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모토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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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시절
1. 프로필
2. 소개
3. 현역 시절
5.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
6.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 시절
7. 은퇴 이후, 그리고 평가


1. 프로필


이름
니시모토 유키오 (西本幸雄)
생년월일
1920년 4월 25일
타계
2011년 11월 25일
국적
일본
출생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 시
투타
좌투좌타
포지션
1루수
학력
와카야마 중학교-릿쿄대학
소속팀
마이니치 오리온즈 (1950~1955)
지도자
마이니치 오리온즈 플레잉코치 (1954~1955)
다이마이 오리온즈[1] 2군 감독 (1956~1958)
다이마이 오리온즈 1군 타격코치 (1959)
다이마이 오리온즈 감독 (1960)
한큐 브레이브스 1군 코치 (1962)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1963~1973)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 (1974~1981)

2. 소개


일본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야구 역사상 대표적인 비운의 명장이자 레전드급 '''콩라인'''(...)[2] 그리고 선수부터 코치, 감독 시절까지 오로지 퍼시픽 리그에서만 활동해 온 퍼시픽 리그의 대표 원로이기도 하다.

3. 현역 시절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33년 야구 명문교인 와카야마 중학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야구부엔 들지 않고 3학년 때까지는 럭비부에 소속해 있었다. 그러나 4학년[3] 가을에 야구부에 입부했는데, 주로 1루수를 봤지만 부원이 부족한 팀 사정상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2루수로 나서기도 했으며,[4] 어떨 때는 구원투수로 등판한 적도 있었다. 5학년 때인 1937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쉽게 패하면서 고시엔 출전과는 연을 맺지 못했다. 중학 졸업 후 릿쿄 대학에 진학했는데, 야구부에 감독이 없어서 사실상 감독 겸 선수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1943년 야구 리그가 중지되자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종전을 맞아 귀국한 후 사회인 야구 야와타제철, 호시노구미 등의 팀에서 활약했고 특히 호시노구미 시절 감독 겸 선수로 팀을 도시대항 야구대회 우승으로 이끈 경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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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선수 시절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입단할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30세로 절정기가 다소 지난 느낌이었지만 주전 1루수와 1,2번 타자를 번갈아 맡으며 마이니치가 1950년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를 제패[5]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52년엔 주장을, 1954년엔 선수 겸 코치를 맡아 플레이하였다.
1955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성적은 6시즌, 491경기 출전에 타율 .244, 6홈런, 99타점, 44도루.

4. 다이마이 오리온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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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부터 1959년 까지 다이마이의 2군 감독과 1군 코치로 활동하던 중, 감독이던 벳토 카오루가 1959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하면서 니시모토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니시모토는 시즌 초 그에게 반발하던 몇몇 선수들과 갈등을 벌이기도 했지만[6] 1960년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에서 선수들이 반발하여 스트라이크를 벌일 정도의 맹훈련으로 팀의 체질을 개선하였고, 그해 퍼시픽 리그 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은 센트럴 리그의 상대팀은 명장 미하라 오사무가 지휘하던 다이요 훼일즈. 당시 에노모토 키하치-타미야 겐지로-야마우치 카즈히로의 살인 강타선이 돋보이던 다이마이의 절대 우세가 점쳐졌지만,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4전 전패로 다이마이의 참패.''' 그것도 전부 '''1점차 패배'''였다(...).
시리즈 종료 후 구단주이던 나가타 마사이치는 보고 차 찾아온 니시모토에게 시리즈 2차전 때 스퀴즈 작전을 실패한 것을 트집잡아 그 막강한 공격력은 엿바꿔 먹었냐며 '''바카야로(멍청한 자식아)''' 라는 폭언을 퍼부었고 이에 분노한 니시모토는 사표를 던지며 단 한시즌 만에 첫번째 감독 캐리어를 마감했다.

