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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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G 플라잉 포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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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G 플라잉 포트리스의 콕핏
1. 개요
2. 개발사
3. 'B-17'의 각 형식
3.1. B-17B
3.2. B-17C
3.3. B-17D
3.4. B-17E
3.5. B-17F
3.6. B-17G
3.7. Boeing 307 스트라토라이너
3.9. YB-40
4. 실전투입
4.1. 유럽전선
4.2. 대서양 전선
4.3. 태평양 전선
4.4. 2차 대전 중 추축국이나 타국에 노획된 사례
4.5. 2차 대전 종전 후
5. 제원
6. 미디어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



영상의 기체는 B-17E형 멤피스 벨 호.
''''Boeing B-17 Flying Fortress''''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운용되었던 가장 유명한 폭격기이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폭격기다. 연합군 승리에 가장 크게 공헌한 폭격기이며, 가장 성공적인 폭격기라는 평판을 받았다. B-17은 유럽에서도, 태평양에서도 육군 항공대에서 봉사하며 훌륭한 전과들을 낳았다.
'하늘의 요새'(플라잉 포트리스)라는 별칭에 걸맞게 튼튼하고, 멀리 날아가며,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해서 추축국의 혈압을 올리는데 일조했다. 특히 방어무기가 사방에 달려있어 요격기 입장에서는 격추시키기 어려웠다. 하늘의 요새라는 별칭이 붙은 주 이유. 이 B-17은 나치 독일이 노획하여 별 개수 없이 운용하였으며 일본 제국 또한 노획하여 제한적 카피 시도가 있었을 만큼 추축국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기체였다.

