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카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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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겸 감독. 포지션은 포수.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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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선수 시절. 이렇게 호남인 시절도 있었다.[4]
홈런 기록에서 왕정치와 함께 신으로 불리는 선수. 그것도 체력부담이 가장 큰 포수라는 포지션을 딛고 기록한 것이다. NPB의 '''원조 공격형 포수'''.
총 3017경기 출장 10472타수 2901안타 657홈런[5] 1988타점을 기록하여 '''NPB 최다 경기 출장 2위[6] , 통산 타석 1위, 통산 타수 1위, 최다 안타 2위,[7] 최다 홈런 2위, 최다 타점 2위'''를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도루 117개, 볼넷 1374개, 삼진 1478개, 통산 타율 0.277을 기록하였다.
또 '''희생플라이 역대 1위, 병살타 역대 1위'''[8] 기록도 보유 중.
17년 연속 20홈런 이상, 퍼시픽리그 역대 최다인 21차례의 올스타전 출전 및 통산 끝내기 홈런 1위(11차례)와 끝내기 안타 1위(19차례)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야구를 하고 싶어도 야구용품이 없어 하지 못했던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태평양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본 위키의 노무라 문서에서는 아버지의 사망원인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노무라는 신문배달 등의 잡일을 하면서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명학교인 교토 미네야마고교 시절, 여러 프로팀에 테스트 신청을 했으나 1954년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있는 난카이 호크스에서만 연락이 왔고[9] 테스트를 받아 합격해 입단했으나 '''계약금은 0엔.''' 그리고 초기 2년 동안은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한 채 변화구에는 타격도 못하고 불펜 포수만 하다가, 전력 외 통보를 받기까지 했으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난카이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해버리겠다.(!!)''' 라고 말해서 겨우 난카이에 남을 수 있었다. 주전 포수의 교통사고, 백업 포수의 트레이드, 벤치 포수가 부상을 당하는 등의 안 좋은 일로 인해 난카이 호크스가 2009년 당시의 삼성 라이온즈를 연상케 하는 포수난에 시달리게 되자, 1956년부터 주전으로 발탁하여 맹활약했다. 약점인 약한 어깨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에도 공을 기울였고 타격에도 눈을 떴다.
이후 1957년 30홈런으로 호크스의 불구대천 라이벌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나카니시 후토시를 누르고 홈런왕이 된 그는 1961년, 그리고 1968~1975년까지 8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퍼시픽리그 최다 시즌 연속 홈런왕 기록이다. 그 외에도 1963년에는 52홈런을 기록하며 2001년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칠 때까지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고, 1965년에는 156안타, '''42홈런, 110타점, 0.320'''의 타율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상 처음으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였다. [10][11]
그렇다고 홈런만 친 타자일 뿐만 아니라 포수로서도 리드능력이 뛰어났는데, 투수를 이끄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작은 소리로 옆의 타자에게 속삭이는 일종의 트래쉬 토크 스킬을 사용하여 타자의 심리 상태를 흔들어 놓는다든가[12][13] , 혹은 상대 팀의 스탯을 집요하게 분석하여 이에 맞추어 야구를 한다든지... 이러한 포수로서의 경험은 후에 감독 시절 데이터 야구(ID=Import Data)를 만드는 귀중한 토대가 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트래쉬 토크가 통하지 않던 선수가 3명 있었는데, 그 선수들이 바로 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이라고 한다. 왕정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쳐서 되려 자기를 질리게 했고[14] , 장훈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날 참지 못한 장훈이 결국에는 헛스윙을 하는 척하면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크게 혼이 난 노무라는 결국 장훈에게 더는 트래쉬 토크를 걸지 못했다(...) 참고로 학생 시절 축구부 주장과 말싸움하던 중 축구부 주장이 자신을 '''조센징''' 이라고 모욕을 주자 곧장 배트로 머리를 참교육을 시켜준 것이 장훈 옹이시다.[15] [16] .
이 트래쉬 토킹이 통하지 않았던 상대로는 노무라가 직접 말한 셋(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 에노모토 키하치라는 롯데 오리온즈의 레전드 좌타자인데 이 타자는 172cm의 작은 체구로 1루수를 봤으며 통산 볼넷 대 삼진 비율이 '''1 : 0.6'''에 달할 정도로 극강의 선구안을 가진 선수로, 검객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녔다고 한다. 노무라 본인도 선구안만큼은 왕정치보다 위라고 인정했으며, 그 아우라에 눌려 트래쉬 토크를 할 엄두도 못 냈다고 고백했다.[17]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9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나가시마 시게오나 왕정치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가 해바라기라면, 나는 쥐 죽은듯이 일본해에 피는 달맞이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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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플레잉 매니저 시절.
