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다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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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요네다 테츠야(米田哲也)
생년월일
1938년 3월 3일
출신지
일본 돗토리요나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6년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56~1975)
한신 타이거즈(1975~1976)
킨테츠 버팔로즈(1977)
지도자 경력
한신 타이거즈 코치(1985~1986)
오릭스 블루웨이브 코치(1992~1993)
킨테츠 버팔로즈 코치(1995)
1. 소개
2. 학창 시절
3. 프로 시절
4. 은퇴 이후
5. 여담


1. 소개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한큐 브레이브스에이스로서 팀을 이끈 명투수로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기록 '''이었던''' 949경기 등판[1], 카네다 마사이치의 뒤를 잇는 역대 2위인 통산 350승의 기록 보유자이다.
경이로운 스태미너의 소유자로 현역 시절 '''가솔린 탱크''', '''인간 기관차''' 등의 별명으로 통했다.

2. 학창 시절


1938년 3월 3일 돗토리요나고 시 오시노즈 정[2]에서 과 생활용품을 파는 상인(요네다 마사아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나고 시립 미호 중학교 시절 높이뛰기 선수였던 요네다는 사카이 고교에 진학하여 야구에 입문했다. 처음엔 포수를 맡았지만 야구부장이던 마키 카즈오 선생님의 "자네 얼굴은 험상궃어서 포수로 앉아 있으면 투수들이 무서워 할 수 있다. 반대로 네가 투수를 하면 상대 타자에게 공포심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투수로 전향한 요네다는 1학년 가을부터 투수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커브, 역회전볼, 슬라이더 등 다양한 변화구를 장착한 요네다는 당시 고교 선수임에도 지역 사회인 야구팀과의 연습 시합에 등판하여 "그다지 두들겨 맞은 기억은 없다" 라고 스스로 회상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학교는 번번히 지역 예선에서 패퇴하여 고시엔 출장 경력은 없었다. 한편으로 당시 같은 지역의 요나고 동(東)고교 요시하라 다케토시[3]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여 지역 대회에서 몇 번이고 불꽃튀는 승부를 펼쳤는데 당시 요시하라를 보려고 온 프로 스카우터 들이 오히려 상대인 요네다를 보고 "저런 투수가 있었다니!!" 라며 깜놀했다는 얘기도 있다(...).

3. 프로 시절



3.1.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당초 게이오기주쿠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었지만 한큐 브레이브스의 영입 제의를 받고 1956년 한큐에 입단했다. 이 당시 한큐와 입단에 합의한 후 갑자기 접근해 온 한신 타이거즈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한 요네다는 한신 유니폼을 입고 연습에 참가했다가 이중계약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커미셔너 중재로 당초 입단하기로 한 한큐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등번호는 18번을 받았는데, 한큐 입단을 결정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등번호 18번을 달 수 있어서''' 라는 것도 있었다고.
데뷔 첫 해 9승을 올린 요네다는 이듬해인 1957년, 한큐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요네다를 적극적으로 중용하면서[4] 21승 16패, 평균자책 1.86, 268탈삼진 이란 출중한 성적을 거두며 단박에 한큐의 에이스 자리를 꿰찼고, 팀 2년 선배인 좌완투수 가지모토 타카오와 이른바 '''요네카지 콤비'''를 결성하여 한큐 마운드의 쌍두마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66년 시즌 25승으로 다승왕을 따내고 그 해 통산 200승을 달성했으며, 20승 이상 거둔 시즌 8시즌[5]에 일본 역대 최고기록인 19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취임 이전 '''회색 구단''' 이라는 달갑잖은 별칭[6]과 함께 하위권을 맴돌던 한큐의 기둥 투수로 팀을 이끌었다.
니시모토 감독 체제 출범 후 1967년 에도 시즌 18승으로 팀의 창단 첫 퍼시픽 리그 제패에 기여하고 이듬해인 1968년 에는 요네다 자신의 생애 시즌 최다인 29승을 거두며 MVP에 뽑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으며 1971년 일본 사상 5번째로 개인통산 300승을 거두었다. 그렇게 한큐를 위해 한몸 불살라 온 요네다 였지만 1975년 신예 '''야마구치 다카시'''[7]가 두각을 보이며 요네다의 등판 기회는 크게 줄어들었고, 요네다는 결국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1975년 시즌 도중 한신 타이거즈로 유니폼을 갈아 입었다.

