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모토 타카오
1. 소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좌완투수로, 요네다 테츠야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마운드를 지탱한 에이스였다. 일본 야구예에서는 이 둘을 묶어 '''요네카지 콤비'''라고 불렀으며 통산 200승 이상을 기록하였다.
동생인 카지모토 야스오(梶本靖郎)도 형과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뛰었으며, 이쪽은 대투수였던 형과 달리 통산 64시합 등판, 3승 2패에 그쳤지만 은퇴 후 카지모토 켄시(梶本憲史)로 개명 후 한큐 전철 계열의 신한큐 호텔에 입사, 임원까지 올라갔다.
2. 현역 시절
한큐, 주니치, 요미우리 등 3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으며 제시한 계약금이 제일 낮은(50만엔, 주니치 120만엔, 요미우리 200만엔) 한큐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많은 계약금을 받고도 활약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의중을 고려해서 였다고 한다. 1954년에 한큐에 입단했고, 입단 첫 해에 20승을 기록했으나 이해 26승으로 다승왕이 된 킨테츠 펄즈의 모토와 타쿠지[1] 에게 밀려 신인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였다. 신인이 20승을 기록하고도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한 케이스는 가지모토가 유일하다.
1956년에는 28승,.1957년 24승을 기록하며 2년 연속 20승 고지를 밟았고, 1960년에도 21승을 올리며 '회색 구단'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별명을 가진 한큐 마운드를 굳건히 지켰다. 진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1이닝 3타자 연속 3구삼진'을 달성했고, 공식전 9타자 연속 탈삼진 등이 있다. 1959년 6월 12일 경기에서는 노히트노런까지 단 한 타자를 남겨두고 있었으나 안타를 허용하며 노히트노런 달성에 아깝게 실패했다. 불명예스러운 기록으로는 1966년 첫 두 경기 2연승 이후 기록한 단일 시즌 15연패가 있다. 1966년 가지모토의 평균자책점은 3.68로 리그 전체 평균자책점인 2.88보다 높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승 15패나 할 성적은 아니었는데, 무자책 패배나 9이닝 2실점 완투패 같은 것은 물론이고, 선발로 등판해 7이닝 3실점 패전을 기록한 바로 다음날 불펜으로 등판해서 역전주자를 남겨 두고 교체되었다가 다음 투수가 끝내기를 맞아 패전이 기록된 경기도 있었다. 이 해 가지모토가 기록한 단일 시즌 개인 15연패 기록은 2019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개인 최다 단일 시즌 연패 기록이며, 1967년 첫 경기에서 기록한 8이닝 1자책점 패배까지 포함한 개인 16연패 기록도 일본프로야구 역대 2위 기록이다.(이 분야 1위는 곤도 마사토시의 28연패인데 단일 시즌으로는 13연패다.)
1967년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부임한 이후 한큐의 성적이 급상승한 덕에 1969년에는 패보다 승이 많아졌지만 노쇠화의 영향으로 부진한 성적을 보이며 1971년에는 다시 승보다 패가 많아졌다. 197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통산 254승 255패로 200승 이상 달성한 투수 중 유일하게 승수보다 패수가 많다.
3. 은퇴 후
은퇴 후 곧바로 투수코치로 전임하여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을 보좌, 야마다 히사시 등의 뛰어난 투수진을 구축하여 한큐의 퍼시픽리그 4연패,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78년 시즌 종료 후 우에다 토시하루가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2] 후임 감독에 취임하였다. 취임 첫 해인 1979년엔 후기 우승과 승률 1위를 달성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전 감독이었던 니시모토 유키오가 이끄는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패해 킨테츠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하였고, 이듬해인 1980년은 팀홈런 200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 투수력 난조와 잦은 실책 등으로 인해 순위가 4위로 추락, 10년 만에 하위권(B클래스)를 기록하며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다시 투수코치로 전임하여 감독으로 복귀한 우에다 토시하루를 보좌해 1984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1986년 프런트로 전임해 근무하다가 1989년 한큐 구단이 오릭스로 매각된 오릭스 브레이브스의 2군 투수 코치로 복귀해 구단명이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바뀐 1993년까지 역임했고, 1998~1999년은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지도자로서 호평을 받았다. 2006년 9월 고베시에서 호흡기부전으로 사망하였으며, 2007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타이틀, 기록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으며, 시즌 막판 최다승 타이틀 획득을 밀어주기 위해 승리하고 있는 게임에 구원 등판하도록 감독이 권유했지만 "타인의 승리를 가로챌 수는 없다"고 권유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승수에도 집착하지 않아 현역 마지막 시즌에 자신의 통산 승수가 통산 패전 수를 넘지 않기 위해 구원 등판할 것을 감독이 권유했지만 이 역시 거절하였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0-0으로 승리하는 것보다 0-1로 지는 것이 좋다. 승패보다는 내용있는 투구를 했는지 그게 더 나에겐 소중했다" 고 말한다.
사생활도 온후하여, 라이벌 팀 포수 노무라 카츠야는 "투수답지 않은 부처님 같은 성격"이라 평했다. 요네카지 콤비의 한 축이었던 요네다 테츠야는 "어떤 무리한 것도 스스럼없이 맡아 실행해주는 성실한 사람으로, 그래서 형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라고 술회했다.
지도자 시절에도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오릭스 투수 사토 요시노리는 "현역 시절 여러 코치에게 조언을 받았지만 가장 적확했단 건 가지모토 코치로, 좋을 때의 폼을 기억해주고 있어서 몇 가지 포인트만 지적하고 불필요한 것은 일체 말하지 않았다. 나에겐 매우 고마운 코치였다", "코치로 활동하면서 본보기로 삼는 것은 가지모토 씨"라고 말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은퇴 후 싼상 타이거스에서 코치, 감독을 역임했으나 감독 취임 도중이었던 1996년 터진 검은 호랑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2] 이해 일본시리즈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첫 우승을 허용한 것도 있지만, 패전이 결정된 7차전에서 홈런 판정을 둘러싸고 격하게 항의하며 선수단을 1시간 이상이나 철수시켜 논란을 일으킨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