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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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진시황릉.[1]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묘소 입구 기준) 박정희(左)&육영수(右) 무덤.(국립서울현충원 소재)[2]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즉,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한자로는 묘(墓), 묘지(墓地), 구묘(丘墓), 구분(丘墳), 구총(丘塚), 만년유택(萬年幽宅), 분영(墳塋), 유택(幽宅), 총묘(塚墓) 또는 분묘(墳墓)[3] 라 한다. 묘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공동묘지'''라 부른다. 세는 단위는 장, 기(基), 자리 등이다.
근대기에는 '무덤'이 아닌 '묻엄'으로 쓰인 적도 있다. 백범 김구의 처인 최준례 여사의 묘비명에 묻엄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무덤' 자체가 어원적으로는 '묻다'의 어간 '묻-'에 '-엄'이라는 접사가 붙은 파생어이므로 (발음은 '무덤'과 같다 하더라도) 원형을 밝혀 쓴 '묻엄'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엄'은 '-이'나 '-(으)ㅁ'과는 달리 일부 어근에만 붙는 비생산적 접미사이기에 원형을 밝힌 '묻엄'이 아니라 발음대로의 표기인 '무덤'을 표준 표기로 정한 것.[4]
죽음, 혹은 시신을 상징하는 무덤은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문화권에서 무덤을 딱히 혐오시설로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드시 무덤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피하는 풍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나 바로 옆에 묘지를 조성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마을 뒷산 같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5] 산 곳곳에 중구난방식으로 산소가 조성된 경우가 보통이다. 이 경우 산소조성 당시에는 길이 닦여있어도 수십, 백여 년 지나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사라지는 일도 흔해서 꽤나 찾아기기 힘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무덤)를 따로 산소(山所)라 한다. 山이라는 한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의 뜻이 아닌 무덤을 뜻하기도 하고 산에 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요즘도 한국 농촌에 있는 주택들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면, 아예 묘지가 집 바로 뒷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상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권도 꽤나 있다. 심시티 4에서는 도시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공동묘지를 지을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당연히 주택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무덤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공략에 따르면 주택 가까이 있는 곳에 지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실제로 미국, 유럽, 일본,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도 주택가 옆에 떡하니 공동묘지가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이 경우는 무엇인가 하면 먼 과거에 마을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 공동묘지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마을이 공동묘지를 감싸버린 형태가 된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동묘지에서 좀비가 깨어나면 얼마 뒤 도심 한복판이 좀비로 가득 차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것(…)
사실 유럽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고, 중세 이래로 마을들이 그 마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을 주민이 사망할 경우 교회 묘지에 묻히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때문에 아직도 공동묘지가 거주지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덤이 거의 대부분 평평하게 되어 있는데, 산악 지대가 별로 없고 평야 지대가 많아서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없기 때문에 봉분 없이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부유층들은 자기 조상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 조상님들의 시신 훼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무덤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 공동 묘지라면 비석이나 추모 석판이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라는 생각과 달리 무덤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책로가 준비된 공원같은 분위기인 곳도 많아서 마을 주민의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미국과는 다르게 산악 지대가 상당히 많고 평야 지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6] 그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있기 때문에 봉분을 충분히 쌓아 무덤을 만든다. 또 중국의 경우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새 왕조들이 세워질 때마다 역대 군주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일부러 묘지를 매우 크게 만들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7]
프랑스의 경우 더 심해서, 파리의 몽파르니스 지역을 비롯해 여러 곳이 공동묘지를 공원 비슷하게 운용한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은 선인들의 뼈를 깨끗하게 씻은 뒤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탄광으로 사용됐던 지하 통로를 공동묘지로 용도변경하여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이게 현대 시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자세한 것은 카타콤 항목으로.