5.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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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선수는 한큐 에이스이던 야마다 히사시
이후 1년 간 해설가로 일한 후 1962년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로 영입되어 이듬해 정식 감독에 취임했다. 만년 하위권을 맴돌며[7] 일명 '''회색 구단''' 이라 불리던 한큐 선수단을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조련했지만 정작 성적은 1962년 5위, 1963년 6위(최하위)[8] 1964년 2위, 1965년 4위, 1966년 5위로 1964년을 제외하곤 계속 하위권에 첫 최하위를 찍기까지 했고, 자신이 선수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니시모토는 선수단에게 사상 초유의 감독 신임 투표[9]를 제안한다. 그리고 이 투표 결과에서 찬성(재신임) 32표, 반대(감독 퇴진) 7표, 기권 4표로 찬성 측의 표가 훨씬 많이 나왔지만, 기권표까지 포함해도 찬성을 하지 않은 표가 무려 11표가 나왔다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인 니시모토는 결국 감독직 사임을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구단 오너이자 니시모토를 감독으로 영입한 '''코바야시 요네조'''가 '''"우리 팀 감독은 당신 뿐이오"'''라며 니시모토의 사임을 만류했다. 결국 니시모토는 사임 의사를 철회하고 감독직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단 운영의 주도권을 잡은 니시모토는 과감한 트레이드와 더 맹렬한 훈련으로 선수단의 체질을 개선해 결국 1967년에 창단 첫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73년 까지 총 5번의 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니시모토는 명감독 반열에 오르는 듯 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 파트너가 리즈시절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였고, 볼것없이 전부 탈락했다(...).[10]

6.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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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한큐보다 더욱 바닥을 기는 전력을 자랑하며(...) '''짐짝 구단''' 이라 불리던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니시모토는 전보다 더욱 힘들게 팀 전력을 끌어올려야 했고, 그 결과는 1975년 퍼시픽 리그 후기리그 우승[11]에 이은 1979년 퍼시픽리그 전기리그-플레이오프 우승(긴테쓰의 창단 첫 리그 우승)이었다.
1979년 일본 시리즈의 상대는 고바 타케시 감독이 이끌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까지 3승 3패로 팽팽히 맞서 있던 긴테쓰는, 7차전에서 경기 종반까지 3대 4로 뒤지다가 9회말에 히로시마 마무리 에나츠 유타카를 공략해 무사 만루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1978년 타격왕이었던 '''사사키 쿄스케'''가 삼진으로 물러났고, 다음 타자 '''이시와타 시게루'''에게 스퀴즈 번트를 지시했지만 에나츠가 이를 간파하고 피치 아웃으로 3루 주자 '''후지세 시로'''[12]를 잡아내며 투아웃, 그리고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 노볼로 몰린데다가 스퀴즈 실패로 멘붕한 이시와타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허무하게 우승 찬스를 날려먹고 말았다(...)[13]
이 후 1980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히로시마에게 3승 4패로 패퇴했고 1981년 시즌 리그 최하위로 추락한(전기 6위/후기 4위) 니시모토는 그 해를 마지막으로 긴테쓰 감독직을 내려놓고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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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를 헹가래 쳐주는 긴테쓰와 한큐 선수들
하지만 1981년 10월 4일, 일본생명 구장에서 더블헤더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시즌 최종전이자 니시모토의 감독 은퇴 경기는 많은 팬들이 모일 수 있도록 긴테쓰 구단 측에서 무료 입장을 선언했고,[14] 만원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경기를 모두 마친 후 긴테쓰 선수들은 물론 이전 한큐 감독 시절 수석 코치로 자신을 보좌해준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을 포함한 한큐의 제자들까지 한데 모여 스승 니시모토를 헹가래 치며 그의 마지막을 빛내주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니시모토의 20년 간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1384승 1163패 118무승부, 승률 0.543''' 이다.
1988년에 가네다 마사이치, 나가시마 시게오, 벳토 카오루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참고로 니시모토의 일본시리즈 준우승 이력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회수
연도
상대팀
전적
1
1960
다이요 훼일즈
0승 4패
2
1967
요미우리 자이언츠
2승 4패
3
1968
요미우리 자이언츠
2승 4패
4
1969
요미우리 자이언츠
2승 4패
5
1971
요미우리 자이언츠
1승 4패
6
1972
요미우리 자이언츠
1승 4패
7
1979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승 4패
8
1980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승 4패

