학력
경동중-서울대 상과대
소속팀
육군(1950년대)
1. 소개
2. 생애
3. 프로야구를 만들다.
4. 이후 행보
5. 이력
6.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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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군산상고를 창단하고 KBO 리그가 출범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울러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 대행을 역임했다.
한편으로 측근인 유영구가 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KBO 총재로 밀기도 했다. 결국 유영구가 비리 수사로 자진 사퇴한 후 유영구를 통해 자신이 그 자리에 앉기도 했다.
김성근과 절친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한 장본인. 이용일은 아주 구시대적인 야구관을 가지고 있어서 선수를 혹사시키는 김성근을 무척 좋아했다. 쌍방울의 구단주 대행 시절 이용일은 만년 하위팀인 쌍방울은 "혹사로 굴려야 제정신 차린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김성근을 적임자로 여겼고 실제로 영입했다.
여러모로 야구계의 명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1931년 경성부에서 경성고무 창업주였던 이만수 사장의 넷째로 태어나 꽤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 야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유복룡[1]이 바로 아래집에 살아서 매일 캐치볼 하며 야구를 접했다고 한다.
이후 경동중학교에 진학했는데 2학년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고, 그때 유복룡이 학교에 제안하여 경동중학교 야구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에 오른다. 당연히 이용일도 경동중 야구부 일원으로 활약했고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해 상대 야구부에 가입하여 야구선수 이력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0월에 군에 입대, 특과장교로 6년간 군복무를 했고, 1956년 3월에 제1군사령부에서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육군 야구단 감독으로 재임하기도 했는데 이때 항상 공군에게 깨져서 당시 정훈감이었던 김창정 장군과 양국진 육군참모차장에게 엄청 깨졌다고.[2]
군문을 나온 후 가업인 경성고무의 전무로 재직하던 이용일은 전역 6개월 만에 살이 89kg까지 불어나자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사내 야구 동아리를 만들어 군산중학교, 군산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작했는데 당시 군산에 불량 청소년들이 많아서 '이들을 교화시키는 데 야구를 활용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로 야구부 창단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2년 2월에 군산국민학교, 중앙국민학교, 남국민학교, 금광국민학교등 4개 국민학교 야구부가 창단했고 이들이 졸업한후 지역 야구팀이 없어 휘문고동대문상고로 진학하는 모습을 보고 군산에도 고교야구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 1968년에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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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뒷줄 오른쪽 네번째가 이용일.
1978년에 경성고무를 선경그룹에 매각한후, 대한야구협회 회장이었던 김종락[3]의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 한국실업연맹, 한국대학연맹, 한국고교연맹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1979년 2월에 현재의 대한야구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유소년 야구 지원, 유망주 미국 유학[4], 야구대제전 창설 등을 진두지휘했다.

3. 프로야구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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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재직 당시.
대한야구협회 전무로 일하던 중,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사회정화 운동에 휘말려 1980년 2월 협회 전무 자리를 사직하고 야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서울대 상대 동창이자 협회 운영부장으로 일하던 이호헌[5]도 모가지를 당하며 동병상련의 처지로 같이 백수 시절을 보내던 중, 1981년 5월 청와대 이상주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만나 프로야구 창설에 대해 적극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한국 프로야구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상주 수석이 TV를 보다 중앙대학교 서영무 감독이 "이제 한국도 프로야구를 만들어야 됩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야구와 축구 프로리그를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프로야구 출범과 관련된 논의를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당시 피를 보고 집권한 신군부가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3S정책을 검토하는 와중에 정권실세 이학봉 민정수석이 프로야구를 언급하면서 본격화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용일과 이호헌은 머리를 맞대고 프로야구 창단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프로야구에서 이미 전설적인 스타가 된 강타자 장훈의 도움으로 장훈의 은사이자 일본 야구계의 거물이던 미즈하라 시게루와 동료이자 전설의 야구왕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소개받아 프로 창단에 필요한 노하우의 자문을 받았고, 이런 인연으로 나가시마는 시모다 다케조 NPB 커미셔너 및 장훈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장훈은 이용일과 긴밀히 협업하며 리그 초기에 NPB에서 뛰던 재일교포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 각 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연결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한야구협회대한축구협회에 프로리그 출범 계획서 제출을 요구하자 1975년 재미교포 홍윤희 씨가 주도하여 작성했던 프로야구 창립계획을 골자로 프로야구 출범 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 이용일이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단장으로 참가했을 당시 쿠바 야구협회장으로 부터 "우리는 연고지 제도를 도입해서 운영하고 있고 이것이 쿠바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라는 말을 들었고 지역 연고 고등학교 별로 프랜차이즈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부산직할시경남고 출신은 무조건 부산 연고의 팀에 입단하고 광주직할시광주제일고 출신은 무조건 광주연고의 프로팀에 입단 하도록 한것. 그리고 이는 프로야구의 조기 정착과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6]
이렇게 짜여진 프로야구 창단 계획서를 제출하고[7] 이상주 수석과 면담을 가졌는데 이상주 수석이 "계획서 자체의 내용은 좋다. 그런데 요즘 지역감정 때문에 정치가 힘든데, 지역감정을 더 심화 시키는게 아니냐. 계획서를 좀 바꿔야 할 것 같다."라는 제안을 했는데 이용일은 "프로 스포츠는 먹고 살 걱정 없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여가 생활로 즐기는 건데, 지금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천달러도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뭔가 특색이 있어야 한다. 고교야구가 인기 있는 이유도 지역민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인데 프로야구 또한 그렇게 되어야 성공할수 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상주 수석도 그 의견을 흔쾌히 받아 들여 그렇게 윗선에 보고했고, 그 후 청와대에서 "원안대로 추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며 본격적으로 기업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서울특별시에는 MBC 청룡, 인천직할시에는 삼미 슈퍼스타즈, 부산광역시에는 롯데 자이언츠, 대구광역시에는 삼성 라이온즈, 대전광역시에는 OB 베어스, 광주광역시에는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되며 프로야구가 발족하게 되었다. 자세한 일화는 KBO 리그 역사 항목 참조.