호주 사람들도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묻힌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인데, 유령이 되더라도 도움을 줬지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무덤을 완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련된 괴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이 마을과 주변에 형성된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는 것. (+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특별히 비참한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는 비율이 오히려 적었고, 더 이전엔 맹수의 습격이나 당시 기준의 불치병 등 끔찍한 죽음이 자연사보다 오히려 더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8]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 숭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터키, 이집트 쪽은 그냥 신경 안 쓰는 중. 터키에서는 오히려 죽은 이를 참배하기 편하다며 모스크 안에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지금도 고인이 죽은 날에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서 꽃다발을 바치고 죽은 이에게 쿠란을 읽어주거나, 짤막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물론 튀르크 민족 고유의 풍습이라,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제도권 이슬람에서는 썩 달가워하는 전통은 아니다. 당장 잘랄 웃 딘 루미를 비롯한 성인의 무덤에 가면 터키 종교부 이름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묘소의 나무에 소원쪽지를 매달거나,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종교의 전통이 금지하는 우상숭배 행위이자 미신이므로 엄격히 금합니다." 라고 써놓은 공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한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매장을 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고려시대에는 주로 화장을 많이 하였다. 그러던 것이 유교의 영향이 강해진 조선시대에는 다시 매장으로 바뀌고, 풍수지리의 영향 역시 강하게 받으면서 무덤의 위치가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덤의 위치 자체가 으슥한 곳으로 바뀌고 일상 공간에서 먼 곳으로 변경된 점이 무덤에 대한 공포심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아직도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부도(승탑)를 만들어 절의 입구 같은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대중들이 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덤이 무서워서 멀리 떨어진 건지, 무덤이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무섭게 된 것인지는 연구해 봐야 할 일.
한국에서 무덤이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의 영락IC. 영락공원 설립당시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를 냈다. 이에 따라 부산영락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진입로도 자동차전용도로 취급을 받는 편. 보행자와 이륜자동차는 팔송에서 금정도서관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장례 관련 차량들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북한은 2019년 이전까지는 매장이 대세였으나 김정은이 묘지 부족을 사유로 '''매장 금지령'''을 내려서 2021년 현재 화장만 가능하다. 기사
어떤 나라든 무덤을 이전하거나 국가적 사료가치로 인하여 발굴할 때는 유족이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하며 한국같은 경우는 무덤을 발굴 할 때는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발굴을 시작한다.
고대사에서는 오래된 무덤인 고분(古墳)이 지역사,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권력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소지품 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이 묻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 변화에 따른 무덤 양식(묘제)의 변화를 지겹게 외웠던 것도 사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런 무덤엔 각종 비싸고 희귀한 물건도 많이 묻혀있고, 무덤을 파서 이런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특히 무덤에 묻혀있는 물건들이 굳이 귀금속같이 엄청 비싼게 아니어도 그곳에 묻혀있는 과거의 편지나 의복 등은 왕릉같이 호화로운 왕족이나 귀족의 삶이 아닌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제일 밀접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요즘 조선시대의 무덤을 발굴할 때 조선 중기나 근세 때의 한글편지가 발굴되어 한글창제 이후의 한글의 변천과정을 확인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 당시 입던 옷이나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무덤에 피장자의 의복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함께 묻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같은 경우, 양반이나 좀 부유한 서민 무덤에 한정된다. 왜 그런가하면 보통 백성들은 거의 몸만 묻어주는 게 많다보니 글이 적혀진 기록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보통 백성 무덤은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당시 옷재질이 어땠는지 죽은 시신을 부검하여 그땐 뭘 먹었는지 그 시대 생활상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을 만들 때 주위에 생석회를 들이부어 만드는 조선시대 이후 묘제에서는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서 고열이 나서 관속을 멸균하는 효과가 나고, 시신이 수백년을 썩지 않고 버티는 미라 상태가 되기도 한다. 400년 이상 된 파평윤씨 유해(미라)가 유명하다. 미라 항목으로.
