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1. 개요
2. 양공주의 수와 논란
3. 기지촌과 양공주가 생겨난 이유
4. 위안부와 다른 배경
5. 기지촌 여성운동
6. 진상규명을 위하여
7. 관련 사건사고
8. 관련 단체
9. 주한미군 위안부를 다룬 창작물
10. 참고 자료

"한국전쟁기 ‘위안부’ 연구는 2000년대 초 김귀옥과 이임하의 선구적인 작업 이래 사실상 정체상태다. 종전 이후의 경우, 신문 기 사나 정부 통계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위안부’로 불리기도 했다는 사실은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 있지만[1]

, 그것이 법령에도 버젓이 등장 하는 ‘공식 명칭’이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비로소 밝혀졌다[2]. 그러므로 ‘위안부’에 관한 본격적인 역사비교연구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기와 냉전기 ‘위안부’ 연구가 더욱 진척 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기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박정미. p.37.

"...가난과 가족 이데올로기에 내몰린 많은 여성들에게 성은 하나의 생계 도구로 작용하였으며 그들이 접촉하는 미군이 상징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도피처이자 희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기지촌 형성 과정과 여성들의 저항〉, 이나영, p.181.


1. 개요


'''洋公主'''. 정식 명칭은 주한미군(용) 위안부, 통칭 기지촌 여성. 양공주라는 말은 6.25 전쟁 이후 주로 주한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을 멸칭하는 말로 전후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전후 문학)에서 자주 쓰이던 제재 중 하나였다.[4] 그나마 점잖게 말해서 양공주였지 보통 양색시나 멸칭으로는 양갈보라고 불렸으며 어느 정도 치장을 하거나 고정 고객을 얻은 경우 양공주와 유엔마담 등으로 그나마 높게 불러주었다.
[image]

2. 양공주의 수와 논란


1954년 치안국 보안과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체 성매매 여성은 17,300명이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양공주였다.#1
1960년대는 통계마다 다르나 13,000~14,000명 수준이었고#2, 1977년 통계로 9,935명이었다.#3
이후 1990년에는 1,667명, 91년 1,483명, 92년 1,129명, 93년 6월 926명으로 줄었다.#4
Cho, Grace M 라는 전임교수도 아닌 어떤 재미교포는 총수를 100만 명이라 주장하는 책을 썼는데 그 수치부터 황당한 과장이라 논란이 있었다. 당장 이 책의 내용을 보면 1954년 35만 매춘부가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한국정부 통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수치이며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이 저자는 10만 명의 미군신부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팩트는 국가공식사이트에 의하면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 포함) 전체가 약 4만 명 수준이다.# 양공주 평균숫자가 40년간 1만 명 수준이고 근속연수가 상당히 긴 점 감안하면 백만 명은 아예 나올 수가 없는 수치다. 비상식적인 수치인 것은 둘째치고 본인이 무슨 수로 어떤 근거로 산출했는지도 의문이라 논란이 있었다.

3. 기지촌과 양공주가 생겨난 이유


전쟁 후 생계유지를 위해 직업을 찾던 여성들 중 상당수가 인신매매와 직업소개, 사기 등의 이유로 기지촌으로 끌려와 성매매의 피해자가 되었다. 말이 성매매지, 이들 중 상당수는 강제성이 짙었기에 원칙적으로는 주체적인 매매의 당사자라고 할 수 없다.[5]
현재는 찾기 어렵지만 으레 나오는 아버지의 노름 빚에 팔려간 여성들,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전쟁 고아나 가난한 사람이 대다수였으며, 간혹 자기 딸을 성매매로 내몰은 비정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국 정부도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1961년 윤락방지법을 제정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는 했으나, 미군 기지 주변은 미국땅(?)이라 한국법이 적용되지 않는 지대이다보니 성매매가 성립되었다.[6] 1971~1976년까지 한국 정부와 주한미군은 '군 기지 정화운동'을 벌이며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소를 만들고 '민들레회' 같은 관제 자치기구도 만들었고, 심지어 정부 차원에선 당사자들의 인권유린은 아랑곳 않고 '외화벌이 유공자' 등으로 미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러한 기지촌의 성매매와 유흥으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사업들은 당시의 군사정권들에게도 중요한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실제로 가장 큰 규모에 속했던 군산 아메리카 타운의 경우 아예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였던 백태하 대령이 설립과정부터 개입되어있었던것으로 유명했고, 심지어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달러를 벌어들이는 공훈을 한다면서 이들 사업장의 포주들을 치하할정도였다.
이렇게 군사정권의 비호 아래에서 한국인 성매매여성들을 이용해 사업을 벌이던 사업주들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점점 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한 데다가, 민주화 이후 여성인권에대한 인식이 성장하게 되자 한국인 여성들을 줄이고, 동남아 여성들로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이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위안부와 다른 배경