이후 1970년부터는 감독을 겸임하며 '''4번타자, 포수, 감독'''이라는 3가지 중책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으며, 1973년에는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안겨주었고,[18][19] 1976년 한신에서 1973년 퍼시픽리그 우승의 주역 에모토 타케노리와 트레이드되어 난카이로 이적한 에나츠 유타카가 이적 첫해 지병으로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자 마무리투수로 전향해 볼 것을 권유해 에나츠가 후일 대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이후 1977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애인 노무라 사치요의 막장행각[20] 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당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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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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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시절.
이후 롯데 오리온즈에서 1978년 1년간 뛰고[22] , 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의 창립 멤버로서 1979~1980년까지 뛰며 최다 연속 시즌 출장 기록인 26시즌[23] 과 전인미답의 30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하고 1980년 은퇴하게 된다.
노무라는 난카이 출신이지만 난카이 구단과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 수준. 팀을 대표하는 스타였고 난카이 역사상 최다홈런, 최다타점에 선수로 감독으로 우승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난카이 전기철도가 세운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24] 에는 노무라에 관한 자료는 하나도 없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한국프로야구로 비유하자면 삼성의 이만수에 대한 대우나 롯데의 최동원에 대한 대우 정도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난카이 프런트와의 사이가 나빴을 뿐이라 구단이 다이에에게 팔린 이후로는 '''호크스 구단'''에게는 난카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은 없는 모양. 그 예로 2013년 시즌 중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오사카 클래식에[25] 난카이 OB 측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3. 은퇴 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198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에 임명되면서 그 유명한 데이터 야구를 구사하면서 후루타 아츠야 같은 명포수를 발굴해내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3번(1993,1995,1997년)과 센트럴리그 우승 4번을(1992,[26] 1993,1995,1997년) 기록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 야쿠르트팬들이 노무라 감독을 선호할 정도.
이후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와 맞먹는 암흑기를 지내던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이 되나 결과는 처참했다. 3년 연속 꼴찌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사치요가 탈세 혐의로 구속크리까지 겹치면서 노무라 감독에 있어서는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한신이 말그대로 개막장 시기였고,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강팀 도약에 있어 노무라 한신의 선수육성이나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재평가도 존재하여 최근 들어서는 한신 감독 시절의 평가도 크게 나쁘지는 않은편. 사실 원래부터 강팀을 맡았던 적이 드물기에 감독으로서 승률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난카이 시절을 제외하면[27] 야쿠르트, 한신, 라쿠텐 등 약체팀의 토대를 만드는 능력은 가히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003년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시덕스의 감독 겸 GM으로 부임해 2005년까지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2003년엔 팀을 사회인 야구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그가 괜히 명감독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2006년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28] 그 후, 2008년 7월 15일 '''세계 최초 선수-감독 3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년 팀을 창단 후 첫 A클래스와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았지만 시즌 종료 뒤 해임되었다. 감독 통산 성적은 1565승 1563패 1무로 1500승과 1500패를 모두 넘겼다. 자세한 내용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 항목을 참조할 것.
이후 산케이 신문의 전속 평론가로 일하고 있었으며, TBS에서 해설로도 활약하고 있으나 현대야구와 맞지 않는 지론 때문에 심각하게 까이는 편이었다.
2018년 소프트뱅크-요미우리 OB전에서 난카이 유니폼을 다시 입고 나왔다(!!!). 기사 노무라는 난카이 감독에서 물러난 뒤 호크스가 난카이-다이에-소프트뱅크로 소유자가 변화하는 동안 교류를 하지 않았다가 호크스 75주년, 80주년 행사에 난카이 시절의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
노무라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구단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라쿠텐 감독 시절 감독 통산 1,500승 달성을 축하하는 축전을 손정의 구단주로부터 받고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반면 라쿠텐 구단주인 미카타니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 통산 3,000경기 출전 축전도 손정의 구단주로부터 받고 감격했다고 한다. 호크스가 B클래스에서만 놀던 기나긴 암흑기의 팀에서 연승 행진을 이어나가는 팀으로 변모한 것은 손정의 구단주의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손 구단주는 돈은 내되 입은 내지 않으나 다른 구단주들은 돈도 내고 입도 낸다"는 블랙코미디를 시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걸 현실에서 시전하다 짤린 사람이 김성근(...).
4. 사망
2020년 2월 11일 급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 날 새벽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 가정부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지만 결국 명을 달리 했다고 한다. # 사인은 허혈성 심부전. 향년 84세.
2019년까지 야쿠르트 창단 50주년 OB경기에도 나왔고 1월에 있었던 가네다 마사이치 추모회와 고인이 생전 몸담았던 사회인야구팀 시닥스의 OB회에도 참석했었다. 비록 거동이 불편하긴 하였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7년 부인 사치요가 세상을 떠나면서 몸이 약해졌다고 한다.