다른 이야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미라 같이 된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약 4, 5천 년 전 쯤에 누구에게 활을 머리에 맞고 살해당한 남성의 시체였다. 이런 시체조차도 부검을 통하여 당시 버섯에서 여러 식물과 새고기 같은 것을 먹었고 신을 묶는 끈이라든지 소지품으로도 당시 생활상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몇백 년 된 무덤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묘제는 그 문화권의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서구화되었지만, 무덤의 형식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봉분이며 화장, 수장, 빙장 등 자연장의 전파도 그다지 빠르지 않다. 세계화된 현대도 그런데 고, 중세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양식과 그 부장품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역사고고학 #s-2, 고분문화 문서로.
묘
더 많은 왕릉은 왕릉(무덤) 문서로.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진시황릉.[1]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묘소 입구 기준) 박정희(左)&육영수(右) 무덤.(국립서울현충원 소재)[2]
1. 개요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즉,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한자로는 묘(墓), 묘지(墓地), 구묘(丘墓), 구분(丘墳), 구총(丘塚), 만년유택(萬年幽宅), 분영(墳塋), 유택(幽宅), 총묘(塚墓) 또는 분묘(墳墓)[3] 라 한다. 묘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공동묘지'''라 부른다. 세는 단위는 장, 기(基), 자리 등이다.
근대기에는 '무덤'이 아닌 '묻엄'으로 쓰인 적도 있다. 백범 김구의 처인 최준례 여사의 묘비명에 묻엄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무덤' 자체가 어원적으로는 '묻다'의 어간 '묻-'에 '-엄'이라는 접사가 붙은 파생어이므로 (발음은 '무덤'과 같다 하더라도) 원형을 밝혀 쓴 '묻엄'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엄'은 '-이'나 '-(으)ㅁ'과는 달리 일부 어근에만 붙는 비생산적 접미사이기에 원형을 밝힌 '묻엄'이 아니라 발음대로의 표기인 '무덤'을 표준 표기로 정한 것.[4]
2. 지역별 인식차이
죽음, 혹은 시신을 상징하는 무덤은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문화권에서 무덤을 딱히 혐오시설로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드시 무덤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피하는 풍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나 바로 옆에 묘지를 조성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마을 뒷산 같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5] 산 곳곳에 중구난방식으로 산소가 조성된 경우가 보통이다. 이 경우 산소조성 당시에는 길이 닦여있어도 수십, 백여 년 지나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사라지는 일도 흔해서 꽤나 찾아기기 힘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무덤)를 따로 산소(山所)라 한다. 山이라는 한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의 뜻이 아닌 무덤을 뜻하기도 하고 산에 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요즘도 한국 농촌에 있는 주택들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면, 아예 묘지가 집 바로 뒷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상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권도 꽤나 있다. 심시티 4에서는 도시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공동묘지를 지을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당연히 주택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무덤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공략에 따르면 주택 가까이 있는 곳에 지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실제로 미국, 유럽, 일본,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도 주택가 옆에 떡하니 공동묘지가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이 경우는 무엇인가 하면 먼 과거에 마을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 공동묘지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마을이 공동묘지를 감싸버린 형태가 된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동묘지에서 좀비가 깨어나면 얼마 뒤 도심 한복판이 좀비로 가득 차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것(…)
사실 유럽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고, 중세 이래로 마을들이 그 마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을 주민이 사망할 경우 교회 묘지에 묻히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때문에 아직도 공동묘지가 거주지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덤이 거의 대부분 평평하게 되어 있는데, 산악 지대가 별로 없고 평야 지대가 많아서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없기 때문에 봉분 없이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부유층들은 자기 조상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 조상님들의 시신 훼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무덤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 공동 묘지라면 비석이나 추모 석판이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라는 생각과 달리 무덤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책로가 준비된 공원같은 분위기인 곳도 많아서 마을 주민의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미국과는 다르게 산악 지대가 상당히 많고 평야 지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6] 그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있기 때문에 봉분을 충분히 쌓아 무덤을 만든다. 또 중국의 경우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새 왕조들이 세워질 때마다 역대 군주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일부러 묘지를 매우 크게 만들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7]
프랑스의 경우 더 심해서, 파리의 몽파르니스 지역을 비롯해 여러 곳이 공동묘지를 공원 비슷하게 운용한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은 선인들의 뼈를 깨끗하게 씻은 뒤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탄광으로 사용됐던 지하 통로를 공동묘지로 용도변경하여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이게 현대 시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자세한 것은 카타콤 항목으로.