2. 개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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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모델 200 모노메일
1930년대는 보잉에게 있어서 몇 가지 항공역사상 중요한 기술들을 발하는 시대였다. 이 시절, 보잉이 생산한 실험기나 우편기 등에 적용된 기술들은 후에 보잉의 기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30년 5월 1일 초도비행을 한 모델 200/221 모노메일(Model 200/221 Monomail) 7인승 우편수송기는 종래의 복엽기의 디자인을 탈피해 항공역학적인 설계를 거친 유선형의 동체와 저익의 전금속제 캔틸레버(cantilever)식[1] 날개, 혁신적인 수납식 랜딩 기어를 갖추고 있었다. (모델 221은 모델 200의 두 번째 생산)
1931년 4월 13일, 두개의 575마력 프랫&휘트니 호넷(Pratt&Whitney R-1860-13 Hornet) 성형 엔진을 탑재한 모델 215가 날아올랐다. 이것은 곧 1931년 4월 29일, 미 육군에 의해 XB-901이란 이름으로 실험되었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 YB-9이란 이름을 얻어 본격적으로 미 육군에 의해 실험되었다. 이 YB-9은 262km/h의 속도로 날아올랐다.
두 번째 실험은 YB-9의 두 번째 모델, Y1B-9이었다.[2] 회사 내부에서 모델 214라고도 불렸던 이 비행기는 600마력 수랭식 커티스 컨쿼러(Curtiss V-1570-29 Conqueror) 엔진을 탑재했고, 1931년 11월 5일 첫 비행을 가졌다. 커티스 컨쿼러 엔진의 탑재로 인해 출력이 향상되었고 엔진 나셀(측면)의 디자인에 좀 더 스트림라인[3]이 향상되었다. YB-9는 278km/h의 속도를 지녔다.
YB-9은 다시 한 번의 개수를 거치는데, 그것은 바로 엔진과 관련된 문제였다. 당시 미 육군에서는 좀 더 안정성 있고 신뢰성 있는 공랭식 엔진에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적에 공격에 견디는데에도 수랭식 엔진보다 공랭식 엔진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B-2 Condor 폭격기를 제외하곤, 미 육군에선 수랭식 폭격기가 없었다. 그 때문에 보잉은 긴급하게 엔진을 갈아 끼었다. 기존의 컨쿼러 엔진은 슈퍼차저 기능이 있는 프랫&휘트니 호넷(Pratt&Whitney R-1860-11 Hornet) 엔진으로 교체되었고, 수직 보조바퀴에 대한 재설계도 이루어졌다.
보잉 회사 내부에선 이를 '모델 246'이라 명했으며 미 육군은 이것을 Y1B-9A으로 칭했다. Y1B-9A는 1932년 7월 14일 초도비행을 하였다.
이 Y1B-9 시리즈는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면으로 대단했는데, 먼저 미 육군 현존하는 모든 전투기의 속도와 대등했다. 게다가 미 육군 최초로 밀페식 캐노피를 장착함으로써 매우 선진화된 폭격기였다. Y1B-9은 경합의 그날을 위해 외부, 내부 모두 개량을 거듭했다. 경합 전에 미군은 1931년 12월, 8대의 Y1B-9을 주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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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모델 123
그러나 경합에서 승리한건 마틴의 모델 123(Martin Model 123, 이후 B-10이 됨)이었다. YB-9은 속도는 빨랐지만 폭격기로서의 능력에 있어 마틴 모델 123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보잉의 관계자들은 낙담했다. 이겼다 싶은 경합을 마틴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거기에 이 YB-9 시리즈는 보잉의 자금과 민간투자를 활용하여 벌였던 사업이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비록 승자는 마틴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이 B-9 시리즈는 후에 보잉의 폭격기 디자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비록 군용기에서의 경합에서는 마틴에게 패배했지만 보잉은 굴하지 않았다. 보잉은 민간 항공기 시장에서 보잉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할 정도로 혁신적인 항공기를 내놓았는데, B-17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모델 24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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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247
모델 247은 최초의 근대적 민간 항공기라 할 수 있었다. 전금속제의 동체에 캔틸레버식 저익, 완전수납식 랜딩기어, 550마력 쌍발 프랫&휘트니 S1D1 와스프(Pratt&Whitney S1D1 Wasp) 엔진, 3날 고정피치 프로펠러를 갖추고 있었고, 날개의 리딩엣지(leading edge:프로펠러, 날개의 앞쪽 언저리)에 압축공기를 사용하는 제빙부츠(de-icer boots)[4]가 장착되어 있었다.
1933년 2월 8일에 초도비행을 한 이 혁신적인 민간 항공기는, 1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고 75대가 생산되었으며 그중 59대는 유나이티드 항공에 취역하였고 2대는 나치 독일의 루프트한자에 취역하였다. 모델 249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개량되어 사용될 만큼 뛰어난 항공기였다. 이 모델이 모델 299, 그러니깐 B-17의 직계 어머니라 할 수 있을 정도로 B-17은 이 항공기에 결정적인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밖에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계획(XBLR-1)으로 탄생한 XB-15에도 빚을 지고 있었고, 이 계획은 B-29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 계획이었다.
1934년, 미 육군항공대(USAAC)는 B-10 폭격기를 대체할 차기 다발 폭격기 선정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성능을 발표하였다.
첫째, 항속거리는 1,020마일(1,641km)을 충족할 것. ※ 되도록이면 2,200마일(3,540KM)을 충족했으면 함.
둘째. 최고속도는 1만 피트 상공에서 200mph(322km/h)를 충족할 것. 또한 10시간 이상 체공해야함. ※ 되도록이면 250mph(412km/h)를 충족했으면 함.
셋째. 폭장량은 2,000파운드(907kg)이상의 성능을 지닐 것.
넷째. 실용 상승한도는 25,000피트를 충족할 것.
다섯째. 1935년 8월까지는 시제기를 생산할 것.
정확한 엔진수량은 명기되지 않았지만, 미 육군은 다발 폭격기를 원했고, 이 경합에 보잉, 마틴, 더글라스 세 회사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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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공개된 모델 299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 리처드 윌리엄스(Richard Williams)은 여러 기관총을 탑재한 채 대기하고 있던 모델 299를 보고 "비행 요새(Flying Fortress)"라며 감탄했다. 이것은 곧 B-17의 별명의 유래가 되었다.[5]
보잉사는 1934년 6월 18일부터 항공기 설계에 돌입해 1935년 7월 18일, 4기의 750마력 호넷(Pratt&Whitney R-1690-E Hornet) 성형엔진을 가진 시제기 모델 299를 선보인다. 이 모델 299는 보잉의 자신들이 생산, 개발했던 미 육군 최초의 단엽폭격기 B-9와 모델 247, 그리고 장거리 폭격기 계획(XBLR-1)에 참가해 시제 생산한 XB-15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보잉은 이미 4발 폭격기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보잉의 모델 299는 미육군항공대의 요구충족 조항들을 모두 충족했다.
모델 299의 초도비행은 1935년 7월 28일, 보잉의 선행 조종사 레스 타워(Less Tower)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도비행은 성공적이었다.
1935년 8월 20일, 모델 299는 타 경쟁사의 시제기와의 경쟁을 위해 오하이오 데이튼(Dayton)의 라이트필드(Wright Field) 비행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모델 299는 시애틀에서 오하이오의 라이트필드 비행장까지 2,000마일에 이르는 거리를 9시간 동안 235mph(378km/h)의 속도로 날아왔다. 이 뛰어난 성능은 많은 관계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특히 공군 총사령부(GHQ Air Force)의 프랭크 멕스웰 앤드루스(Frank Maxwell Andrews) 장군은 이 모델 299가 미 육군의 차기 폭격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찍이 4발 폭격기의 중요성을 인식해왔고,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육군 항공대는 경합 전에 모델 299를 65대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경합도 하기 전에 성능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모델 299를 살펴보면, 전금속체의 단엽기로 중익을 가지고 있었고, 9개의 실린더에 일렬 방사형(single row radial)식의 프랫&휘트니 R-1690 호넷 엔진 4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엔진들은 스탠다드 헤밀턴사의 지름 3.5m짜리 프로펠러를 달고 7,000피트 상공에서 75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다. 항공기의 (nose)는 유리로 덮여있으며 이는 폭격수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해주었다. 폭탄창에는 2개의 수직 선반이 있었고, 총 4,800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4개의 엔진에 대한 제어는 폭격기 조종간에 보기 좋게 정렬되어 4개의 손가락으로 엔진을 제어할 수 있었다. 폭탄창 뒤에 배치된 무전수는 여차하면 폭격기 보수공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무전수의 좌석 바로위에 기총좌가 탑재되었으며 항공기의 코 아래에도 전방기관총이 설치되었다. 동체의 양옆으로 1정의 기총을 탑재하기 적합한 기총좌가 설치되었으며,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가 놀란 모델 299의 기총 수는 총 5정였다.
라이트필드에서의 경합에 참가한 기체는 다음과 같았다.
Boeing Model 299
Martin Model 146 (B-10의 개량형)
Douglas DB-1(후에 파생형 DC-2 수송기B-18 Bolo가 된다.)
모델 299만 제외하고 모두 전형적인 쌍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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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모델 299
보잉의 모델 299는 타 시제기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으나 길은 순탄치 못했다. 먼저 많은 육군의 관계자들은 4발 폭격기는 쌍발에 비해 둔중할 수밖에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B-17의 2만 달러에 달하는 높은 입찰가격은 육군 관계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프로토타입의 가격은 다른 두 회사들보다 월등이 비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5년 10월 30일, 최종평가 시험에서 추락사고가 일어나 육군 조종사 힐 툭(Hill Took)과 보잉사 시험 조종사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기술진과 탑승객은 부상을 당한다. 이는 지상 정비사가 모델 299의 조종 잠금장치(gust lock)를 해제하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기술진 중에 도날드 푸트 중위는 후에 B-29의 설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Gust lock'은 폭격기가 지상에 계류 중일 때 승강타와 방향타 등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륙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해제시켜야만 했다. 잠금장치를 해제하지 않은 이 불운한 시제기는 이륙하자마자 실속해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불운한 보잉사는 이 사건들로 인해 다 된 밥에 재를 뿌려야만 했다. 경합에서 성능으로 사실상 타 경쟁자들을 눌려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 육군은 더글라스의 DB-1을 선택했다. 보잉에 먼저 주문된 상태였던 65대의 모델 299는 취소되었다. 맬린 크레이그(Malin Craig) 장군의 지도하에 DB-1 133대의 도입이 결정되었다. 다 된 밥에 제대로 죽을 쓴 보잉은 사실상 도박이었던 4발 폭격기 도전에 참담한 실패를 맛보는 듯했다.
하지만 헨리 아놀드(Henry "Hap" Arnold) 장군을 필두로 한 몇몇 장교들은 모델 299의 잠재력을 묵과하지 않았고, 시험 비행이라는 이름하에 보잉에 YB-17이란 이름을 붙이고 13대를 주문했다. 1936년 1월 17일 미 육군에 13대의 YB-17의 납품할 것을 계약한 보잉은 모델 299를 부분 개수해 개량했다. 엔진은 기존의 750마력 호넷 엔진에서 950마력 사이클론(Pratt&Whitney Wright R-1820-39 Cyclone) 엔진으로 변경되었다. 모델 299의 메인휠은 양면의 스트럿 어셈블리(strut assembly)가 장착 되어 있었고, 이것은 스트럿(완충장치)으로 하여금 충격흡수를 어렵게 만들었다. YB-17은 한 면의 스트럿을 가지도록 교체되었고 이것은 또한 타이어의 교체를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밖에 과거의 참사를 예방하기위해 기체점검목록이 만들어지는 등 소소한 개량을 거쳐 1937년 1월부터 육군항공대에 인도가 시작되어 3월 1일, 주문된 13대중 12대가 미국 버지니아 주의 랭글리 비행장으로 수송되었다. 기체들은 제2 폭격단(2nd Bombardment Group)에 소속,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전술 시험에 사용되었다. (기체 점검목록은 후에 다른 모든 항공기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모델 299, 그러니깐 YB-17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6년 12월, YB-17은 앞서 언급한 YB-9과 같은 이유로 Y1B-17로 이름이 변경된 후 12월 2일 초도비행을 실시하고 시험비행을 하고 있었다.
Y1B-17의 심장, 사이클론 엔진은 좀 더 나은 출력을 제공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과열되었다. 1936년 12월 7일, 3번째 비행도중 엔진과열로 인해 이륙했던 Y1B-17의 사이클론 엔진 2기가 과열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종사는 급히 착륙하려 하였으나 랜딩기어 고장으로 동체착륙을 했고, 이것은 미육군항공대로 하여금 더글라스 B-18 볼로 253대를 구매하게 만들었다. 볼로는 DB-1의 파생형 DC-2수송기에서 개량된 것으로서, B-18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Y1B-17의 계약은 파기되지 않았다. 미 국회가 Y1B-17의 성능에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보잉은 모델 299와 그에 대한 개량, 개수에 3,823,807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는 보잉이란 회사에게 있어서 심각하게 무리가 가는 숫자였다. B-17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보잉은 파산했을지 모른다.
1937년과 38년 사이 랭글리 비행장에 있던 Y1B-17은 홍보도 할 겸 아르헨티나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나 페루리마, 파나마,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iero)등 남미 도시들의 순회와 미국 주요 도시들의 순회 비행을 돌았다. 이 과정에서 Y1B-17은 대륙횡단 최단기록을 깨버렸다.
육군 항공대는 오래전부터 육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육군 장교들은 항공단은 오로지 육군의 지원을 위한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개념은 미국 정부미국 해군에게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해군이 육군 항공단의 독립에 관여해 압력을 넣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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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Y1B-17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1938년 5월 이탈리아 왕국의 원양 여객선 Rex[6]호를 시범 요격하는 실험에 성공하고 육군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후였다. 앤드루스 중령[7] 명령 하에 이뤄진 이 작전은 커티스 르메이 중위[8]의 항법지도하에 이루어졌다. 해군은 자신들이 미국의 해안을 지켜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주제넘게 육군의 항공기가 미 해안을 지킨답시고 돌아다니는 꼴은 곱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뜻에서 해군은 Y1B-17이 자신들의 임무영역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해군은 화난 정도가 아니라 노발대발했다. 육군항공대의 Y1B-17은 미국 앞마당에 나간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1,125km를 날아가 REX를 요격했고, 미 해군은 자신들의 몫을 가로챘다고 항의했다. 그 결과 미 육군 항공기는 미 해안으로부터 160km(100마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임무영역이 대폭 축소된 것이었다.
이 규제는 1938년 9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빚어진 뮌헨위기가 지나서야 해제되었다.
지상에서의 실험을 위해 생산된 14번째 Y1B-17은 갈수록 고고도의 작전환경이 요구됨에 따라 R-1820-51 엔진에 배기터빈식 터보차저(Exhaust turbocharger)[9]가 장착, 실험되었다.
이 실험기는 Y1B-17A로 명명되었다. 과급기는 엔진 나셀(nacelle) 상부에 장착되었다. 1937년 말, 비행시험 대기 중이었지만 소진식 터보과급기에 자잘한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실험시기는 늦춰졌다. 엔진 나셀 위에 장착된 과급기는 공기의 흐름을 방해했고, 진동을 일으켰다. 보잉은 이것을 나셀하부에 장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1938년 4월 29일에야 재개된 실험에서 Y1B-17은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주었다. 과급기로 인해 31,000피트(9,450m)의 상승한도가 38,000피트(11,580m)까지 늘어났고 출력 또한 늘어나 속력은 412km/h에서 500km/h 이상으로 빨라졌다. 3만 5천 피트에서 엔진하나를 끄고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미 육군 관계자들은 이 실험 성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이 터보 과급기를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에 적용시켰다.
역시나 여담이지만 보잉은 이 개량형에 다시 1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것은 터보차저에 대한 개량을 전적으로 보잉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회사로서는 치명적이었다.