3.2. 한신 타이거즈,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한신으로 이적한 요네다는 그 해 잔여 시즌에서 8승 3패를 거두며 총 10승 6패 평균자책 2.53으로 나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이듬해 1976년 2승 2패 평균자책 4.50에 그치며 그 해를 끝으로 한신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렸다. 요네다는 한큐 시절 스승인 니시모토 유키오의 부름을 받고 1977년 킨테츠 버팔로즈 에서 부활을 꿈꿨지만 전 해와 다름없는 성적(2승 2패 평균자책 4.62)을 남겼고, 한계를 느낀 요네다는 결국 197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22년간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났다. 덧붙여 요네다는 1977년 10월 7일, 친정팀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원정경기 4회말에 세 번째 투수로 등판, 2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며 그의 생애 마지막 승리이자 프로통산 350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요네다의 현역 통산 기록은 '''949경기 등판, 350승 285패 2세이브, 탈삼진 3388개, 평균자책점 2.91'''. 등판 경기, 패전 경기수는 역대 2위이며. 이외에도 선발 등판 경기 수, 피안타, 실점, 자책점 등의 부문에서도 역대 1위이다. 그가 얼마나 꾸준히 롱런했고, 얼마나 많이 굴려졌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기록.
덧붙여 요네다는 투수임에도 타격 실력이 뛰어나서 신인 시절 동계훈련 때 타자 전향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타자로서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투수는 한번 실패해도 타자로서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며 투수에 전념하여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요네다는 현역 시절 총 33개의 홈런을 때려 카네다 마사이치(38개)에 이어 투수 홈런기록 역대 2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투수로서는 유일하게 만루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모두 기록한 바 있다(물론 카네다도 세우지 못한 기록이다). 또한 1956년 데뷔 후 4타석 만에 만루홈런을 쏘아올려 1983년 코마다 노리히로(요미우리)가 데뷔 첫 타석에서 만루포를 날리기 전 까지 신인 데뷔 후 최단타석 만루홈런 기록을 요네다가 보유하고 있었다.

4. 은퇴 이후


요네다는 1978~1984년 마이니치 방송, 칸사이 TV, 후지 테레비의 해설을 맡았고, 1987~1992년엔 칸사이 TV, 라디오 오사카 해설가 및 닛칸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 1996년 이후로는 주로 닛칸 스포츠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화려한 현역 시절과 달리 지도자 캐리어가 상당히 짧다. 1985년 한신 타이거즈 1군 투수 코치로 그라운드에 컴백한 요네다는 그 해 한신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공헌하기도 했지만 감독이던 요시다 요시오와 투수기용 문제로 충돌하는 바람에 1986년 시즌 후 퇴단했고, 이후 1992년 시즌 중반부터 1993년 까지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투수 코치, 1995년 킨테츠 버팔로즈 1군 투수 코치를 맡은 것 이외에 지도자로서 보여준 것은 없다시피 하다(...).
은퇴 이듬해인 1978년 카네다 마사이치가 주도한 '''명구회''' 창립에 참여했고, 2000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5. 여담


20승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8회이며, NPB 역대 최장인 1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많은 등판 경기수와 묵묵히 던지는 모습에서 '''연료 탱크''', '''인간 기관차''' 등으로 불리었다. 또한 '''가솔린 탱크'''라는 별명은 체력이 좋기도 했지만 엄청난 주량을 자랑하던 술고래였기 때문에 술을 가솔린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노릴 생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 고관절이 굳으면서 투구 시의 중심이 높아진 것과 통풍의 발병으로 단념하고 은퇴를 택했다고 한다.
통산 949경기 등판은 NPB 역대 2위[8], 통산 350승은 가네다 마사이치 의 400승에 이어 역대 2위이며, 우완투수로 한정한다면 역대 1위의 기록이다. 센트럴리그 소속인 한신에서 뛴 시즌은 2년 미만으로 10승에 그쳤지만, 한큐와 긴테쓰 시절 기록한 340승은 퍼시픽리그 1위 기록이다. 통산 패전 수도 좌완투수로는 가네다(298패)가, 우완투수로는 요네다(285패)가 각각 역대 1위이며, 그 밖에도 등판 경기 수, 탈삼진, 투구 횟수, 피안타, 4구 허용은 가네다, 요네다 두 선수가 각각 좌우 투수의 역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요네다는 "가네다 마사이치, 고야마 마사아키[9], 스즈키 케이시[10]처럼 약한 팀에서 오래 활동한 투수가 많다. 강한 팀을 이기고 싶다는 반골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라고도 말한 바 있다. 22년간의 현역 시절 팔꿈치와 어깨의 고장은 거의 없었다는 것도 자랑삼고 있다.
평소 건강 관리와 체력 확보에도 관심이 컸다. 음식 섭취 시간에도 신경을 기울였으며,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왕복 10km를 달리면서 강인한 하반신을 단련시키는 데 노력했다. "웨이트 트레이닝 또는 뭔가 모르지만, 마쓰자카 다이스케 처럼 프로레슬러 같은 몸이 되면 허리도 유연하게 돌지 않게 될 것"이라고 최근의 훈련 정책에 쓴 소리를했다. 이러한 경험에서 코치 시절 러닝 중심의 연습 메뉴를 도입했으나 선수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고한다.
"요네볼'로 불리는 포크볼이 주 무기였다. 무라타 쵸지(롯데 오리온즈)가 포크볼을 연습하기 시작했을 무렵, 벤치에 앉아 경기 중에도 손가락을 단련하고 있는 요네다을 가만히 관찰하면서 그립을 파악했다고 한다.
한신의 에이스였던 고야마 마사아키에 대해서는 "그가 계속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니 나까지 투쟁심이 줄더라. 고야마 씨가 좀 더 노력해 줬다면 나도 400승 까지 갈 수 있었을지도" 라고 말했다. 또한 역시 같은 시대에서 활동한 상대팀 에이스 투수와의 맞대결도 많았다. 예컨대 이나오 가즈히사의 경우, 한큐를 상대로 통산 60승 17패 (승률 .779)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남겼고, 요네다는 "그가 상대라면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악마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 8월 후배 이와세 히토키가 자신의 통산 최다등판경기기록을 갱신한 것에 대해 축하해주었다. 주니치 시절, 팀 선배였던 야마자키 타케시도 "50경기만 더 등판하면 1,000경기 기록 달성,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후배를 격려했다.
1959년 4월 10일 개막전에서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6번 좌익수로 기용된 신인 장훈의 데뷔 첫 타석에서 3구 삼진을 선사했다.
간사이 사철 3개팀에서 각각 뛰었던 스즈키 케이시(킨테츠), 카도타 히로미츠(난카이)와의 대담에서 아래의 일화 등을 회상했다.

