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죄
1. 개요
綱常罪
조선 왕조 시기에 존재한 범죄로,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죄를 뜻한다. 여기서 강상은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 오상(三綱五常)을 뜻한다.
2. 상세
고려시대의 불효죄에서 적용 범위는 넓히고 범죄가 성립하는 행동의 범위는 좀 축소하고 처벌은 강화한 것이다. 즉 불효죄가 부모에 대한 모든 불효 행위를 포괄했다면 강상죄는 악질적인 패륜으로 그 범위를 한정한 것.
이 죄목에서 말하는 강상, 즉 삼강오상은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며,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 다만 아무거나 다 적용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신분제 상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살해 혹은 폭행 치사하는 등의 가장 극단적인 '하극상'의 경우에만 이 강상죄를 적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노비가 그 주인을 폭행하고 살해 및 모욕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유명한 어우동도 강상죄로 사형[1] 당했으며[2] , 강상죄로 능지형을 당한 '''실제 사례'''로 태종 대에 집안어른들이 모두 죽고 10대 후반의 자매 둘만 '집주인'으로 남은 집에서 사실상의 집사 역할을 하게 된 노비가 이 소녀가장들에게 좋은 데로 이사가자고 꼬드겨서 이사를 간 뒤 이사를 간 거기서 집주인들을 겁탈했다가 적발되어 강상죄로 능지형 당한 사례가 있다.[3] 다만 이 경우 조선에서는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정상참작 사유가 없는 살인범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사형이었기 때문에 강상죄는 어디까지나 가중사유로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이전에도 강상죄는 있었지만 불효죄, 즉 패륜을 범한 죄가 아니면 나머지는 별도의 죄로 논하지 않고 재판을 거쳐 개별적으로 양형을 정했던 반면, 조선에서는 별도의 죄를 규정한 것이 다르다.
조선 왕조는 사람 간의 도덕과 윤리를 매우 강조하였으므로 강상죄는 해당 범인이 명백한 정신질환이나[4] 부모 혹은 상급자의 책임이 엄청나게 큰 점 등의 정상 참작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반역죄 수준으로 매우 무겁게 처벌했다. 범인은 대부분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들은 변방으로 쫓아냈으며, 간혹 죄질이 나쁘다 싶으면 노비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또한 범인이 살던 가옥은 허문 다음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어 버리며 해당 고을의 수령은 백성들을 교화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파직했고 때로는 수령 또한 따로 압송하여 그 죄를 물어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5] 다만 그만큼 무거운 범죄였기에 역으로 보면 어지간한 하극상은 강상죄를 적용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가문 내에서 강상죄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구성원을 도모지로 처형하기도 하였다. 국가가 움직이기 전에 조용히 처결하는 것이 그나마 가문에 미치는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이게 꼭 강상죄에 해당하는 잘못만 처결한 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불법이었다는 점에 유의.
3. 현대
현대 형법에서 강상죄에 직접 해당하는 포괄적인 죄는 존재하지 않으나, 조선 시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상에 해당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범죄는 가중처벌된다. 형법상 아예 일반법보다 처벌이 가중된 특별법이 존재하는 경우[6] 도 있고, 일반 형법상에서 가중처벌[7] 의 근거가 되는 경우도 있다.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의 양형기준에 따르면 같은 죄가 유죄인정이 되더라도 가중-감경으로 받을 수 있는 차이는 유기징역의 경우 대충 3배까지 차이가 난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되면 더 말할 것도 없고.
4. 해외
- 조선 외에도 다른 나라에도 강상죄와 같은 범죄 규정이 있었고, 무관용으로 처리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장 로마 교황령에도 강상죄는 거의 무조건 사형이었고, 베아트리체 첸치가 이 죄로 처형당했다.[8]
[1] 여종과 사이좋게 교수형.[2] 태강수 이동에게 소박당하고 나서(이것 때문에 이동 역시 재결합할 때까지 왕족 증명서를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 어우동 자신이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하여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에, 어우동은 대명률에 적힌 바에 의하면 간통죄가 적용되어 곤장 90대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신들이 간통죄를 적용하자고 했으나, 성종이 강상죄로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결국 여종과 같이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상대 남자들은 전부 곤장을 맞고 유배갔다가 후에 복권되었으나, 안 좋은 소문은 이미 다 퍼졌기에 사직한 사람이 많았다.[3]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27일 무술 2번째기사 참조.[4] 당시 기준으로도 이상하다는 게 딱 보이던 조현병 같은 경우.[5] 취소선을 쳤지만 이게 진실에 가까운 것이, 보통사람이라면 부모와의 관계가 막장이라 해도 집을 떠나는 걸로 해결하려고 하지, 강상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윗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 해도 솔직히 그만두고 나가겠다거나 이 사람과 도저히 같이 일 못하겠다고 바꿔달라고 하지, 죽인다는 건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6] 예컨대 존속살해죄라든가 외국원수폭행등죄 같은 경우[7] 예컨대 딸을 강간한 아버지가 양형가중되어 강간죄의 상한에 근접한 형벌을 선고받는 것.[8]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를 신고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본인이 아버지에 의해 쫓겨나게 되자 계모, 친오빠, 이복 남동생, 본인의 연인을 포함한 하인 2명과 공모해 아버지를 살해한 뒤 사고사로 위장했다. 결국 살해 사실이 밝혀져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은 베아트리체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항의했지만 교황은 '이유가 무엇이든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패륜'이라며 끝내 사형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이후 로마 시민들은 베아트리체를 동정하였는지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산탄젤로 다리에는 베아트리체가 죽은 날마다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든 그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괴담도 돌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