3. 'B-17'의 각 형식



3.1. B-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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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3일, 이미 육군 항공대는 보잉과 터보과급기가 장착된 B-17에 대한 계약을 한 바 있었다. 10대를 주문한 육군 항공대를 위해 보잉은 Y1B-17A에 개량을 하는데, 이것은 주로 기체의 생존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1935년까지만 해도 B-17의 방어무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보잉과 미 육군 항공대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B-17의 생존성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걸 절감했다.
1938년에는 미국을 방문한 영국 공군 준장 아서 해리스가 B-17을 시찰하다 무장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재설계 된 기수는 투명도가 높고 내열 밑 충격에 강한 플렉시 유리(Plexi glas)로 대체되었고 기수의 버블형 회전총안이 볼 소켓형식으로 교체되면서 전방에 설치된 7.62mm 기관총의 사용이 좀 더 용이해졌다. 또한 주 조종실공간 확장과 기체 상부를 관측할 수 있게 캐노피 후미에 방탄유리를 이용한 돔(Dome)형 캐노피를 추가 설치하였다. 폭격수의 활동성을 위해 좌석을 기수앞부분으로 옮겼으며 평면으로된 전용관측창이 설치되었다.
그밖에 항법사의 위치가 더 나은 시야를 위해 조종사 뒤쪽으로 배치되었고 방위측정용 DF 안테나가 동체 하부로 이동되었다. 엔진 나셀 하부에 위치했던 에어스쿠프와 배기구가 측면 및 하단으로 변경되었다. 플랩(Flap)과 방향타의 크기를 늘리는 개량을 했고, 연료장치가 개선되는 등 소소한 개량과 설계변경을 거쳤다.
육군 항공대는 이것을 B-17B라 명명했다. 육군 항공대는 이후 29대의 B-17B를 주문했다. 바야흐로 우여곡절을 끝내고 B-17이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직 숫자면으로서 한참 부족했다.
B-17B가 초도비행에 성공한 것은 1939년 6월 27일이었다. 39대의 B-17B는 1939년 7월 생산이 시작되어 1940년 3월에 모두 납품되었다. 이 폭격기들은 2개의 폭격그룹으로 분리되어 하나는 대서양 해안에, 또 하나는 태평양 해안에 배치되었다.

3.2. B-1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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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B가 초도비행도 실시하기 전에, 이미 육군항공대는 1938년 9월, 38대의 B-17 강화형 B-17C를 주문한 상태였다. 이 B-17C는 모델 299H형의 변용형으로, B-17C는 생존성이 강화된 모델이다.
동체 양 옆의 사수석의 창이 동체 뒤쪽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물방물형 창으로 바뀌고, 동체 상부의 총좌는 개폐식 플랙시 글래스로 바뀌었다. 동체 하부의 총좌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놓은듯한 욕조 모양의 총좌로 바뀌었고, 사수는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총을 쏘는 방식이었다. 기수의 싱글 소켓의 총탑이 삭제되고 기총은 기수 양옆으로 배치되었다.
1940년 12월 21일 발주를 시작으로 영국군형 20대, 미군형 18대로 38대만 생산되었고 1941년 3월부터 영국에게 공여되어 '포트리스 I'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3. B-1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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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D는 미국에 남은 18대의 B-17C의 개장형으로, 엔진 덮개의 플랩이 설치되어 엔진의 냉각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장갑의 향상으로 인한 방호력 증가와 12V에서 24V로 전환한 전자장비 시스템의 개량. 더불어 연료 탱크의 개량과 외부 폭탄창의 받침대 삭제, 저압산소 시스템의 장착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B-17D는 1941년 2월 3일 초도비행을 가졌으며 같은 해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42대가 생산되었으며 생산된 7할이 태평양에 배치되었고 하와이에도 배치되었는데, 1941년 11월 일본군진주만 공습 때문에 18대가 파손되었다.

3.4. B-1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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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E는 B-17 시리즈에서 최초의 대량 생산형 버전이었다. 엔진이나 기타 기본 장비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우선 지난 모델 299계열보다 7이나 몸집이 불었고, 동체는 3m 길어졌다. 또한 수평꼬리 날개가 대형화되어 조종성이 향상되었고 수직안정판이 대형화되는 등 이전 버전보다 대형화되었다. 늘어난 동체 덕에 후방에 후미 총좌가 신설되었고 무전수실 상부와 조종실 후미에 2연장 50구경 총좌가 생겼고, 동체 측면의 물방울형 사수창이 사각형으로 교체되었다.
B-17C부터 내려온 동체 하부의 욕조 모양 총좌가 삭제되고 벤딕스 50구경 2연장 회전총탑이 신설되었는데, 안에서 원격 조종하는 본격적인 볼 터렛이었지만 잠망경으로 조준하는 탓에 사수들은 극단적인 멀미 증세를 참아내야 했다.
113번째 생산된 B-17E부터 유압으로 움직이는 격납식 스페리 반구형 총탑으로 교체되었지만, 터렛의 크기가 매우 작아서 거의 구겨지다시피 해서 들어가야 하니 매우 불편했을 뿐 아니라 타 보직에 비해서 생존률도 더 떨어졌다. 요격기들이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위치기도 하고 격추될 경우에 탈출하기도 제일 힘든 위치인데다가 터렛이 특정 방향을 향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한 B-17이 볼 터렛이 고장나 안의 사수가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랜딩기어도 고장난 상황에 처했다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체착륙을 했고 터렛에 갇힌 사수는 기체에 깔려 죽었다는 이야기다. # [10]
이 스페리 총탑은 B-24에도 사용된다.
승무원은 총 10명으로, 기수의 총좌와 상부총좌는 특별한 사수가 맡지 않았고, 기수총좌는 항법사나 폭격수가, 상부총좌는 항공기관사가 맡았다.
1940년 말부터 미 육군 항공대는 277대의 B-17E를 주문하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생산은 지연되었고 1941년 9월 21일부터 다시 생산이 시작되었다. 총 512대가 만들어졌고, 곧바로 1942년 8월 17일, 제97 폭격비행단(BG)에 배속되어 프랑스하늘을 날았다