5. 가족 관계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 사치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츠노리, 사치요가 이전에 미국인 사업가 앨빈 엥겔(Alvin Engel)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혈 아들 두 명 합쳐서 총 넷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 중 사치요의 아들 셋은 모두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선수로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것은 노무라 카츠야의 친아들이자 막내아들인 노무라 카츠노리. 주로 백업 포수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여년간 선수생활을 했는데, 프로 지명을 '''아버지가 감독을 하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받은 것으로 시작해 역시 아버지가 감독을 맡은 한신 타이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등 '''프로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아버지가 감독한 팀에서 보냈다.''' 수비력은 그럭저럭 나쁜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타격이 안 되고 어깨가 약해서 선수로서 대성하지 못했는데[29] , 2006년 롯데와의 은퇴 경기에서 6개의 도루를 허용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은퇴 이후에는 라쿠텐, 요미우리, 야쿠르트 등 여러 구단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사치요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인 도널드(단)과 케니(카츠히코)[30] 역시 70년대 말~80년대 초에 드래프트되어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으나, 1군 시합에 나서지도 못하고 2군에서만 머무르다가 얼마 못가 은퇴했다. 도널드 노무라('돈 노무라'로 더 유명하다.)는 선수로서 은퇴한 뒤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다가 마이너리거 스즈키 마코토 선수의 대리인이 된 뒤 선수 에이전트로 유명해졌는데, 주로 일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거나 그 반대의 길을 택하는 선수들의 에이전트로 활약했다. 특히 지금처럼 포스팅 시스템이나 국제 FA 제도가 정리되기 전인 1990년대 초중반, '''노모 히데오''', 이라부 히데키, 요시이 마사토[31] , 알폰소 소리아노 등의 미국 진출 과정에서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엄청난 활약을 펼쳐 구단들, 특히 그와 격렬한 대립을 겪은 일본 구단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본인은 당시 선수들에 대해 비합리적인 관리나 구시대적 대우를 하던 일본 구단들에 맞서 선수의 권익을 최대한 대변하느라 그러한 대립이 발생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현재도 과거의 악명(?)만큼은 못하지만 여전히 여러 선수들의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2년 다르빗슈 유가 미국으로 진출할 때 에이전트를 맡기도. 참고로 케니 노무라는 돈 노무라와 노무라 사치요와 절연 상태였다고 한다. 노무라 사치요와는 그녀가 죽기 전에 결국 화해했다고 하나 형 돈과의 화해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6. 여담
-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퀵모션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난카이 시절 감독에 재임하던 당시 리그 베이스를 탈탈 털던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기위한 대책으로 당시 투구폼이 작은데다가 셋 포지션에 능숙했던 호리우치 츠네오를 보고 만들어 낸 것 이였는데 캐치까지 1.1초 2루로 송구까지 1.8초 도합 3초 이내면 육상선수가 와도 아웃 시킬 수 있다는 지론[32] 으로 퀵 모션이라고 하는 동작을 개발해냈다.[33] 당시 투수진은 주자를 못 잡는건 포수 탓 이라고 굉장히 반발이 심했으나 포수 겸 감독이였던 노무라는 권력으로 찍어눌렀으며 퀵모션을 최초로 도입한 난카이 호크스는 1973년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노무라 카츠야 시대 이후부터 일본 주자들은 투수의 쿠세를 찾아 어떻게든 베이스 하나 더 가려고 기를 쓰게 되었고 투수와 포수는 어떻게든 준비시간을 줄이고 쿠세를 없애 그 주자들을 잡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일본야구의 기반이 되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 야구 역사에서 꽤 굵직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 음반을 발매 한 적이 있다. 장르는 엔카. 한신 감독시절 재발매 되었으며 이후 2009년 라쿠텐에서 앨범을 또 한장 발매하는데 가사를 부인이 써 주었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일 처음으로 가진 장래희망이 미소라 히바리의 영향을 받아 가수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고음을 낼 수가 없어서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야구선수라고 한다. 결국 야구로 대성하고 음반까지 냈으니 어찌보면 소시적의 꿈을 성취했다고도 할 수 있다.
