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히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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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역동적인 투구폼을 자랑하던 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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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 시절.
1. 소개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
20시즌에 걸친 프로 선수로서의 활동을 한큐 브레이브스 한팀에서만 해낸 프랜차이즈 선수의 대표적 인물이자,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서는 통산 최다승인 '''284승''' 이란 기록을 보유한,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서브마린''' 투수이다.
2. 프로 입문 전
1948년 7월 29일 아키타현의 노시로 시 태생인 야마다는 고교 선수였던 형 츠토무의 뒤를 이어 야구를 시작했고, 형의 모교이던 노시로 고교로 진학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 였지만 2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 예선 때 자신의 실책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을 계기로 투수로 전향했다고.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 후지제철에 입단한 야마다는 이 때부터 투구폼을 언더핸드로 바꾸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 현역 시절
1967년 드래프트 회의 때 하위권인 11번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지명 되었으나 거부하였고, 이듬해인 1968년 한큐에서 1위로 지명[1] 하였지만 척추분리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재활에 들어가는 바람에 약 1년을 쉬고 1969년 시즌 도중 비로소 한큐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첫해엔 7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5.40 으로 부진했으나 2년차 시즌인 1970년 팀의 주력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아다치 미츠히로''' 등 사이에서 실력을 드러내며 선발 한 자리를 꿰차고 10승 17패, 평균자책 3.19로 나름대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71년 22승을 거두고 평균자책 홀더(2.37)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까지 17시즌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명실상부한 한큐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야마다는 언더핸드 스로 투수임에도 속구 스피드가 상당하여 힘을 앞세우는 파워피칭으로 타자들을 압도하곤 했는데, 당시 한큐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가 항상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이다"라고 다그쳐도 야마다는 '''"무슨 말씀을! 직구에 힘만 있으면 한가운데로 던져도 절대 못 칩니다!"''' 라고 대놓고 반발할 만큼 상당한 배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야마다가 은퇴한 지 20년 이상 지난 후, 옛 스승을 문안하러 온 야마다에게 니시모토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나한테 정면으로 대든 녀석은 네놈밖에 없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2]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정면 승부만 고집하다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쓰리런 홈런을 두들겨 맞고 피눈물을 흘린 적도 있고(...), 통산 피홈런 2위(490피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3]
그러나 1972년 시즌 이후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자신의 무기이던 구속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973~1975년까지 두 자리 승수는 거두었지만 평균자책이 야마다답지 않게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을 오가는 부진에 빠졌다. 결국 야마다는 팀 대선배이자 동료인 아다치 미츠히로에게 전수받은 '''싱커'''를 새로운 구종으로 장착[4][5] 하며 기교파 투수로 변신, 1976년 26승 7패 5세이브, 평균자책 2.39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또한 한큐의 1975~1977년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도 큰 공을 세웠고 그 중 1977년엔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크게 공헌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6]
이후로도 한큐의 에이스로 활약한 야마다는 1982년 4월 29일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통산 200승을 거두었고,[7]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1986년 14승을 끝으로 연속 두 자리 승수 시즌이 17년에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87년(그해 7승 7패, 평균자책 3.72)에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8] 했으나 이미 야마다의 기량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결국 1988년 4승 10패, 평균자책 4.88의 시즌 기록을 끝으로 장장 20년 동안 이어 온 현역 생활을 마감, 그라운드를 떠났다.
야마다의 통산 성적은 '''654게임 등판, 284승 166패 43세이브, 2058탈삼진, 평균자책 3.18.'''
4. 은퇴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야마다는 NHK, 닛칸스포츠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던 중 1994~1996년 친정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 코치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1997년 오릭스를 나와 해설가 생활을 하던 중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 코치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고[10] , 2002년 호시노 센이치 후임으로 주니치 1군 감독으로 임명되어 2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지만 200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당했다(...).[11]
2004년부터 CBC(중부일본방송)의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에게 투수 기용의 전권을 거의 다 위임받아 마운드를 이끌며 일본의 WBC 2연패에 공을 세웠다.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1] 이 해 한큐의 드래프트는 1위 야마다 히사시, 2위 가토 히데지, 7위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히는 1968년 드래프트에서도 가장 풍작을 거두었던 팀이 한큐였다.[2] 당시 철권통치의 대명사로 경기 중이라도 형편없는 플레이를 벌인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을 서슴지 않던 니시모토 앞에서 대든다는 것은 살기가 싫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야마다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으니 니시모토가 참고 넘어간 듯 하다.[3] 단, 원체 언더핸드 투수가 피홈런에 약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4] 야마다는 직구 중심의 피칭에 한계를 느끼자 아다치에게 싱커 투구법을 배우려 했으나 당시 아다치는 '''"직구가 통용될 때는 싱커는 던지지 않는 게 좋다"''' 며 싱커 그립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고 매일 같이 연구를 거듭한 노력 끝에 아다치에게서 도움을 받았다.[5] 아다치는 후에 '''"자신보다 젊은 야마다가 싱커를 장착하면 큰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2명은 필요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6] 다만 정규시즌 때와는 달리 야마다의 일본시리즈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위에서 말한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는 등 난조를 보이며 시리즈 통산 성적은 6승 9패 1세이브에 그쳤다. 특히 본인의 프로 경력 마지막이자 한큐의 마지막 일본시리즈였던 1984년엔 등판하는 경기마다 후반부에 체력 난조로 인해 히로시마 토요 카프의 강타선에 무자비하게 공략당해 역전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3패(!)나 당하는 바람에 팀의 패배에 제대로 일조했다.. 반대로 올스타전은 통산 7승을 거둘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7] 그런데 이날 상대 타자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 세 방을 맞았다(...).[8]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뽑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1987 시즌 개막전에 기요하라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다. [9] 조성민의 데뷔 첫세이브때 삼진쳐먹은 적 있다. 승리투수는 아이치현 출신인 마키하라 히로미였다. 당시 요미우리는 투수진붕괴와 기요하라의 대왕먹튀질때문에 꼴찌로 꼬라쳐박는 중이었으나 조성민을 갈아마시면서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조성민은 이해 팀 최다세이브 기록자였다.[10] 주니치에 몸담았을때는 유니폼에 H.YAMADA로 박혀있는데 같은 코치진 중에 성씨가 같은 카즈토시가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카즈토시는 1984년 50살 투수로 유명한 야마모토 마사와 함께 고향팀인 주니치에 입단해서 1990년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오토 시게키[9] 와 함께 삼성에서 타격코치한 적이 있는나가시마 기요유키와 2:1 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옮긴뒤 1995년 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1996년 다시 오토 시게키와 함께 주니치에 복귀했으나 부상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그후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코치로 2010년까지 프런트에 몸담았다가 11년부터 선수생활을 마감했던 히로시마에 쭈욱 몸담고 있다. 여담으로 카즈토시의 아들이 유명배우이다.[11] 잔여 시즌은 수석 코치이던 사사키 쿄스케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했고, 그 후 팀 성적이 크게 상승하며 주니치는 그 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