3.5. B-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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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 시리즈의 본격적인 양산 버전으로. 무려 3405대가 생산되었다. 전시생산을 맞추기 위해 B-17F 부터 회사 간 본격적인 분담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보잉, 록히드의 베가, 더글러스의 B.V.D가 맡았고, 이런 생산라인은 다른 폭격기 생산에도 이어진다. 보잉은 캔자스의 위치타, 더글러스는 캘리포니아산타 모니카, 그리고 B-17 생산을 위해 새로 만든 롱비치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B-17E부터 고안되었으나 두 회사는 당시 참여하지 않았다. 보잉이 2,300대, 록히드의 베가공장이 500대, 더글러스의 롱비치 공장이 605대를 생산했다.
B-17F는 B-17E 초기 버전의 확장 버전이라 할만큼, 외관상 E형과 뚜렷한 차이는 없으나. 오직 기수의 디자인 변경만이 주요한 개량의 특이점이다. 기수의 플렉시 글래스를 나누던 금속 뼈대가 사라지고, 원통형의 유리가 기수 전체를 덮게 되었다.
기수의 측면사수의 사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유리를 좀 더 늘렸고, 후기형에 이르러서는 바깥으로 튀어나온 형태의 "Cheek"형 총좌로 바뀌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후기형에서 기수를 보호하기 위해 기수 아래에 "벤딕스" 총좌가 설치되었고, 이것은 B-17G형에도 이어진다.
최신형 라이트 R-1820-97 사이클론 엔진이 탑재되었으며 폭이 더 넓어진 프로펠러날을 새로 탑재하여 비행성능이 훨씬 향상되었다.
사이클론 엔진은 이륙시 1,200마력의 힘을, 고공 2만 5천 피트에서는 1,000마력의 성능을 내었으며 최고속도는 2만 5천 피트에서 299mph(약 491km/h)의 속도를 내었고, 비상시 최대출력을 높였을 때 2만 5천 피트에서 1,380마력을 내며 325mph(520km/h)의 속도를 냈다. B-17F의 무게는 6만 5천 파운드에서 후기엔 7만 2천 파운드로 늘어나지만, 그 전의 B-17 시리즈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른바 "도쿄 탱크"라 불리는 외부 연료 탱크와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의 장착과 함께 항속거리가 6,791km로 늘어났으며 외부 폭탄렉(외부 폭탄창 좌우 각각 2000파운드 적재)으로 인해 폭장량도 10000파운드로 늘어났다. 1942년 5월 30일, 하늘을 난 B-17F는 곧바로 유럽의 B-17E를 밀어냈으며, 1943년 1월 27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공습때 처음으로 참여했다.유명한 멤피스 벨의 기체 또한 B-17F이다.

3.6. B-1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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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잡스러운 B-17의 후기 시리즈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B-17 시리즈의 최종 개량형이며, 가장 많이 생산되었고 가장 많이 활약한 기종이다. 보잉이 4,035대, 더글러스가 2,395대 록히드가 2,250대를 생산하여 총 8,680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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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G의 샤이엔 총좌
B-17F 후기형부터 고정화된 기수 하부의 벤딕스 총좌는 고정되었으며. 후미총좌는 '샤이엔'이란 별명을 가진 와이오밍 유나이티드 항공사가 개발한 좀 더 시야가 넓어진 신형 후미총좌가 신설되었다. 샤이엔은 종전의 링형 조준기를 대신해 신형 투영조준기가 장착되었다. 고고도에서의 추위를 방지하기 위해 밀봉형 총좌가 설치되었다. '포메이션 스틱'이라 불리던 전기구동식 조종간도 도입되어 고고도에서의 조종성이 향상되었다.
생산형 후기엔 나란히 일렬로 배치되었던 측면사수창이 사격시 사수끼리 방해받지 않기 하기 위해 우측 총좌가 약간 전방으로 옮겨졌고, B-17E형부터 내려온 무전수 상부 총좌가 폐지되었다.
G형은 총 13개의 총좌를 가지고 있었으며, 50구경 기관총은 개량된 K-6 총탑을 사용하였다.
강력한 1,200마력 Wright R-1820-97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제너럴 일렉트릭의 B-22 터보슈퍼차저를 장착, 2만 5천 피트에서도 1,0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고, 2만 6천 5백 피트에서 1,380마력을 낸 적도 있으며, 속도는 평시에 2만 5천 피트에서 약 423km/h, 비상시에 3만 피트에서 482km/h를 내었으며, 일반적인 순항속도는 2만 5천 피트에서 240km/h이었다.
다만 상승한도는 F형보다 떨어졌다. 1,300km 순항시 2,000kg(4,500파운드), 600-700km 사이의 단거리 폭격시에는 4,500kg(9,000파운드)의 폭탄을 적재하였다. 1943년, 미 제 8공군과 제 15공군에 소속되었으며, 영국공군은 연안 방어를 위해 85대를 도입, '포트리스 III'라 불렀고 영국공군 제 100비행대대(100SQ)에서는 밴딕스 총좌자리에 구름을 뚫어볼수있는 H2S BTO(Bombing Through Overcast) 레이더를 장착, 야간폭격에 써먹었으며, 조기경보기 역할도 하였다. 연안 경비 사령부 또한 수색레이더를 탑재해 잠수함 탐색에 써먹었다.
B-17G는 'BQ-7'이란 무선 유도폭탄으로 개조되어, 이른바 아프로디테 계획에 사용되었다. 조종사가 목표지점에 이 폭탄 비행기를 몰고 간 후, 적정한 궤도에서 조종사 둘은 탈출, 비행체는 다른 모기에서 무선조종되어 목표지점에 2천 파운드의 폭약을 싣고 자폭하는 계획이었는데, 기술적인 한계와 오발 우려로 사장되었다.
B-17G는 나치독일에게도 노획되어 KG-200 비행단에서 훈련, 혹은 적을 교란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보잉이 1945년 4월 13일을 기점으로 생산을 중단하였으며, 록히드의 베가공장이 1945년 7월 29일 마지막 B-17G를 생산하면서 사실상 B-17의 생산은 종결되었다. 전후에 이스라엘군이 3대를 사용했고 한국전쟁에 정찰형과 해상구조용(B-17H, SB-17로 개칭)이 투입된 후 전장에서 자취를 감춘다.

3.7. Boeing 307 스트라토라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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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기 형식으로 소음을 빼면 큰 문제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3.8. XB-38


앨리슨 액랭 엔진 장착 개량형이다.