- 부인이 막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공처가로서 가계부 관리는 부인이 하고 본인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데 신용카드의 결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서 "사인을 할 뿐 인데 어째서 물건을 주는걸까?"라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걱정없이 쓰다가 신용카드 명세서가 부인에게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중에 부인이 추궁하자 "나를 미행하는거야? 징그러운 여자네"라며 부인과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상술했듯 난카이와의 사이가 나빴는데,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9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시즌 이후 해임이 결정되자, 내 차라리 난카이에서 결번을 받으면 받았지 라쿠텐에서 결번을 왜 받냐? 라쿠텐 따위에 무슨 자부심을 느끼라고? 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난카이랑은 사이도 험악했고 거기다 난카이가 이미 구단을 팔아버렸으니, 난카이로부터는 결번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다. 받는다면 소프트뱅크에서 해줘야 되는데, 이미 팀이 후쿠오카로 이전하고도 20년이 넘어서 예전 난카이 색채는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와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도 후쿠오카의 팬들에게는 뭔가 와닿지 않을 건 자명한 사실. 당장 이나오 가즈히사가 영구결번 되었을 때도 후쿠오카 시절 선수에게 사이타마에서 영구결번 줘도 괜찮은 거냐며 얘기가 있었단 걸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쓸 정도로 라쿠텐 프런트의 막장행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난카이 구단에 대해서도 이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점을 엿 볼수 있다. 참고로 노무라가 달았던 호크스의 19번은 여러 선수들[34] 을 거쳐서 2020년 카이 타쿠야가 달면서 다시 호크스 주전포수의 번호로 부활했다.
- 영구결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본인의 등번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10이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신인 시절 첫 두해를 제외하면 감독시저까지 평생 달았던 번호는 각 자리의 숫자를 합하면 10이 되는 숫자였다. 현역시절과 라쿠텐 감독시절은 19, 야쿠르트 감독시절은 73, 한신 감독 시절에는 82번을 달았었다.
- 현역시절 소문난 골초였다. 하루에 3~4갑 정도를 아무렇지않게 피웠다는 듯. 하지만 야쿠르트 감독 재임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기에 현재는 금연을 하고 있다.
- 라이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도쿄의 긴자, 오사카의 기타신치 술집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관찰대상) 선수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타석에서 그 선수에게 말하면 상대방은 놀라고 집중력을 잃었다고 한다.
- 노무라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생각의 과정이다. 노무라가 말하는 생각의 과정이란 분석 - 관찰 - 인사이트 - 판단 - 기억의 사이클이다.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분석을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심리 상태까지 통찰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처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과를 기억하고 다음으로 연결한다. 생각의 과정을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팀은 강한 조직으로 변해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 근데 위의 방법은 야쿠르트에서는 성공했지만 한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왜 성공과 실패로 엇갈렸는지. 노무라는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기 위해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저녁 미팅을 가졌다. 야쿠르트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선수들은 처음에 "이런 이야기가 야구의 실전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노무라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35] 물론 한신 감독 시절에도 미팅을 가졌다. 그러나 선수들의 해석 방법이 달랐다.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는 화이트 보드에 써가면서 설명하고 선수들 자신이 스스로 메모장에 필기하는 방법이었다면, 한신 시대는 텍스트를 프린트물로 선수들에게 나눠졌던게 화근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한신 선수들이 노무라의 생각을 취하지 않고 흘려 들었기 때문에 생각을 침투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야쿠르트에는 후루타 아쓰야라는 중심을 확실히 잡아주는 선수가 있었지만 한신에는 그런 선수가 없었던 것이 실패 요인이다. 애초에 강의 방법이 화이트보드든 프린트물이든 당시 한신의 분위기는 노무라의 교육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막장분위기였는데 선수들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훈련 끝나고 나면 저녁에 후원회를 자처하는 자신의 개인 스폰서들[36] 하고 술마시러 다니기 바빴고 술자리에서 감독 뒷담화나 하는 게 일이었다. 이런 개인 스폰서들은 팀의 스타급 주력선수들뿐만 아니라 조금만 싹수가 보이면 유망주 시절부터 들러붙는데 그런 자리에서 아직 기량도 제대로 못 갖춘 주제에 감독 뒷담화나 하는 선수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맞장구를 치는데 열심이었고 또 이런 선수들의 스폰서가 이른바 슈퍼팬의 형태[37] 로 구단 프런트와도 친분관계를 맺고 구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외부에서 초빙한 지장의 말이 먹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통감한 노무라가 물러나는 자리에서 구단주에게 "이 팀은 카리스마형 감독이 선수들의 기강부터 잡아야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추천한 후임이 철권제재의 대명사인 호시노 센이치였다. 호시노는 부임하자마자 선수들의 개인 스폰서들을 아예 구장 및 훈련장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런 스폰서들의 유혹을 못이기고 만년 유망주 수준에 머물렀던 어정쩡한 기량의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타성에 젖은 기존 선수들이 반발해서 팀 분위기가 더 시궁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자기에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될지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고 직전해까지 4년 연속 최하위에 "노무라 감독마저도 이 팀을 구할 수 없단 말인가"라는 위기의식에서 그 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상징이었던 사람을 삼고초려까지 해서 모셔온 감독이라 철권통치에 감히 반기를 들만한 분위기가 아닌 덕분에 호시노의 개혁작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38]