호주 사람들도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묻힌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인데, 유령이 되더라도 도움을 줬지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무덤을 완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련된 괴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이 마을과 주변에 형성된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는 것. (+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특별히 비참한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는 비율이 오히려 적었고, 더 이전엔 맹수의 습격이나 당시 기준의 불치병 등 끔찍한 죽음이 자연사보다 오히려 더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8]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 숭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터키, 이집트 쪽은 그냥 신경 안 쓰는 중. 터키에서는 오히려 죽은 이를 참배하기 편하다며 모스크 안에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지금도 고인이 죽은 날에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서 꽃다발을 바치고 죽은 이에게 쿠란을 읽어주거나, 짤막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물론 튀르크 민족 고유의 풍습이라,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제도권 이슬람에서는 썩 달가워하는 전통은 아니다. 당장 잘랄 웃 딘 루미를 비롯한 성인의 무덤에 가면 터키 종교부 이름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묘소의 나무에 소원쪽지를 매달거나,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종교의 전통이 금지하는 우상숭배 행위이자 미신이므로 엄격히 금합니다." 라고 써놓은 공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한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매장을 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고려시대에는 주로 화장을 많이 하였다. 그러던 것이 유교의 영향이 강해진 조선시대에는 다시 매장으로 바뀌고, 풍수지리의 영향 역시 강하게 받으면서 무덤의 위치가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덤의 위치 자체가 으슥한 곳으로 바뀌고 일상 공간에서 먼 곳으로 변경된 점이 무덤에 대한 공포심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아직도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부도(승탑)를 만들어 절의 입구 같은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대중들이 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덤이 무서워서 멀리 떨어진 건지, 무덤이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무섭게 된 것인지는 연구해 봐야 할 일.
한국에서 무덤이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의 영락IC. 영락공원 설립당시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를 냈다. 이에 따라 부산영락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진입로도 자동차전용도로 취급을 받는 편. 보행자와 이륜자동차는 팔송에서 금정도서관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장례 관련 차량들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북한은 2019년 이전까지는 매장이 대세였으나 김정은이 묘지 부족을 사유로 '''매장 금지령'''을 내려서 2021년 현재 화장만 가능하다. 기사
어떤 나라든 무덤을 이전하거나 국가적 사료가치로 인하여 발굴할 때는 유족이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하며 한국같은 경우는 무덤을 발굴 할 때는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발굴을 시작한다.
3. 사료적 가치
고대사에서는 오래된 무덤인 고분(古墳)이 지역사,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권력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소지품 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이 묻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 변화에 따른 무덤 양식(묘제)의 변화를 지겹게 외웠던 것도 사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런 무덤엔 각종 비싸고 희귀한 물건도 많이 묻혀있고, 무덤을 파서 이런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특히 무덤에 묻혀있는 물건들이 굳이 귀금속같이 엄청 비싼게 아니어도 그곳에 묻혀있는 과거의 편지나 의복 등은 왕릉같이 호화로운 왕족이나 귀족의 삶이 아닌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제일 밀접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요즘 조선시대의 무덤을 발굴할 때 조선 중기나 근세 때의 한글편지가 발굴되어 한글창제 이후의 한글의 변천과정을 확인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 당시 입던 옷이나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무덤에 피장자의 의복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함께 묻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같은 경우, 양반이나 좀 부유한 서민 무덤에 한정된다. 왜 그런가하면 보통 백성들은 거의 몸만 묻어주는 게 많다보니 글이 적혀진 기록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보통 백성 무덤은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당시 옷재질이 어땠는지 죽은 시신을 부검하여 그땐 뭘 먹었는지 그 시대 생활상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을 만들 때 주위에 생석회를 들이부어 만드는 조선시대 이후 묘제에서는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서 고열이 나서 관속을 멸균하는 효과가 나고, 시신이 수백년을 썩지 않고 버티는 미라 상태가 되기도 한다. 400년 이상 된 파평윤씨 유해(미라)가 유명하다. 미라 항목으로.