3.9. YB-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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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쉽으로 쓰려고 만든 B-17의 개량형. 보통 운용시엔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18정을 달았는데, 최대 '''30정'''까지 달 수 있었다고 한다.
"Y"자가 붙어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제식채용 되지 못한 일종의 시험기로, F형을 개수하여 25대가 제작되었다.
P-51처럼 독일 상공까지 폭격기를 호위해 줄 장거리 전투기가 아직 배치되지 못한 상황에서, 중무장한 폭격기를 이용해 호위를 해보려는 일종의 궁여지책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기총과 포탑을 증설한 탓에 중량과 항력이 늘었고, 특히 다른 폭격기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많이 탑재할 수밖에 없었던 기관총 탄약의 무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쳐서, 상승률이 반토막이 날 정도로 비행성능에 애로사항이 꽃피었다고. 게다가 폭격을 마치고 귀환할 때는, 다른 폭격기들은 폭탄을 투하하고 가벼워진 상태로 비행하는 동안, YB-40들은 기총과 탄약의 무게로 다른 폭격기들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해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48회의 출격에서 5기의 독일전투기를 격추했고, 2기의 격추 가능성을 보고했으며, YB-40은 1기를 손실했다.
그러나 폭격기 기체에 단지 더 많은 대공무장을 장착하는 식으로는, 폭격대에 대한 독일전투기의 위협을 줄이는 것에 들인 공에 비해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전반적으로 실망스런 결과를 거둬 정식 채택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건진 것이 있다면, YB-40 운용을 통해 얻어진 경험들이 B-17 후기형에서 도입된 주요 방어무장의 개선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 가장 대표적인 것이 F형 후기모델과 G 형의 표준 무장으로 채택되는 기수하면의 벤딕스 터렛. YB-40에서 처음 사용된 벤딕스 'Chin Turret'이, F형 전기 모델들 까지의 12시 방향 헤드온 공격에 대한 취약성을 극복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이후 모델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그 외에도, 나란히 배치되어있던 동체 측면 총좌가, 사수들이 서로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좌,우 총좌가 약간 어긋나게 배치되도록 바뀐 것, 후미 총좌의 시계를 넓혀 좀 더 효과적인 대응을 하게 개선한 것 등도 YB-40을 통해 시험되어 이후 F형 후기모델 및 G형에 도입된 개선책들이다.

4. 실전투입



4.1. 유럽전선


B-17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1941년 7월 8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에서 영국에게 공여된 B-17C '포트리스 I'이었다. 포트리스 I은 B-17C의 성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독일 요격기를 피하기 위해 적정고도보다 높은 3만 피트에서 독일 해군 병영을 목표로 폭격을 실시하였으나 당연하게도 폭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높은 고도에서의 낮은 기온 때문에 기관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이후 7월 24일에 다음 목표에 대해 다시 한 번 폭격에 들어갔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9월까지 영국 공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8대의 B-17C를 잃었고,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B-17C의 주간 폭격을 금지하였다.[11] 미군만큼은 B-17C의 강력한 방어력에 주목, 주간 폭격을 중지하진 않았지만, 영국 공군이나 미 육군 항공대나 B-17C가 더욱 개량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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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
그러한 고고도에서의 명중률은 노든 폭격조준기[12]의 본격적 배치로서 어느 정도 향상되었다.
1904년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칼 노든(Carl Norden)이 1921년 개발을 시작해 1931년 완성시킨 것으로, 이후 개량이 이어져 마크 16(Mark XV)에 이르러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공할 만한 성능의 조준기를 완성시켰다. 폭격수 교육만 16주가 필요한 이 물건은 원형공산오차(CEP) 30m 안에 100발을 정확히 꽂아 넣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가공할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압이나 고도 등 폭격에 필요한 수치를 조준경에 입력하면, 조준경 내의 회전 안정식 컴퓨터가 입력된 정보를 종합해 최적의 폭격 정보를 산출했고, 그에 따라 폭탄을 떨어뜨리면 되는 획기적인 장비였다. 이렇기에 초기의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대량생산된 노든 폭격 조준기는, B-17 뿐만 아니라 B-24나 B-29 등 여러 폭격기에 쓰였으며 베트남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이후, 제8공군은 1942년 5월 12일, 영국 하이 위컴(High Wycombe)에 도착하여 제97폭격단을 조직하였다. B-17E로만 이루어진 이 폭격단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엄호를 받으며 프랑스 루앵소트빌(Rouen-Sotteville)의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으며, 이 폭격은 전래의 B-17의 성과와 비교해 큰 전과를 냈다. 이 폭격에서 단 두대의 B-17E만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스핏파이어와 연계한 호위 폭격 작전이 이루어졌고, B-17이 개량되어 가면서 폭장량도 늘어나 독일에 대한 더욱 활발한 공습을 가능하게 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B-17을 야간에 쓸 것인가, 주간에 쓸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였으나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Casablanca Conference)에서 합의점을 이끌어내어, 보다 본격적인 공습이 이루어졌다.
영국군 소속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의 공조는 B-17의 생존성을 보다 높여주었지만, 요격기가 베이스인 스핏파이어의 항속거리는 B-17을 끝까지 호위하기엔 당연히 부족했기에 언제나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스핏파이어 보다 상대적으로 항속거리가 긴 P-38 라이트닝, P-47 썬더볼트가 호위임무에 투입되었지만 폭격편대의 전체 행적을 따라가기엔 항속거리가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술적 약점은 해소되지 않았다.
폭격의 목표가 프랑스 점령지내 독일군 일선 거점에서 독일 본토 내 산업 시설로 바뀌면서 폭격기들은 더욱더 위험에 노출되었고 1943년 4월 17일, 브레멘(Bremen)의 Fw190 전투기 생산공장을 폭격하는 도중에 115대의 폭격기 중에서 16대가 손상되고 48대가 파손됨을 시작으로, 이른바 "검은 목요일"이라 불린 1943년 10월 14일,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 폭격에서 291대의 B-17 중에서 77대가 격추당하고 122대의 폭격기가 손상을 입었으며, 2,900명중 650명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
이는 B-17을 끝까지 에스코트할 전투기의 부재로 인한 현상으로, 루프트바페호위기가 사라지면 늑대 떼처럼 올라와 B-17을 물어뜯었다.
미 육군 항공단은 자체조사 결과, 피격당한 B-17의 대부분이 무리를 이탈했다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누우처럼, 진형에서 벗어나 변을 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상자형 폭격 대형"을 구상했는데, 상차처럼 조밀하게 밀집해 자체 방호 기관총으로 일종의 십자포화를 구성하고, 적 전투기로 하여금 쉽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형은 폭격기로 하여금 직선으로만 진행하게 하여 회피기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대공포의 좋은 먹잇감이 됨과 동시에 독일이 새로운 공격전법으로 맞서자 B-17의 손실률은 25%까지 치달았다.
때문에 미 육군 항공대영국 공군은 적당한 호위기가 배치될 때 까지 B-17의 주간 폭격을 잠정 중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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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이 다시 주간에 고개를 내민 것은 신형 전투기, '''P-51 머스탱'''이 전장에 등장하고 나서부터였다. 약 3,700km에 이르는 긴 항속거리를 지닌 머스탱은 폭격기의 폭격 전 과정을 호위할 수 있었고 1944년 2월 24일, 4달 전에 폭격을 시도했다가 사실상 실패한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공습에서 231대중 단 11대만이 손실되었으며 3,500대의 B-17 중에 단 244대만이 격추되었는데, 이는 손실률을 7%로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 주는 대단한 주(Big week)라 불리며 호위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증명했다.
B-17의 생존성은 매우 뛰어나서, B-17 조종사였던 월리 호프먼(Wally Hoffman)은 적의 포화로 비행기가 거의 박살이 나도 승무원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할 정도였으며, Fw190의 충돌 전법으로 엔진이 박살나고 좌우측 안정기가 작동 불능이 되었음에도 멀쩡히 귀환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다. 기록에는 엔진 1기만 작동한 상태에서 귀환한 기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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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1일, 튀니지 상공에서 독일군의 Me109 전투기와 충돌로 대파된 제 97폭격비행단 414비행대 소속 B-17F기 "All American"의 모습. 꼬리날개를 포함한 기체 후미 전체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인 상태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충돌 부분 바로 옆에 있던 후방기총수를 포함, 전 승무원이 무사한 상태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및,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
Fw190를 몰던 어느 조종사는 B-17을 처음보고 "과연 저걸 내 '''알량한''' 전투기 무장으로 격추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Fw190의 화력은 최소 7.92mm 기관총에 20mm 기관포 4문, 최대 13mm 기관총에 20mm와 30mm 기관포를 2문 장착했다. 여기에 미넨게쇼스 같은 뛰어난 성능의 기관포탄까지 달아놓은 탓에, 이놈들이 불을 뿜어대면 어지간한 폭격기들도 한큐에 작살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Fw190의 무장을 알량하다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하늘의 요새다웠다.
결국 포케볼프의 조종사들은 B-17의 압도적인 방호력에 질려 다른 부분에 대한 공격을 삼가고 오로지 폭격기 기수 부분만을 공격했으나, 기수가 거의 박살난 상태로도 귀환하는 B-17도 많을 정도로 B-17은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후에 30mm MK 108 기관포나 R4M 로켓의 등장으로 B-17은 더욱 더 쉽게 격추되었지만, 이미 대전은 끝나 가는데 그러한 독일 공군의 노력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45년까지 B-17은 사실상 독일 하늘을 "지배"했으며, 본격적인 폭격기간인 44년 말에서 45년 초까지 B-17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유럽 전선에서 B-17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총 33개 비행단의 총 12,731대가 배치되었고, 유럽에서의 폭격에서 640,036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으며, 이는 B-24가 투하한 452,508톤보다 많고, B-25 같은 다른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의 합계인 463,544톤보다 많았다. 총 12,731대 중에 3분의 1인 약 4,500여대가 격추되었고, 또한 승무원의 피해도 다른 폭격기보다 훨씬 많았다.
독일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영국으로 귀환한 B-17이 있었다. 1943년 12월 20일, 찰스 브라운 중위가 지휘하였던 B-17F 'Ye olde pub'은 좌측 수평미익이 거의 떨어져 나가고 수직미익이 심한 손상을 당했으며, 엔진 하나가 멈춘 상태에서 귀환하던 도중, JG-27 전투비행단 1연대의 지휘관인 프란츠 스티글러 중령이 조종하는 Bf-109에게 추격당하였다. 후방 기총 사수는 사망했고 나머지 사수들도 동상이나 파편상을 입어 반격할 힘이 없었던 B-17에게 접근한 프란츠 스타글러 중령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미군 승무원들을 보았다. 프란츠 스타글러 중령은 B-17이 도버해협을 건널 때까지 항로를 유도하였고, 헤어질 때는 경례를 올렸다. B-17의 기장이었던 찰스 브라운 중위는 그 Bf-109의 기체번호와 부대표식을 기록하였고, 그의 B-17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찰스 브라운 중위는 그 독일군의 조종사를 찾았고 1990년에 그들은 참전 미군들의 모임에서 다시 재회하였다.