- 혈액형과 선수의 실력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 듯하다. 일본웹에서 검색하면 이 사람의 혈액형에 관한 어록이 꽤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B型O型は一流選手になれるが、A型は1流になれない (B형과 O형은 일류선수가 될 수 있지만, A형은 1류가 될 수 없다)'
- 타격 기록 1위였다가 2위로 밀려난 적이 많다. 출장경기(3,017), 안타(2,901), 홈런(657), 타점(1,988) 모두 2위다. 1963년 한 시즌 최다홈런(52개)를 기록했으나[39] 1964년에 오 사다하루가 55개를 치며 갱신, 1973년 2주간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왕정치에게, 1978년에는 하룻밤 사이에 통산 최다 타점을 역시 왕정치에게, 통산 최다 안타를 장훈에게 타이틀을 내줬다. 노무라는 "나는 침착한 척했지만, 질투의 폭풍으로 마음이 격렬했다. 그래도 라이벌 왕정치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장훈과 노무라도 호적수였으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량을 향상할 수 있었다고 둘 다 밝히고 있다. 노무라는 의외로 나가시마를 라이벌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천재이고 그는 내가 노력할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이길 수 없었어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자신의 인생은 비록 늘 2등이었지만 괜찮다고 한다. 1975년 왕정치가 NPB 최초 600홈런을 먼저 기록했고 본인이 그 다음에 뒤따랐으며, 인기가 많은 센트럴 리그에서 왕정치와 나가시마는 늘 주목을 받고 인기가 없는 퍼시픽 리그에서 뛰는 본인은 야구기록을 갱신해도 그늘진 존재라고 느낀 경우가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조용히 피는 노란 작은 꽃이 노무라의 고향인 교토에서 많이 폈는데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에 꽃들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본인의 모습과 겹친다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센트럴 리그가 아닌 퍼시픽 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비록 관객수는 적을지 언정 관객들을 위해 꽃이 피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이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뒷받침했다고 술회했다.
- 세이부 시절이던 1980년 9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1사 만루 동점 상황에서 노무라는 본인이 외야 희생플라이를 쳐서 주자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대타로 교체되었는데 대타는 땅볼 아웃당하고 말았다. 게임이 끝나고 노무라는 "팀이 승리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하며 그동안은 "항상 개인 성적보다는 팀의 승리가 먼저였으며 (난카이) 코치 때도 늘 이 점을 강조했는데 그것을 잊고 타자의 실패를 원했다"고 했으며 게임 다음날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에 본인의 은퇴 의사를 밝혔고 시즌 종료 후 은퇴하였다. 팀의 승리는 개인의 성공 전에 절대이며, 그건을 잊는다면 끝났다고 강조하고 있다.
- 코치는 선수에게 단순히 야구기술만 전수해줄 것이 아니라 사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수는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코치는 선수들의 질문을 유도하게끔 하여 사고 기술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치의 열성적인 지도도 선수는 흡수할 수 없다고 하며, 선수가 스스로 얻어낸 것들은 지도자가 가르치는 대답보다 여러번 확신할 수 있으며, 스스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르치지 않고 인도하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 노무라가 프로 3년차에 접어드는 봄에 난카이 호크스는 하와이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바로 지난 해에는 2군에서 뛰었지만 불펜 포수 역할로 1군에 합류했는데 하와이 도착 환영 파티에서 난카이 구단 대표가 훌라댄스를 추는 사진이 일본의 스포츠 신문에 실리자 난카이 본사는 분노했다. 선수들도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놀러다니는 동안 노무라는 묵묵히 공을 받았고 연습 종료 후에는 사용된 공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매일 밤 당시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의 방에 가서 "오늘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꼼꼼히 보고했다. 주전 포수였던 마쓰이 아츠시 대신 경기에 출전할 때 포수리드를 잘했으며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는 공항에서 츠루오카는 "이번 전지훈련에 대해 이야기할 게 없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지만 "노무라만 수확했다"고 회상했으며 이것이 노무라의 미래를 열였다. 츠루오카는 메이저리그 야구 전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츠루오카의 '뇌야구'를 노무라는 철저히 배웠다.
- 노무라는 감독 뿐만 아니라 책 집필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야구팬들이 노무라의 책을 읽었지만, 점차 사업가, 기업인, 회사원들이 노무라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노무라의 야구 이론에 의하면 뛰어난 천재 선수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평범한 선수들을 움직여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평범한 직원으로 구성된 회사를 운영하는 총괄 매니저의 기업 경영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그것은 아무거나 칭찬하거나 친절하게 치료하는 사랑이 아니라 할 말을 똑바로 말하고 상대방을 가혹하게 대하고, 때로는 꾸짖는 것도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난과 칭찬이 종종 언어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선수 앞에서 화부터 내는 건 금하고 있는데 분노는 지도자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통제 할 수 없다는 증거이며 개인의 감정과 욕망만으로는 선수를 양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팀은 더 강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노무라가 난카이 현역 선수 시절 츠루오카 감독은 군대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어서 늘 선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라이벌팀과 지속적으로 비교하는 게 일상이었으며 이런 날이 지속되면 라이벌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소속팀에 대한 반감이 자란다고 말한다.