7. 은퇴 이후, 그리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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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니시모토
1982년부터 2003년까지 간사이TV 해설가로 활동하였고, 1985년 시즌 전 다이요 훼일즈한신 타이거스의 감독 취임 요청을 받았지만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거부했다. 이 때 니시모토는 한신 구단 측에 "나 대신 예전에 그쪽 팀 감독이었던 요시다 요시오는 어떻소?" 라고 추천하여 한신은 요시다를 감독으로 재영입 했는데, 공교롭게도 요시다 감독은 그 해 구단 사상 최초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6년 시즌 후에도 한신은 한번 더 니시모토를 감독 후보로 검토했지만 또다시 거절하면서 니시모토의 현장 복귀는 무위에 그쳤으며 이 때에도 니시모토 대신 한신 감독에 취임한 인물은 바로 요시다 요시오였다.
2003년 9월, 니시모토는 80살을 넘긴 고령으로 인하여 해설가 직에서 물러난 후[15] 가끔 스포츠 신문에 기고하는 것 이외엔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에서 바깥 출입을 삼가며 은거해 오던 중, 2011년 11월 25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1세. 그의 장례식은 11월 29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자리에 세워진 쇼핑몰 '''한큐 니시노미야 가든즈''' 부근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고, 조사(弔辞)는 니시모토의 긴테쓰 감독 시절 애제자이던 나시다 마사타카가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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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시절 선수 육성에는 상당히 뛰어났고, 하위팀을 상위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생전 은둔생활 중에도 야구계 원로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지낸 원로 야구인 요시다 요시오는 "니시모토는 명장이자 명 코치였다"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만년 하위구단이던 한큐, 긴데쓰를 리그의 강호 반열에 올려놓아 리그 활성화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준우승 감독임에도 일본 야구 최고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16]
명감독을 키워낸 명감독으로도 유명했는데, 한큐 감독 재임 중에 마이니치 시절 애제자 야마우치 카즈히로의 추천만 믿고 수석 코치로 영입한 우에다 토시하루는 훗날 니시모토의 후임 감독으로 한큐를 퍼시픽 리그 4연패, 일본 시리즈 3연패로 이끄는 대업을 달성했고, 긴테쓰 감독 시절 전임 미하라 오사무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 겸 주루코치로 중용한 오기 아키라는 훗날 긴테쓰, 오릭스 감독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3회, 일본 시리즈 우승 1회의 실적을 남겼다. 그것도 나가시마가 이끄는 요미우리를 제물삼아.[17] 또 긴테쓰 감독 때 제자로 키운 나시다 마사타카도 긴테쓰의 마지막 감독, 닛폰햄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일본 야구계에선 대표적인 철권통치의 아이콘 이었으며, 종종 선수를 구타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75년 긴테쓰 감독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경기 막판 긴테쓰에 강한 면모를 보이던 야마구치 타카시[18]가 구원 투수로 등판하자 타자들을 불러 모아서는 "절대로 초구는 치지 말라. 만약 초구가 볼이면 2구도 휘두르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후속 타자인 하타 코이치가 무심결에 초구를 헛스윙하고 3루 땅볼로 물러나는 바람에 열받은 니시모토 감독이 덕아웃에 돌아온 하타를 두들겨 패버린 이른바 "하타 구타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19][20]
앞서 언급한 대로 8번의 준우승 경력이 말해주듯 '''비운의 명장''' 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지만 이런 평가에 대해 니시모토 자신이 말하기를,

만약 내가 진짜로 비운이었다면 전장에서 이미 죽은 몸이었겠지.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온다던가 다이마이, 한큐, 긴테쓰 세 팀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만나서

여덟 번이나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운의 명장? 차라리 행운의 범장(평범한 장수) 이었다고 한다면 인정하겠다.'''

한편으로 3개 팀을 거치면서 전부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일본 야구사상 니시모토와 미하라 오사무, 호시노 센이치뿐이다. 그나마 미하라는 1리그 시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리그(니시테쓰 라이온즈), 센트럴리그(다이요 훼일즈)를 오가며 우승을 맛본 반면, 니시모토가 우승시킨 다이마이, 한큐, 긴테쓰는 모두 퍼시픽리그 소속이었다.