4.2. 대서양 전선


B-17 개발의 본래의 취지였던 대서양에서는 단 5개 비행대 168대의 B-17만이 운용되었다. 2차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해상을 건너 미국 본토를 침공하는 적 해상세력' 이래봤자 일시적으로 미 본토 연안에서 수송선을 상대로 분탕질하던 독일군의 유보트를 빼면 사실상 없었고 이들에 대한 장시간 해상초계임무에는 항속거리가 더 긴 B-24가 대거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4.3. 태평양 전선


유럽전선은 적성국 점령지에서 가까운 곳에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적성국의 본토를 공격범위에 넣을 수 있어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적성국의 주요 전략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가능했지만, 태평양 전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본 본토를 위협할만한 태평양 상의 섬들은 개전하자마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고, 일본 북방영토와 가까운 알래스카와 그 일대는 전투 이전에 당장의 생존부터가 급급한 열악한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어서 대규모 전초기지를 마련할 수 없는 곳이었다.[13] 중국 역시 일본 본토와 가까운 동부 지역 일대는 2차 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있었고, 소련은 대 일본전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중국과 소련을 기지로 삼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때문에 태평양 전선의 미군 폭격기 세력은 전쟁 기간 전반에 걸쳐 일본군 일선 기지에 대한 공격, 일본 함선 공격이나 항로 방해 등을 주로 맡았다. 게다가 상대방인 일본군의 경우 독일군과 달리 고고도 전투능력이 취약했고, 광활한 태평양[14] 위에 드문드문 있는 거점이나 이동 중인 함대를 상대로는 비행시간과 항속거리가 더 중요했다. 이런 전술적 상황에서는 B-17에 비해 상승고도는 낮았느나 항속거리는 더욱 긴 B-24가 각광받았다. 때문에, 태평양에서 B-17은 유럽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투입도, 눈에 띄는 전과도 없었으며, 태평양 전쟁 초기 남방전선에서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다 파괴된 B-17들을 제외하면 다른 전투에서 B-17을 대거 손실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유럽전선과 같은 적성국 본토의 전략시설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곳에 거점을 마련하게된 전쟁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뤄졌지만 그나마도 유럽전선에서의 영국-독일간 거리하고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출격기지-목표간 거리가 멀었기에 B-17, B-24보다 훨씬 긴 항속거리를 가진 신형 폭격기 B-29가 전담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B-17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선에서 B-17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연급으로 밀려나버렸다. 실제로 전쟁 기간 중 태평양 전선 미군 중폭격기의 주력은 B-24로 바뀌었고, 이 B-24들은 전쟁 막바지에 일본 본토 공습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전쟁 초, 중반의 미약한 활약으로도 B-17의 작전고도와 견고함과 방어화력은 상대방인 일본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43년 6월 16일 19정의 기관총을 탑재하도록 개조된 B-17E '올드 666'은 자원한 승무원들과 함께 부겐빌 섬과 부카 섬의 상륙작전에 쓰일 지도작성을 위한 사진 촬영 작전에 동원되었는데, 호위기 없이 단독으로 비행한 B-17에게 일본 전투기가 무려 17대나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격차였지만 승무원들은 작전을 포기하지 않고 분전했으며[15] '''무려 45분간'''[16] 이어진 일본기들의 공격을 모두 버텨내고 오히려 3기의 A6M과 1기의 100식 사령부 전투기(Ki-46)을 격추했다. A6M들은 연료가 다해 후퇴했고 B-17은 결국 임무를 완수했는데, 착륙하고 살펴보니 무려 180여발의 기관총탄과 6발의 기관포탄이 박혀 있었다. 9명의 승무원 중 6명이 사상했으며 그들은 공로를 인정받아 조종사인 제로니모와 최후까지 분전했던 폭격수 조 사노스키는 명예 훈장을, 나머지 승무원들 또한 청동 무공 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
이런 극적인 전공을 빼더라도, 대체로 일본군 전투기들은 라바울 같은 일선 기지나 수송함대를 공습하러 온 B-17을 제대로 저지 못하고 결국 두들겨 맞는 걸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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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에서 일본군 수송함대를 도륙낸 물수제비 폭격(Skip Bombing) 전술은 미 제5공군 소속의 조지 케니(George Kenney) 중장이 도입한 새로운 폭격전법으로(도버 해협을 도약폭탄으로 터뜨린 바니스 월리스가 최초) 고고도에서의 수평폭격으로는 명중률이 1%도 채 나지 않았던 것을 물수제비 뜨듯 폭탄을 수면에 튕겨 공격하는 전법을 창안해냈다. 실전에서는 B-25나 A-20 같은 쌍발 중형 폭격기가 전담하였지만, 전술 개발 단계에서는 B-17이 이용되었는데, 1943년 12월 23일 실험에서 제64비행대의 B-17 12대를 이용하여 각각 10,000피트와 1,000피트에서 선박의 용골을 공격하는 실험을 가하였다. 그 결과 물수제비 폭격의 효율성이 증명되었지만 B-17같은 중폭격기로는 물수제비 폭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확인되어 실행 기체가 바뀌었다.[17]