- 시장 경쟁에서 라이벌에게 이기려면 자신의 약점을 분석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쿠르트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야쿠르트는 늘 하위권을 전전했으며, 야구는 상대방을 무득점으로 묶으면 승리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팀 재건의 첫 방법으로 투수진 강화를 택했다. 이토 토모히토, 오카바야시 요이치, 이시이 가즈히사 등 선발 투수진들을 키워냈고 야쿠르트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992년 드래프트 회의 당시 투수 이토 토모히토냐 타자 마쓰이 히데키냐를 고민했는데 야구는 투수라는 믿음이 있어 이토를 택했다.
- 요즘 일부 코치들은 선수와 친구들만큼 가까운 것 같지만, 코치는 여전히 선수들에게 경외심을 심어야 합니다. 즉, 당신은 무서운 지도가 되어야 하며 지도자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팀에 긴장감이 없을 때 그 팀은 끝났다고 말하며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포수 포지션을 중요시 하게 생각한다. 투수가 퍼펙트 게임이나 완봉승을 달성하는 것도 포수의 힘이며 노무라가 현역 시절 승리 투수가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았다고 한다. 야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를 쓰는 사람들, 그가 바로 좋은 포수라고 말한다. 도루 저지 뿐만 아니라 전략의 계산, 타자의 심리 분석, 투수 리드 등 화려한 무대 뒤에서 포수는 역할을 수행하며 같은 포수인 모리 마사아키와도 생각을 공유했다. 특히 후배 포수들을 양성할 때 강조했던 점이 구종 사인을 하나하나 낼 때는 신중하게 였다. 특히 포수는 타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타자의 표정과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포수는 항상 입을 다물었다가 오른쪽 눈으로는 캐칭한 미트를 보고 왼쪽 눈으로는 (우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표정을 보라고 지도했다. 투수를 알고 싶으면 포수를, 포수의 감각을 타격에 활용하고 싶다면 포수에 대해 알 것을 말한다. 이를 잘 소화한게 후루타 아츠시였다. 감독도 외야수보다는 내야수, 내야수보다는 포수 출신이 제격이며 야구가 점점 세밀하게 진화하는 시대에 포수는 작은 것까지 관찰하며 이에 반해 외야수는 대략적인 것만 보는 시야가 생긴다고 말한다.
- 포수 시절 타자를 아래의 4가지 유형으로 정리하고 각 유형별 상대법에 대해 생각했다.
A.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면서 변화구에 대응하려고 하는 유형
B. 인코스 또는 아웃코스와 같이 스트라이크 코스를 미리 결정하는 유형
C. 타격 방향(좌익/우익)을 결정하는 유형
D. 타자 각 개인이 가장 치기 좋아하는 공을 타격하는 유형
- 선수들의 적성과 능력, 문제점을 알아보고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잘했기 때문에 "노무라 재생공장"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백업포수였던 이이다 테츠야의 빠른 발을 활용하기 위해 외야수로 전환시켰고(포수 겸임) 여러 포지션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포지션 변환과 같이 매우 중요한 변화를 말할 때 동기를 부여하는 단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예가 바로 구원투수로의 전환을 망설였던 에나츠에게 했던 말, "혁명"이었다. 난카이 감독에서 해임 후 현역 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평론가인 구사나기 다이조(Daizo Kusanagi)가 "노무라 당신은 아직 젊다. 인간은 평생 학생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고 "평생포수"라는 단어를 늘 품에 안고 살았다고 한다.
-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둔감해지며 요즘 야구선수들을 보면 플레이에 너무 의욕이 없다고 느낀다고 하다. 특히 불감증을 싫어했는데 감독 당시 의도적으로 벤치 앞에 공을 흘려두면 수비에서 돌아온 선수들 중에 공을 줍는 선수가 있고 공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선수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 야구에 대한 태도가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꼬집고 있다. 코치도 꿈과 철학을 갖고 선수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고생하여 부자가 되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려고 했으나 꿈을 접었고 결국 그에게 남은건 야구였다. 야구에도 도구 구입비가 들어서 도구를 사달라고 할 수 없었고 중학교 야구부 단체사진을 보면 한 명만 유니폼을 입지 않았는데 그게 노무라였다. 노무라는 후배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갔다고 한다.[40]
-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랐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명품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다. 주로 수집하는 품목은 베르사체의 넥타이와 시계로 넥타이가 약 400개 시계가 수십개에 다다랐지만 야쿠르트 감독시절 도둑을 맞아 시계를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모으고 있다는 듯. 현역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리 마사아키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전력 분석 차, 한큐와 같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노무라를 찾아와 밤새 야구를 이야기를 나눈 뒤 노무라의 양복을 꼭 한 벌씩 가져갔다고 한다.