일본군 위안부는 20만 명이 동원된 경우로서, 자국의 전쟁통에서 일어난 매춘이 아니라, 일본이 멀쩡히 있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1930년에서 1945년까지 정부가 관여해서 사람들을 전표로 돈을 지급한다고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간 경우다 (그마저도 지급해 준 전표는 전후 일본국 정부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일본 정부의 허가로 운영된 '특수위안시설협회'에 소속된 일본의 '양빵'들도 있다. '''양빵들의 수익 중 일본 정부가 거두어 간 수익만 해도 외화 중 1.5억 달러며 전후 일본을 일으키는 데 쓰였다.''' (일본에서는 '주일미군(용) 일본인 위안부'들을 '양빵'이라고 불렀다. 당연하게도 일본인 상대의 일본인 매춘부는 이렇게 불리지 않았다.) #
한국군 위안부는 주동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양공주는 법적인 사각지대에 인권침해에 방조된 사람들이며, 그 과정에서 인신매매가 일어났든 사기를 당해 끌려갔든 한국 정부가 관여한 게 아니다. 오히려, 훗날 이 방조된 사람들에 대해 '''정부가 방조한 것을 인정하고 배상해준 건''' 매우 드문 일이다. 21세기에 와서도, 영국의 로더럼 아동 성착취 사건도 성폭행범 집단을 지역 공권력이 16년간 방조해 11~25세의 여성 '''1400명 이상''' 피해를 입었는데도 정부는 "범죄자들의 탓"만 인정했지 '''"국민들을 챙기지 못한 정부 공권력 탓"'''을 인정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대처법이다.
이 양공주들을 이용하던 대상이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 사실상 일본군 위안부와 비슷하냐고 한다면, 틀렸다. 그저 성매매 업계의 일반적으로 생기는 포주나 조폭들에 의한 매춘부에 대한 사기나 강제성이 동원된 부분만 다르지 않지, '''오히려 민간인 차원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상을 그냥 자국민 상대에서 미군 상대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 정도는 2차 대전 때도 미군이 승리한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매춘과 다를 게 없다 (그중 일부 병사들의 엇나감으로 성폭행이 자행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성폭행 행위로 매춘과 다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신 매매, 성폭행, 인권 유린 등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윤란행위등방지법을 제정했지만, 미군 기지 인근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졌으며, 한국인이 살해당하거나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여성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매춘이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인신매매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북한 등의 적국에서 끌려온 여성들 중 일부는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한국군 위안부조차도 일부분은 국군하에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한 건 아니지만 국외로 피난할 수도 없는 이들이 전쟁의 혼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안정적으로 먹고 살고 보호받을 수 있는 면도 있었다. 잊지 말자. 이때는 한국 남자들은 미성년조차 징집되어 전쟁에서 죽어가고 '''소위급 위관까지도 파리 목숨으로 간주되어 임관하고 얼마 안 되어서 무더기로 전사해버리는 초막장 상황이었다.'''
어찌되었건, 수정 전쟁으로 인해 비판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대한민국 근대사의 치부이자 오점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5. 기지촌 여성운동


이러한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유린에 대항하고 극복하기 위해 투쟁이 점차 형성됐는데, 이 운동은 여성운동, 탈 매춘운동, 평화운동, 반미운동 등 복잡한 측면에서 여러 관점으로 각자 다루어지고 있다. 1970~80년대 초반까진 김연자와 같은 자생적 투쟁가들이 있었다가 1986년 3월 들어 문혜림[7]과 유복님 등 개신교 여성운동가들의 주도로 '두레방'이 결성되면서 조직화된 운동이 처음 시도되었으며, 두레방은 포주의 방해와 정부의 사찰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상담, 영어교실, 빵 만들기, 공동생활 등 교류 활동에 앞장서며 인권 신장에 힘쓰기도 했다. 1990년 여름 이화여자대학교를 시초로 총학생회나 총여학생회 차원의 '기지촌 활동(기활)'이 성행하기 시작했으나 당시엔 남성 중심 NL운동권이 총학을 잡고 있던 터라 반미운동의 도구로 변질되는 등 폐해도 있었다. 같은 시기 들어 두레방에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일하면서 기존 개신교 운동 출신과 운동방향 등을 놓고 갈등이 일자, 1995년 들어 독립해 이듬해 '새움터'를 발족하기도 했다.

6. 진상규명을 위하여


공식적인 기록상 한국 정부에 등록되어 관리되었는데, 2013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1977년 작성된 <기지촌 여성 정화대책>이 공개됐다. 그동안 묻혀있던 일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겹쳐지면서 2010년대 들어 언론에 재부각되고, 관계자들의 관련 기사도 나왔다.# 2014년 기지촌 출신 여성 120명이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해 2017년 1월 1심 일부 승소했고, 2018년 2월 2심에서 '국가 방조'를 처음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2014년 18대 국회에서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 피해여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으나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19대 국회 들어선 2017년 7월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었으나 아직 진전이 없다.

7. 관련 사건사고



8. 관련 단체


  • 기지촌여성인권연대
  • 두레방
  • 새움터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9. 주한미군 위안부를 다룬 창작물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0년대~1960년대에 나온 소위 '전후문학'에서 많이 언급된다.

10. 참고 자료



[1] 이임하, 2004b: 132-5; 이나영, 2007: 16; 최을영, 2007: 39-40[2] 박정미, 2011: 130-5[3] 오발탄에서 주인공의 친족 중 한 명이 양공주로 연명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다.[4] ex. 쑈리킴, 중국인 거리, 모랫말 아이들, 오발탄[3][5] 과거 MBC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인 '꼭 한번 만나고 싶다'에서는 '''13살'''이라는 나이에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는 사람에게 취업사기를 당해 기지촌에 팔려갔던 여성이 출연해서, 어릴 적 생이별했던 동생들을 찾기도 했다.[6] 다만 이는 현재 관점에서 법리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한국은 속인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 속인주의에 따르면 어느 나라 땅으로 간주되던지 그것은 중요치 않으며 범죄를 저지른 국민은 법의 처벌 대상이 된다. 성매매 사실이 발각됐다면 당연히 '성매매 여성'은 한국 법으로 처벌될 수 있었으며 수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법과 어느 정도 다른지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만 현재는 주한미군 기지에 한국피의자가 들어가 있을 경우 일차적으로는 주한미군에게 수사권이 있으나, 한국 경찰이 요청하면 주한미군의 허락 하에 기지에 진입하여 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애초에 이 성매매 사업들은 사실상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았기때문에 성장한 사업이다보니 당시 정권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수사할 의도도, 성매매를 막을 생각도 없었다.[7] 문동환 목사의 부인으로, 미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