4.4. 2차 대전 중 추축국이나 타국에 노획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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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게 노획된 B-17F-27-BO
독일은 노획한(프랑스나 덴마크 연안에 불시착한 기체를 복구한 다음 써먹었다.) B-17을 특수작전에 써먹었고, 'Do200'이라 불렀다. 잘 알려진 독일의 B-17 부대 KG200[18]은 무전 방수를 이용해 연합군인 척 하면서 B-17의 박스 편대 하부에 접근한 다음 독일군의 요격기와 전투기들에게 편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활동하였다.[19] 이후 그중 몇 기는 유럽으로 진군한 연합군에게 다시 흡수되었다. 다만 위 사진의 기체는 1944년 6월 27일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의 발렌시아 군공항 근처에 불시착하였고, 기체와 조종사들은 스페인에 억류되었다. 이후 조종사들은 전쟁 후 모두 풀려났지만, 해당 B-17의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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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노획된 B-17D
일본군 또한 한대의 B-17D와 두대의 B-17E를 노획했는데, 대 B-17 전술의 시험에 써먹기도 했고 기술적 연구를 시행하기도 하였으며, 역설계에서 얻어낸 기술을 토대로 G8N 렌잔을 개발하였다. 하지만 성능은 원본에 크게 못미쳐서 비행성능은 얼추 비슷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폭장량은 반토막 났다.
여담으로 이때 최고등급 기밀이었던 노든 폭격조준기가 일본에게 넘어갔지만 다행스럽게도 기술력이 딸려서 복제는 못하고 조악했던 일본군 폭격조준경[20]에 약간의 개량정도만 할수있었다. 독일 또한 노든 조준기의 설계를 전쟁 전에 빼돌렸는데[21] 역시 완전한 복제는 못했지만 복제한 물건을 잘 써먹었다.
이외에도 유럽 전선에서 장거리 폭격 임무의 일환으로 소련군 기지에 착륙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귀환하지 못한 기체들이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 연구에 동원되었고, 중립국인 스위스 영공을 침범하였다가 나포 또는 불시착하여 스위스군에 편입된 기체나[22] 여객기로 전용된기체도 있다.

4.5. 2차 대전 종전 후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군의 B-17들은 일선 전투임무에서 해제되었다. 하지만, 사진 정찰기형(RB-17)과 대형 구명보트를 탑재한 항공구조형(SB-17)은 미 육군항공대가 미 공군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정찰, 해상 조난자 구조, 요인 수송 등의 임무에 계속 사용되었고,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었다. 그 외에 각종 시험 임무에도 동원되었으나, 1960년이 되기 전에 미 공군에서 모두 퇴역하였다.
미 해군의 경우 1944년에 해상 초계 및 조난자 구조용으로 도입하였으며 1945년 7월에 이들을 PB-1으로 명명한다. 임무 특성상 상대적으로 효용이 적은 방어기총들은 제거되고 대신 연료탱크가 늘어났으며, 일부는 동체 아래에 대형 레이더를 탑재한 PB-1W로 개조되었다. 이들 기체들은 1950년대 중후반까지 사용되었다.
미 해안경비대는 1945년 7월에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PB-1 일부를 인수하여 해난 구조용이나 기타 임무에 사용하였다. 이 기체들은 1950년대 말에 퇴역하였다.
B-17 역시 전후에 많은 미국 병기들이 그랬듯 상당히 많은 수가 타국으로 수출/공여되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기 판매 금지법을 피하기 위해 밀수입을 감행해 3대의 B-17을 빼돌렸고, 브라질, 프랑스, 소련, 도미니카 공화국 등 다양한 국가들이 B-17을 50년대 중후반까지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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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9년 10월 2일, 1944년 제작된 B-17 한대가 코네티컷주 브래들리 공항에서 이륙 후 9분만에 추락하였다. 운항 요원 외 비행 체험 탑승자를 포함한 총 13명 중 기장, 부기장 등 7명이 사망했다. 군에서 오래 전 퇴역한 당시 기장은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우측 4번 엔진의 점화가 요동친다고 관제탑에 보고 후, 바로 회항하여 긴급 착륙을 시도하던 중 지상에 거의 이르러 추락하며 공항 지상물과 충돌로 화재와 함께 대파됐다. 2020년 5월 NTSB가 발표한 중간 사고조사 보고에서 4번 엔진 점화용 자석발전기에서 매우 허접한 보수 흔적과 다수의 점화 플러그에 간극 이상이 발견되었고, 좌측 3번 엔진의 모든 점화 플러그 상태 역시 작동이 불가할 수준이였다면서 전반적으로 엔진 점화장치의 심각한 부실 정비가 사고의 원인임을 밝혔다. 이로써 '''10대''' 남은 B-17중 한대가 사라졌다.
참고로 본 기는 B-17 909기로, .50구경 방어기총 소사도 가능하였으며 탑승객에게 사격 기회도 주던 기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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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전의 모습. 2002년에 찍힌 사진이다.

5.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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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G 기준)
'''승무원'''
10명
'''전장'''
74피트 4인치 (22.66m)
'''전폭'''
103피트 9인치 (31.62m)
'''높이'''
19피트 1인치 (5.82m)
'''익면적'''
1,420제곱피트 (131.92제곱미터)
'''공허중량'''
36,135파운드 (16,391kg)
'''만재중량'''
54,000파운드 (24,500kg)
'''최대 이륙중량'''
65,500파운드 (29,700kg)
'''엔진'''
4x 라이트 R-1820-97 사이클론 레시프로, 기당 추력 1,200마력 (895kW)
'''최대속도'''
249노트 (462km/h, 287mph)
'''순항속도'''
158노트 (293km/h, 182mph)
'''작전반경'''
2,000마일 (3,219km, 1,738nmi)
'''항속거리'''
5,420km<-영문위키등에도 없는 자료임 런던에서 베를린까지가 약 900km 위 작전반경 3200이 6000파운드 폭탄장착후 거리임을 생각하면 그중량을빼면 어느정도 거리가 늘어날수는 있지만..위키러의 추가 설명이 필요함
'''실용 상승한도'''
35,600피트 (10,850m)
'''상승률'''
분당 900피트 (4.6m/s)
'''익면하중'''
제곱피트 당 38파운드 (제곱미터 당 185.7kg)
'''추중비'''
0.089마력/파운드 (150W/kg)
'''무장'''
13x 12.7mm 기관총
최대 17,600파운드(7,800kg) 탑재 가능

6. 미디어에서


  • 'B-17 Flying Fortress: The Mighty 8th'라는 게임이 있다. 대놓고 "이 게임은 B-17 시뮬레이션이요~" 하는 놈이다. 이륙부터 귀환까지 머리 싸잡고 쥐어뜯게 만드는 괴물이다. 너무 현실적으로 해서 IL-2(게임) 시리즈를 즐기는 유저 중에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23]
  • Bomber Crew의 DLC 'Bomber Crew: USAAF'의 핵심 폭격기로 등장한다.