7. 대중문화
- 사무라이 자이언츠 - 주인공 반바 반이 소속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1973년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하는 퍼시픽리그 우승팀 난카이 호크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등장. 특유의 트래쉬 토크과 장타력으로 반바를 잠시 괴롭히지만, 자이언츠의 V9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한다.
- 아부상 - 주인공 카게우라 야스타케의 소속팀이 난카이-후쿠오카 다이에-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인 만큼 당연히 등장. 연재 초기엔 플레잉매니저 시기라 선수 겸 감독으로 등장하며 난카이를 떠난 뒤에도 롯데 오리온즈-세이부 라이온즈의 선수로써, 그리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써 카게우라와 대결한다. 참고로 난카이 플레잉매니저~라쿠텐 감독까지의 시기는 무려 36년! 참 기나긴 인연이다..(...)[41]
[1] 1977년 시즌 최후반에 해임.[2]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2006년 해체.[3] 시즌 도중 마지막 2경기를 남겨놓고 해임당했다. 나머지 경기는 당시 난카이 2군감독 아나부키 요시오가 감독대행을 맡음.[4] 하지만 본인은 선수시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했다. [5]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 포수로서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린 선수인 마이크 피아자의 다른 포지션 홈런 기록까지 합한 것이 '''427홈런'''이다. 이 657홈런은 일본에서는 왕정치가 넘사벽이지만 메이저리그 랭킹에 넣어본다면 역대 홈런왕들 중 4위 윌리 메이스에 불과 3개 뒤진 5위다.[6] 이 기록은 노무라가 은퇴한 후 35년 동안 계속 1위였으나, 35년 뒤인 2015년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경신했다. [7] 스즈키 이치로는 기록 대부분을 메이저 리그에서 달성하여 NPB 통산 기록엔 못 들어간다.[8] 절대로 불명예 스러운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오랫동안 1군에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9] 난카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적절한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교토현 미네야마에 있는 본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카이에 불합격하면 히로시마 도요 카프행도 고려했다고 한다.[10] 노무라 때문에 홈런,타점 부문에서 계속 콩라인에 머물렀던 선수가 있었다. 바로 장훈[11] 다만 수위타자를 수상한 것은 이 해가 유일. 수위타자를 놓고 늘 경쟁하던 장훈과 에노모토 키하치가 동반으로 부진했던 그 시즌이다.[12] 초창기에는 "다음 공은 머리, 맞으면 아플텐데" 이런 식의 토크였으나, 나중에는 "타격폼이 이상한데?" 이런 식으로 폼을 흐뜨러뜨리는 말로 바뀌었다.[13] 이 트래쉬 토크에 대한 방책으로 백인천은 귀마개를 끼고 타석에 섰다고 한다.[14] 타격폼이 이상하다고 노무라가 말하자 나가시마는 폼을 다시 가다듬고 홈런으로 노무라에게 보답했다. "고마워"말에 노무라는 기절 직전.[15] 당시 장훈은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조센징이 왜 나오나?" 그리고 점잖게 조언했다고 한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라고...[16] 노무라 본인은 책 「プロ野球重大事件 誰も知らない”あの真相”」(프로야구 중대사건 아무도 모르는 "그 진실")에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며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걸면 장훈이 너무 섬세하게 배터 박스에서의 위치를 조절하는 바람에 시합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17] 에노모토 키하치와 왕정치는 와세다 실업고 선후배 사이로, 노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워서 그런가 왕정치를 상대하는 건 에노모토보다 오히려 더 쉬웠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18] 정확히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3위를 기록 후 플레이오프에서 후기리그 1위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싸워 우승. 이 시기에 1973~1982년까지 퍼시픽리그 단독으로 플레이오프가 시행되어 전기/후기 리그로 나뉘어 진행되어 전기/후기 1위 팀이 싸워 이기는 팀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제도로 시행했다.(전후기리그 전부 1위팀은 일본시리즈 직행.) 이 제도는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 운영과 매우 비슷하다.[19]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하필이면 V9 시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1승 4패로 깨졌다. 참고로 이게 V9 시대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그 뒤 1981년에야 요미우리는 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20] 선수 부인들을 갈군다든가, 선수 기용에 간섭한다든가 등등[21] 잔여 경기는 당시 난카이 2군감독을 맡고 있던 아나부키 요시오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아나부키는 후에 1983~1985년 난카이 감독을 맡게 되지만.. 그 당시는 20년간 비밀번호 찍던 시대였고 당연히 성적에 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2] 그러나 이 시기에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와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였다. 