다른 이야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미라 같이 된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약 4, 5천 년 전 쯤에 누구에게 활을 머리에 맞고 살해당한 남성의 시체였다. 이런 시체조차도 부검을 통하여 당시 버섯에서 여러 식물과 새고기 같은 것을 먹었고 신을 묶는 끈이라든지 소지품으로도 당시 생활상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몇백 년 된 무덤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묘제는 그 문화권의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서구화되었지만, 무덤의 형식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봉분이며 화장, 수장, 빙장 등 자연장의 전파도 그다지 빠르지 않다. 세계화된 현대도 그런데 고, 중세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양식과 그 부장품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역사고고학 #s-2, 고분문화 문서로.
4. 무덤의 등급
묘
5. 목록
더 많은 왕릉은 왕릉(무덤) 문서로.
5.1. 국내
5.1.1. 삼국시대
※관련 내용
※관련 내용
※관련 내용 - 분류:고구려 고분군
- 가야의 고분과 고분군
5.1.2. 고려시대
5.1.3. 조선시대
5.1.4. 현대
- 국립서울현충원
- 국립대전현충원
- 4.19 민주묘지
- 5.18 민주묘역 - 국가보훈처에서 조정한 국가묘지외 5.18 당시 조성된 망월동 구묘역이 따로 있다.
- 모란공원
- 대성산혁명열사릉
- 애국열사릉
- 금수산태양궁전
5.2. 해외
- 다이센 고분 : 진시황릉, 피라미드와 함께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무덤중 하나이다.[12]
- 레닌 영묘
-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13]
- 북망산
- 성묘 교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웨스트민스터 사원
- 진시황릉 :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다.
- 카타콤
- 크렘린 벽 묘지
- 타지마할
- 판테온
- 팡테옹
- 피라미드 : 진시황릉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다.
- 모주석기념당
6. 관련 문서
7. 기타
- 비유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공공기관 및 공기업에서 근무하시는 공무원들을 보자. 특히 공공기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인원도 많은 정부중앙청사(국가직), 도청&특별시청&광역시청(지방직)의 경우 전·현직 공무원들 사이에서 '공무원들의 무덤'이라고 표현한다. 지방청(국가직), 읍사무소&면사무소&동사무소(지방직)의 경우 규모가 작고 인원도 적어 아무래도 공무원들끼리 공적이든 사적이든 선후배 관계가 명확히 나뉘어지고 더불어 가족같은 분위기가 만연하지만, 반대로 정부중앙청사(국가직), 도청&특별시청&광역시청(지방직)의 경우 공무원들끼리 선후배 관계가 공적인 면에서만 나뉘어지고 사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정말 쌩판 남남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인원이 많은데다가 물갈이가 자주 되기 때문이다.
- 스포츠에서 홈 텃세가 심하거나 홈에서 펄펄나는 팀의 연고지는 원정팀의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 활기나 기쁨 따위가 소진되는 곳이나 그런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 특정 분야 혹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경우 이미 고인이 된 그 분야의 관계자 혹은 이미 고인이 된 당사자의 이름을 넣어서 "XXX가 무덤에서 튀어나올 소리!"혹은 "XXX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소리"라고 하기도 한다.
-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시신을 간이 매장할 때, 그 자리에 비석 대신 사용하던 소총을 꽂고, 그 위에 인식표와 방탄헬멧을 얹기도 한다. 영어로 Battlefield cross라고 불리며, 전쟁 영화나 게임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묘사이다.