  • 멤피스 벨(영화)에서 주연 대원들의 탑승기로 등장한다.
  • 문명 5에서 폭격기를 대신하는 미국의 특수유닛으로 등장한다.
  • 삼국지 천명에서는 유비군 폭격기로 나온데, 날개가 위로 접혀 격납된다.
  • 430달러를 내면 25분간 체험 비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홈페이지)
  • 국군방송에서 방영한 영화 종전을 향한 대공습에서 전투기로 그리고 기관총을 추가로 달아서 지상지원이 가능하게만든 폭격기(건쉽)를 공격헬기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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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E'''
'''B-17E 후기형'''
'''❁B-17E'''
'''B-17G-60-VE'''
  • 워 썬더에선 B-17E, B-17/L, B-17G형이 등장한다.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D형과 G형이 각각 미국 폭격기 트리의 5티어와 6티어로, 사령부 호출 폭격기로서는 7티어와 10티어로 등장한다.
  • AVGN이 인텔리보이스 리뷰를 할때 잠깐 언급한 B-17 폭격기 란 게임도 유명하다. 시작할때의 괴상한 전자음 보이스가 인상적이다. AVGN이 BByee SSevventween BAWMER!! 라고 따라한다. 패러디도 나왔다. B-17 폭격기에 당황하고 다른 게임을 고르려고 하는데 죄다 B-17 폭격기만 나온다.
  • SD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종티어 공중유닛으로 등장한다. 지상 공격만 가능하고 사거리가 매우 짧다.
  • 마피아2에서 편대비행하는 애들이 초반에 잠깐 등장. 그 후로 1950년대까지 하늘에 한 대씩 돌아다닌다.
  • 뜬금없이 숙취 해소제 광고에 등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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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 폭격기
  • 항공 병기/세계 대전
  • 보잉
  • Pe-8
  • MG-100 스타포트리스 SF-17[24]








[1] 캔틸레버식 날개 : 널빤지처럼 생긴 구조로 날개가 모든 힘들 다 받는 구조이다. 현대항공기에서 많이 쓰인다.[2] Y1은, 정식 즉, 정상적인 회계 연도의 군수품조달이 아닌, 외부 자금조달에 의함을 의미함.[3] 스트림라이닝(Streamlining) : 둥글둥글하고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어는 유선형의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Streamlining은 20세기 초, 선박, 항공기, 자동차 등에서 항공역학, 유체역학적인 성능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유선형의 "미래 디자인"은 후에 선박이나 항공기뿐만 아니라 냉장고와 같은 가전적인 분야로 확대되었다.[4] 제빙부츠(de-icer boots) : 팽창 가능한 고무재질의 제빙장치를 날개에 달아 그 속으로 고압공기를 불어넣어 팽창, 수축을 통해 얼음이 깨지도록 하는 장치[5] 미 육군은 육상과 연계한 해안방어용 폭격기를 계획했기에, 기자들은 모델 299의 무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모델 299 자체를 두고 "해안을 지킬, 나는(飛行) 요새"로 감탄사를 붙여 별명이 생겼다는 말도 있고, 미국의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을 두어 "우리는 적을 공격할 뜻에서 만든 게 아니라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 "라는 타이틀을 붙여 탄생했다는 말도 있다.[6] SS Rex. 렉스는 이후 1944년 영국 공군 소속 브리스톨 보파이터 편대의 공습으로 항구에서 가라앉는다.[7] Frank Maxwell Andrews(1884.2.3 ~ 1943.5.3). 미 육군 항공대의 설립자 중 한명이며 최종계급은 중장. 1943년에 탑승했던 B-24 Hot Stuff가 아이슬란드에서 추락해서 사망.[8] 커티스 르메이는 1937년에 중위를 달고 1941년에야 소령을 달았다.전쟁전 미군의 진급 자체가 연공서열에 묶여 있었기에 진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9] 배기가스 강제 작동식 과급기(Exhaust-driven turbocharger) : 배기가스에서 발생하는 추력을 공기 중으로 날리지 않고, 별도의 터빈실로 보내 내장된 임펠러를 돌린다. 그리고 그 흡기에너지로 공기를 강제로 빨아들여 엔진에 공급해 출력을 높이는 시스템을 일컫는다.[10] 링크에 있지만 앤디 루니라는 종군기자가 쓴 글에 나오는 내용이며 이후에도 각종 다큐나 '어메이징 스토리' 등의 창작물에 종종 나온 이야기다.[11]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에 나오는 폭격기 미션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의 편대는 전멸 당한다.[12] 이 조준기의 조준망에는 개발 비화가 있는데, 조준망이 특정한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물질이여야 한다는 결과가 나오자 거미줄 등의 온갖 소재로 실험을 하다 사용한 것이 여성의 머리카락이었다는 것이다.[13] 이걸 몰랐던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 굳이 알류산 열도 일부를 점거했다가 채 1년도 못버티고 나와야 했으며 미군 역시 이 일대에서는 소규모 견제 공격만 해댔다.[14] 참고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 함재 정찰기가 활동했던 범위가 프랑스 국토면적과 맞먹는다![15] 특히나 폭격수 조 사노스키는 복부에 파편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기관총을 잡고서 Ki-46 한 대를 격추시킨 뒤에야 숨을 거두었고, 조종사인 제로니모도 피를 흘리며 흐려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폭격기를 조종하고 있었다.[16] 보통 공중전이 아무리 길어도 몇 분 이내라는 걸 감안하면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17] 고정 표적에 대해 크고 무거운 투사체를 운반하던 아브로 랭커스터의 댐 폭격과 달리 태평양에서의 물수제비 폭격은 이동표적에 대해 상대적으로 작고 가벼운 투사체를 운반한다는 점에서 항공기를 이용한 뇌격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이 경우 저공에서의 기동성이 중요해지기에 B-17은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되었다.[18] 참고로 이 부대는 노획한 B-24도 굴렸다.[19] 다만 미군도 바보는 아니라 된통 당한 뒤에는 편대에 수상한 B-17이 날아오면 곧바로 경계테세를 갖추고 대응했다고 한다.[20] 과장좀 보태어 망원경에 점찍은 수준이었다.[21] 개발자인 칼 노든이 고용한 독일인 기술자 중 헤르만 랑이라는 Duquesne Spy Ring 소속 스파이가 있었고 그대로 유출되었다. 헤르만 랑은 Duquesne Spy Ring 요원이 전부 체포될때 함께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50년에 독일로 출국했다.[22] 스위스가 중립국인 관계로 실제로 전투임무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국의 식별표지와 도색을 칠하는 등 다른 자국 기체들과 똑같게 운용되었다.[23] 그냥 조종은 컴퓨터에게 맡기고 방어총좌를 이동해가면서 적기 격추시키기 놀이하다가 폭격수 역할도 하면 상당히 즐겁게 즐길 수 있다. 다만 피격되어서 손상이 심해지면 컴퓨터가 바보가 되기 때문에 (한군데서 빙빙 돌기만 하기도 한다) 조종간을 직접 잡아서 기지까지 귀환시켜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24] B-17을 오마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