4. 이후 행보


1981년 12월 11일 한국야구위원회가 발족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으며 한일 슈퍼게임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후 1991년에 새로이 창단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 대행으로 근무했고 1998년 시즌 종료후 1999년 2월에 구단주 대행직을 그만두었다.관련 기사
제 10구단 창단 구단 선정 당시 전라북도에 프로야구단을 유치하자는 취지로 구성된 "제 10구단 범도민유치추진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재직하기도 했다.

5. 이력


  • 1961년 제4회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총감독.
  • 1962년 대한체육회 지도위원장.
  • 1970년 KOC(대한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
  • 1970년 대한체육회 아마규정 심의위원
  • 1971년 대한민국 체육상 국민훈장 수상
  • 1972년 제20회 뮌헨 올림픽 한국대표단 총감독.
  • 1974년 대한체육회 이사
  • 1978년 제10회 할렘대회 국가대표팀 단장
  • 1978년 제 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단장.
  • 1979년 ~ 1980년 대한야구협회 전무 이사
  • 1981년 ~ 1991년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 1992년 ~ 1999년 2월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
  • 2009년 유영구 KBO 총재 고문

6. 참고 링크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이용일 편
(11)경성고무공업사④
군산야구의 대부 이용일
[1] 선린상업-경성고상 출신으로 발이 빨라 야구 대표팀에서 주로 중견수 겸 1,2번타자를 도맡았다.[2] 당시 육군과 공군간에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데다, 공군은 육군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용일이 말하길 당시 육군은 순수하게 사병들중에서 야구좀 한다는 사람들만 모아서 꾸린 반면, 공군은 입대부터 선수출신 등 야구 잘하는 사람들만 별도로 스카웃하여 만든 팀이어서 상대가 안되었다고.[3] 정치인 김종필의 친형[4] 이때 혜택을 받은 이가 바로 김응룡.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대회때 선수와 단장으로 만났는데 선수단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남은 금액은 돌려주는 모습에 선택했다고. 단 이런저런 사정으로 김응룡은 1981년에 연수를 떠났으나 이후 대한야구협회에서 "더이상 지원은 어렵다"라고 밝혀서 1년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5] 마산시 출신으로 본명은 이정렬. 마산상고와 서울대 상대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했고 1963년 대한야구협회 공식 기록원을 시작으로 야구 행정가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편으로 하일성, 허구연 이전 야구 해설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한국 야구의 표준 기록법을 세운 야구 기록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물. 2012년 10월 15일 노환과 폐렴 합병증으로 별세했다.[6] 반면 한국프로축구의 경우 시설문제등을 이유로 창단 작업에 난항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 프로야구가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1년 늦게 출범했고, 본격적인 연고제도가 정착된건 1990년 부터였다. K리그 팬 입장에서는 통탄할 노릇.[7] 그런데 계획서 제출 후 한달 가까이 소식이 없어 이호헌이 이상주 수석에게 전화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이수석은 오히려 "왜 아직도 계획서를 안주느냐?" 라고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계획서를 받은 우병규 당시 정무수석 밑의 비서관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 책상 서랍속에 처박아 버린 것이라고(...). 뒤늦게 계획서를 읽어본 이수석은 무릎을 치며 "옳커니! 이렇게 하면 되겠다!" 라며 감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