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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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지오(Piaggio) P.108
1. 제원 (P.108 / P.133)
2. 개요
3. 상세


1. 제원 (P.108 / P.133)


  • 전장 : 22.92m / 24.60m
  • 전폭 : 32m / 36m
  • 높이 : 5.18m (??? 시) / 4.40m (착지 장치 낮출 시)
  • 중량 : 29,885kg (만재시) / 34,000kg (만재시)
  • 엔진 : 피아지오 P.12 RC35 공랭 18기통 4기 / 피아지오 P.15 RC60 공랭 18기통 4기
  • 출력 : 엔진당 1,350hp / 1,650hp
  • 최대속도 : 420km/h / 490km/h
  • 항속거리 : 376km/h로 3,520km / 400km/h로 5,100km
  • 상승고도 : 8,500m / 8,000m
  • 무장 : 7.7mm 브레다-SAFAT 기관총 2정, 12.7mm 브레다-SAFAT 기관총 5정 / 12.7mm 브레다-SAFAT 기관총 4정, 20mm MG 151 기관포 6문
    • P. 108A 한정 102mm 대함포
  • 폭장 3,500kg / 4,800kg
  • 승무원 : 6명
  • 생산량 : 30 ~ 35대 (폭격기로는 24대)[1]

2. 개요


제2차 세계대전당시 이탈리아군의 최강 폭격기.
1937년부터 이탈리아의 피아지오 사가 개발한 기체로 당시 설계주임이던 지오반니 카시라기 기사는 1936년까지 미국에서 비행설계학을 공부했었기에 개발중인 기체엔 미국에서 경험한 체험이 반영되었다.

3. 상세


시제기는 1939년 11월에 첫 선을 보녔는데 전금속재질의 기체에 1,350마력의 엔진 4기를 장착한 폭격기였다. 하지만 시제기인데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수준으로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한 관계로 시작기나 초기생산형을 배치받은 부대에서 사고가 발생했는데, 1941년 8월 7일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아들인 부르노 무솔리니가 해당 폭격기로 비행하다가 너무 낮게 비행하는 바람에 추락해서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P.108은 3톤이 넘는 폭탄을 탑재하는 것이 가능했고 방어무장으로 8정의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총 중 4정은 2정씩 외측 엔진상부에 장비되어 동체 상부의 조준 돔에서 조준사격했는데 12.7mm 기관총을 기수와 반흡입식의 복부총좌에 두고 동체측면에 나머지 2정의 기총을 장비한 것은 이탈리아 기체 중 가장 중무장이었다. 또한 엔진도 초기형 B-17보다 강력한 엔진을 사용해서 다른 이탈리아제 항공기와 달리 출력부족에 시달리지 않았다. 또한 이탈리아제 답지 않게 자동 방루 봉입식 연료탱크를 갖추어서 적 전투기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추축군의 중폭격기로는 독일의 He 177과 함께 쌍두마차로 군림할 수 있었다. 폭탄창은 여러므로 신기하게 개폐하는데, 폭탄창이 3개가 있는데 좌우 폭탄창은 여닫이, 중앙 폭탄창은 미닫이이다.
하지만 4발 중폭격기간의 비교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한다. 일단 이탈리아가 처음 생산해본 4발 중폭격기다 보니 여러므로 단점이 많았다.[2] 일단 B-17과 비교하면 속도와 상승고도에서 불리하며, B-24와 비교하면 폭탄 탑재량에서 결정적으로 열세였다. 또한 설계상의 문제로 인해 폭탄창이 세분화되고 서로 분리됨에 따라 폭장량과는 달리 대형폭탄이나 대형어뢰등을 장착할 수 없거나 폭탄창의 전체 크기에 비해 극히 소량만 탑재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3](다만 어뢰를 폭탄창안에 탑재 가능한 대형 폭격기는 드믈다.) 또한 방어기총과 총탑의 배치에도 문제가 있어서 사각이 많이 발생하고[4], 일부 총탑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등 조목조목 따지면 문제가 없는 구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G5N 신잔보다는 전반적 우세로 꼴지는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탈리아군의 시점에서는 가장 강력한 폭격기고, 비행시험에서 만족스런 결과를 내자 이탈리아군은 양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의 수준에서는 최신식 기술을 사용하는데다가 고급재료가 필요하고 이탈리아의 내부 사정에 의해 생산공정이 늦어져 부대배치가 미루어졌다. 그래서 실전에 등장한 것은 1942년 6월이 되어서였다. 그 후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 까지 폭격기로는 24기 남짓한 기체가 생산되었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시제기 수준의 물건으로 양산되었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몇 번의 폭격임무 외엔 주로 해상초계용으로 사용되는것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래도 성능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지브롤터알제리를 폭격하거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이 때문에 소량의 생산량치고는 선박 공격용, 중폭격기용, 수송기용, 중무장용등 여러 버전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 한줌도 안되는 물건이었고, 앞서 말했듯이 4발 중폭격기로서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과를 거의 올리지 못하고 격추만 신나게 당해서 이탈리아가 항복할 시점에서는 9대 미만의 수량만 남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에는 거의 모든 기체가 파시스트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군과 독일군에게 넘어가 주로 대형수송기로 사용되었다. 추락한 B-24의 영향을 받아 P.133이 최종적인 개량형으로 개발되었지만 미처 개발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로 끝났다.
여담이지만 102mm 대함포를 달은 시제기가 있다.(P.108A)


[1] P.133은 제작되지 못함[2] 최초의 중폭격기는 아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SM.82라는 대형 수송기 기반의 중폭격기를 운용해 본적이 있었지만, 설계적으로는 꽤나 구식인 기체였다.[3] 이런 문제점은 영국숄트 스털링도 가지고 있다. 다만 스털링의 최대 폭장량은 5톤이 넘어서(...) 물량으로 해결했다.[4] 기체 하단에 사각이 많다. 기체 하부를 지켜줄 수 있는 무장은 오직 12.7mm 기총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