- 무덤의 자리는 대개 양지이므로 이 근처에 집을 지으면 난방비 절약에 도움이 된다. 물론 심적인 거부감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 즉 '관념'을 인간이 인지하게 된 계기가 무덤이라는 시각이 있다. 만화
- 프랑스의 악곡 중 tombeau(무덤)라는 제목이 붙은 것들이 있는데(예: 모리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 이는 '추모곡'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법률 용어인 분묘는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일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찾아 보면 관련 문서가 매우 많이 나온다. 왜냐하면 건설 현장 등에서 무연고 묘지를 발견하였거나 공동묘지의 매장 연한이 도래하였을 경우(보통 최장 45년) 관할 지자체에서 홈페이지에 "분묘 개장 공고"를 올리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자체 발행 관보에 공고를 실었지만 이제는 모두 인터넷으로 게시하며, 기존 무덤이 전국적으로 임야에 아주 많은 데다가 공동 묘지의 매장 기한 만료도 꾸준히 있는 일이라 그 양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 올리고 있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해당 분묘 위치의 주소와 "언제까지 안 파 가면 임의 개장하여 처분한다."는 내용. 그렇다고 막 파서 아무 데나 묻거나 화장해 버리는 건 아니고, 파 봐서 유해 일부나 부장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한지 같은 것으로 싸서 상자에 담아 묻어 주며, 간단하게 술이라도 따르고 재배하는 정도 예우는 갖춰 준다.[15]
[1] 앞에 있는 기념비만 봐서는 쪼끄만 납골묘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진에 나오는 저 뒷산 전체가 진시황의 무덤이다! 그것도 순수 매장한 무덤이다!''' 365일 12개월 24시간 내내 병마용들이 진시황릉을 지키고 있는 건 덤.[2] 현재는 노무현의 무덤 규모가 가장 크지만 이쪽은 화장을 한 이후에 매장을 했기 때문에 순수 매장한 무덤 규모로는 박정희의 무덤 규모가 가장 크다.[3] 이쪽은 법률 용어.[4] 비슷한 예로 '주검(시체의 순우리말, 죽- + -엄)'과 '마감(막- + -암)', '마중(맞- + -웅)' 등이 있다. 용언 어간이 아니라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비생산적 접미사가 붙은 말을 발음대로 쓰는 경우는 '지붕(집 + -웅)', '이파리(잎 + -아리)' 등이 있다.[5] 제주도도 산에 있는 경우가 있으나 예외적으로 밭 한가운데 묘를 쓰는 경우가 많다.[6] 평야 지대라고 해봤자 중국 동부 지역(베이징, 난징, 톈진, 상하이 등)밖에 국한되어 있어서 평야 지대가 별로 많지 않다. 그마저도 중국 동부의 경우 고분 지대가 많다.[7] 대표적으로 진시황릉이 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항우가 도굴하고 진시황릉 일부를 불태웠다.(물론 진시황의 묘지는 불태우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8]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도 성직자나 사회 유력 인사들을 교회 안에 매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9] 희빈 장씨는 경종의 모후지만, 묘에 묻혔다.[10] 신라 고분군일 가능성이 높으나 여전히 백제냐 신라냐 논란인 고분군.[11] 한국과 일본 모두 해당[해외소재] 중국과 북한에 소재하지만 편의상 국내로 분류[12] '규모'의 기준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진다. 직경으로는 세계 최대이지만 높이가 두 무덤에 비해 많이 낮다.[13] 전승에 의하면 바티칸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14] 자세한 것은 개독교/어록 문서로.[15] 누가 묻힌 건지, 왜 안 파가는지 모르더라도 어쨌든 남의 무덤이기 때문에 유교 문화가 있는 한국에서는 그냥 막 치워버리면 액운이 따를 것이라 믿기 때문에 발굴 현장에서 안 시켜도 알아서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