[1] 1957년 마이니치가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합병 하여 구단명이 변경되었다.[2] 후술하겠지만 현역 시절엔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으므로 완벽한 콩라인은 아니다. 단지 감독 시절 '''일본시리즈 준우승 8회'''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렇지(...)[3] 당시 중학교는 5년제[4] 프로에 입문한 첫해인 1950년 마이니치의 시즌 최종전 때 당시 감독이던 유아사 요시오가 니시모토를 팬 서비스 차원에서 1이닝마다 한 포지션씩 돌린 적이 있었다. 이때 왼손잡이인 니시모토는 투수와 1루수, 외야수는 물론이고 2루수, 3루수, 포수까지 다 봤다(...) [5] 2리그 분리 이후 첫 우승이었다. 상대팀은 쇼치쿠 로빈스.[6] 사실 후술할 한큐 감독 시절의 감독 신임투표 사태와 비슷한 일이 다이마이 시절에도 벌어진 바 있는데, 당시 전임 감독이었던 벳토 카오루를 지지하던 몇몇 선수들이 시범경기에서 경기가 치뤄지는 야구장에 아예 오질 않는 등 니시모토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고, 이에 팀 분열을 걱정한 니시모토는 어느 날 선수단 미팅에서 '''"나를 감독으로써 신임하는가 신임하지 않는가, 투표를 해달라"'''라고 요청하고 방을 나갔다. 그 뒤 선수들끼리 얘기가 오고가는 가운데, 팀내 고참 강타자였던 야마우치 카즈히로가 '''"나는 야구를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그러니까 감독이 벳토 씨든 니시모토 씨든 그런건 상관없어!"''' 라고 말하며 니시모토에게 사실상 동조했고, 그 말에 당시 팀의 또다른 고참 강타자였던 에노모토 키하치도 니시모토 편을 들면서 결국 팀 분위기는 니시모토를 감독으로 인정하자는 쪽으로 흘렀고, 천만다행으로 감독 신임 투표는 없는 일이 되었다.[7] 요미우리 자이언츠 왕조의 태조이자 한신 타이거즈의 첫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명장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1957년부터 3년 간 감독을 맡았지만 4-3-5로 3년 연속 하위권을 마크한 뒤 자진 사임할 정도였다(...)[8] 구단 사상 첫 최하위였는데, 그후 2002년 이전까지는 한큐 브레이브스와 그 후신구단인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가 단 1번도 최하위를 기록한 적이 없었다![9] 당시 니시모토는 선수단에게 '''"다음 시즌에도 (나와) 함께 싸울 각오가 된 사람은 O표를, 그렇지 않은 사람은 X표를 찍으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10] 니시모토가 퇴임한 후에야 한큐는 후임 감독인 우에다 토시하루의 지도 하에 1975~1977년 일본시리즈를 3년 연속 제패하며 비로소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었다...[11]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했다(심지어 긴테쓰는 그 해 승률 1위였다! 한큐는 2위). 그리고 한큐는 일본 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격파하며 구단 통산 첫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12] 201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즈키 타카히로가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역대 대주자로서 가장 많은 도루를 성공한 전문 대주자 요원이었다.[13] 이 장면은 '''에나츠의 21구'''라 불리며 아직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 장면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14] 사실 당시 퍼시픽 리그 인기는 바닥인 데다가 최하위가 확정된 시즌 막판이던 긴테쓰로서는 구장을 꽉 채우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무료 입장 뿐이었다(...).[15] 해설가 은퇴 경기는 한신이 1985년 이후 호시노 센이치의 지휘 아래 18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2003년 9월 1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이였다. 여담으로 18년 전 한신이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기 전 21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1985년 10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도 니시모토가 해설을 맡았다.[16] 보통 그 해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팀의 감독에게 주는 상이다. 그 해 일본시리즈 MVP나 리그 MVP를 수상한 선수가 수상하는 경우도 있다.[17] 참고로 나가시마는 1기 감독 재임중에 '''우에다 토시하루가 이끌던 한큐에게 2번이나 일본시리즈에서 깨진 경력이 있다.'''[18] 장훈에 일본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3,000안타를 내준 우완투수다.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 투수코치로 재직하면서 후지카와 큐지를 리그 최정상의 불펜투수로 키워내었다.[19] 사실 니시모토가 선수들에게 초구를 치지 말라고 지시할 당시, 하타는 대기 타석에 있었기 때문에 니시모토의 지시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하타 자신이 해명했고 처음엔 좀 분했지만 나중엔 니시모토 감독의 심정을 이해했다고 털어놓았다.[20] 또한 하타의 동료인 나시다 마사타카가 "하타는 감독님이 지시할 때 대기 타석에 있었다" 라고 설명하자 니시모토는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하타에게 직접 사과하지는 않았고, 후일 긴테쓰가 오릭스와 합병될 무렵 언론사에서 마련한 하타와의 대담 시간 때 "때리고 나서 후회하긴 했지만 사과한다면 감독 입장이 무너질 것 같아 그냥 넘어갔다" 라고 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