자세한 내용은 가네다 마사이치 문서를 참조.[23] 이 기록은 후에 쿠도 키미야스가 경신한다. 쿠도 옹이 2010 시즌까지 뛰어 29시즌 출장기록을 세웠다. 과연 굇수.[24] 오사카 난바의 옛 오사카 구장 자리에 마련돼 있다.[25] 예전에 오사카에 있던 팀들인 난카이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합병)을 추억하는 행사다. 참고로 시즌 중 하는 거라 이것도 엄연히 공식전에 들어가서 승패 성적이 반영된다.[26] 일본시리즈에서 3승4패로 아쉽게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년후 다시 만나 똑같이 4승3패로 그 수모를 갚았다.[27] 노무라가 떠난 후 호크스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거치며 1998년 리그 A클래스(1~3위권)에 오르기 전까지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에도 오르지 못하며 무려 20년간(1978~1997년) 리그 하위권인 B클래스(4~6위권)에만 머물렀다.''' 일명 노무라의 저주라 불리는 호크스의 암흑기.[28] 이것으로 2005년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사망한 오기 아키라가 오릭스 버팔로즈 초대 감독으로써 기록한 '''최고령 감독 기록''' 을 갱신했다.[29] 통산 222경기에서 타율 .185, 4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66안타.[30] 괄호 안이 일본식 이름.[31] 재미있게도 자기 아버지가 감독하던 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주축 투수였다.[32]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이긴 하다 송구가 아무리 빨라봐야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기에 되도록이면 공을 던질 때 까지의 준비시간을 줄이는게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이득이지만 메이저리그의 경우 도루를 그렇게 많이 하는 주자도 없는데다가 타자를 우선적으로 잡고 본다는 시각이 있어서 퀵모션을 안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드물게 아예 안가르치는 경우도 있다.[33] 원래 셋 포지션에서 투구폼을 더 줄인다라는 발상은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미 주장하긴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34] 노무라가 감독을 맡았던 사회인야구 팀 '시닥스' 출신의 모리후쿠 마사히코도 호크스에서 19번을 달았었다.[35] 이걸 벤치마킹한 게 김성근이다. 김성근도 sk시절 선수들에게 이런 식의 미팅을 매일 가졌다. 노무라 쓴 id노트를 선수들에게 보게 하고 이후 김성근이랑 노무라가 대담을 한 적도 있고 김성근 스스로가 노무라의 책을 보고 야구인생이 바뀌었다고 할정도 김성근이 소위 자기 스스로 데이터야구를 한다고 하는데 이 데이터 야구의 원조가 노무라의 야쿠르트 감독 시절 주창한 id야구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8/2010011801597.html[36] 이를 일본 속어로 '다니마치'라고 하는데 원래 스모에서 나온 말이다. KBO 리그에서도 선수 팬클럽 문화가 있기는 한데, 일본처럼 정식으로 단체 세워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팬카페 만들고 단관하거나 돈 모아서 조공하는 정도.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선수 개인 스폰서는 KBO의 선수 팬클럽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데 일단 스폰서로 나서는 사람들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유력자이나 유명인사들이고 이들이 선수들에게 주는 금일봉의 규모는 선수가 구단에게서 받는 연봉은 몽땅 저축하고 금일봉으로 받는 돈만 가지고도 생활비로 쓰고도 남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37] 참고로 노무라가 한신에 부임한 초기에 승승장구할 때 오사카의 한 귀금속점에서 순금으로 만든 노무라 감독상을 만들어서 팔았다. 당시 한국돈으로 수천만원이나 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런 걸 만든 것도 기가 막힐 판에 더 기가 막힌 건 이걸 진짜로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 이런 걸 돈 주고 지르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19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후지나미 신타로가 참석한 유흥 파티도 이런 스폰서가 연 것이다.[38] 정작 호시노 본인도 일본프로야구 후원회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게,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요미우리의 이승엽에게 X털린 직후 자기 후원회 모임에서 애꿎는 한국 징병제, 심판 탓을 했다(...).[39] 이전 기록은 1950년에 기록한 코즈루 마코토(쇼지쿠 로빈스)의 51개였으며 노무라가 갱신 후 "내 기록은 10년 이상 깨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코즈루는 참고로 NPB 1시즌 최다 타점(161개) 기록 보유자다.[40] 홀어머니 가정에서 가난과 싸우며 성공한 점은 장훈과 동일하다.[41] 연재 시작인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카게우라는 은퇴도 못하고 무려 63세(!)까지 현역 선수로 뛴다는 설정이다(...) 작가 미즈시마 신지도 이렇게 길게 끄는 건 좀 그랬는지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에서 해임된 해에 같이 카게우라를 은퇴시켰다.. 그러나 연재는 그 이후로도 계속 하다가 2013년 완결. 그건 그렇고 카게우라 저 인간, 아무리 만화라지만 난카이부터 시작해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까지 현역선수로 뛴 무서운 인간이다(...) 현실에서 그걸 실현한 선수는 난카이 말기에 신인으로 입단한 오미치 노리요시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