- 요네다 : 한큐는 자금 지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계약 갱신 시 전례가 없다, 전례를 깰 것이냐라며 선수들과 항상 싸웠다.

- 스즈키 : 간사이 3개 구단 중 월급은 난카이가 제일 좋았음. 오사카 구장에 가보면 노무라 카츠야를 비롯한 주력들은 모두 외제차를 보유했으나. 킨테츠는 겨우 토요타 코로나를 탔다.

- 카도타 : 그렇지 않다.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을 때 고치 캠프에 들 것이 없어서 문짝(!)에 실려 옮겨졌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하던 팀이었으니 구단이 돈이 많다고는 생각이 안 된다.

- 카도타 : 센트럴리그와 격차는 분명히 있다. TV중계도 없고, 신문기사에 실리는 것은 경기결과 뿐.

- 요네다 : 퍼시픽리그는 화제 만들기에 필사적이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말을 경주하는 이벤트까지 할 정도 였다.

- 카도타 : 퍼시픽리그의 구장들은 더러웠다. 난카이 2군 구장은 특히 프로가 사용할 구장이 아니었다. 2군으로 강등되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경우 후지이데라 구장, 일본생명 구장을 썼는데 특히 일본생명구장은 홈팀만 라커룸을 사용하고 있어 원정팀은 더러운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옷을 갈아입곤 했다. 그게 미안했다.

- 요네다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은 너무 좁았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 모두 절구 모양으로 생겨서 좁고 야유가 잘 들렸다.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은 반대로 넓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있어서 있는지 야유도 상냥했다.

- 요네다 : 벤치의 목소리보다 스탠드의 조롱이 더 컸다.

- 카도타 : 모두 전철회사 구단들이라 오너들끼리 경쟁은 대단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천황이라고 불렀다. 킨테츠 오너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중진이고 어디보다도 윗자리에 앉는다. 근데 팀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게 굴욕이었고 "올해야말로"를 연발하셨다. 노력해야겠다 생각했다.

- 요네다 : 전철회사 구단에서 뛰어서 좋은 건 사원증을 이용해 마음껏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것. 경기 때 늘 기차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신년회를 함께 해서 그것이 인연으로 3명의 선배가 단원들과 결혼했다. 한큐에서 자랑할 수 있는건 이 정도?

- 스즈키 : 한큐가 매각됐을 때 사철회사가 구단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다. 옛 시대의 종언이었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 그라운드에 주택 전시장을 만들었을 때는 슬펐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1] 2017년 이와세 히토키가 기록 갱신[2] 요나고 공항 바로 옆이다.[3] 좌완 투수로 195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 없이 통산 33승 23패의 기록만 남기고 196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010년 사망.[4] 후지모토는 평소 젊은 투수들을 선호하고 또 귀여워하는 지도자였다. 그에게 지도받고 기량이 성장한 대표적 인물 중 한명이 에나츠 유타카이다.[5] 선발 20승 이상은 68년(24선발승)이 유일[6] 같은 리그의 킨테츠 버팔로즈는 '''짐짝 구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킨테츠와 한큐 모두에 해당되는 별명은 지하철 구단..[7] 장훈에게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한 투수이기도 하며 한신 타이거스 투수코치 시절 어느 야구소년의 투구폼을 교정해주어 리그 최강의 구원 투수로 키워냈다.[8] 이 기록은 역대 1위였으나 그의 은퇴 후 정확히 40년 후인 2017년 이와세 히토키가 깨질 것 같지 않던 이 기록을 갱신했다.[9] 한신 타이거즈-도쿄 오리온즈 소속, NPB 통산 320승으로 역대 다승 3위[10]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 NPB 통산 317승으로 역대 다승 4위, 현재까지 NPB 최후의 300승 기록 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