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가족관계

 


황후 4명[1]을 비롯하여 수십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황후들은 모두 요절하여 강희제는 30대 중반 이후 황후 없이 생활해야 했다. 황후 대신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각혜황귀비를 귀비로 삼아 6궁을 통솔하게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는데, 강희제의 자녀 항렬부터 여느 한인들처럼 이름에다 돌림자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는 첫 아들부터 '승(承)'자 돌림을 썼지만 그렇게 이름을 지은 첫 세 아들이 모조리 요절해버리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작위를 받은 황1자 인티( 允禔, 윤제)부터의 윤(胤)자 돌림을 쓰기 시작했다. 이 돌림자는 옹정제가 즉위한 후 싹 동음이자인 允으로 바뀌었으나, 이현친왕 인샹(胤祥, 윤상)을 비롯해 극히 일부 (옹정제 기준에서) 착한 형제들에게는 옹정제의 특명으로 사후에나마 胤자를 돌려주기도 했다.
1. 선대 가계
2. 효성인황후 소생
3. 효소인황후 소생
4. 효의인황후 소생
5. 효공인황후 소생
6. 각혜황귀비 소생
7. 돈이황귀비 소생
8. 경민황귀비 소생
9. 온희귀비 소생
10. 순의밀비 소생
11. 순유근비 소생
12. 혜비 소생
13. 의비 소생
14. 영비 소생
15. 정비 소생
16. 성비 소생
17. 양비 소생
18. 양빈 소생
19. 희빈 소생


1. 선대 가계


성조 강희인황제
세조 순치장황제
태종 홍타이지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
효강장황후 동가씨
동도뢰(佟圖賴)
각라씨

2. 효성인황후 소생


1황후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1674'''[2][3]
자녀
차남
이름
'''승호(承祜)''' 1669~1672
7남(2황자)
이름
'''이밀친왕 윤잉(理密親王 胤礽)''' 1674~1724

3. 효소인황후 소생


온희귀비의 언니이다. 효성인황후가 살아 있을때는 비였고 효성인황후 사후 황후가 되었지만 6개월 후에 죽었으며 자식은 없다.

4. 효의인황후 소생


3황후
'''효의인황후 동가씨(孝懿仁皇后 佟佳氏), 1656~1689''' [4]
자녀
8녀
이름
'''이름 불명[5] ''' 1683

5. 효공인황후 소생


4황후
'''효공인황후 우야씨(孝恭仁皇后 烏雅氏), 1660~1724'''[6]
자녀
11남(4황자)
이름
'''세종 옹정헌황제(世宗雍正憲皇帝)''' 1678~1735
황후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1692~1777
자녀
장남
이름
'''고종 건륭순황제(高宗乾隆純皇帝)''' 1711~1799
14남(6황자)
이름
고산패자(固山貝子)[7]'''윤조(允祚)''' 1680~1685
23남(14황자)
이름
'''순근군왕 윤제(恂勤郡王 允禵)'''[8] 1688~1755
7녀
이름
'''이름 불명''' 1682
9녀
이름
'''고륜온헌공주(固倫溫憲公主)''' 1683~1702
12녀
이름
'''이름 불명''' 1686~1697

6. 각혜황귀비 소생


자손 없음.
효의인황후의 동생으로 효의인황후 사후 내명부를 관리하며 황후 역할을 했다.
청나라의 후궁품계는 강희제 대에 이르러 정리가 되었는데 강희제 중기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정식으로 책봉받지 못한 후궁들이 있었는데 각혜황귀비가 그 중 한명이었다.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비 4자리가 다 찼기 때문에 20년 동안 비 대우를 받는 비공식 후궁이었다가 귀비가 되었으며 강희제 사후 옹정제가 아버지의 후궁을 높인다는 의미로 황고황귀비로 승급하였으며 이후 건륭제 대에 황조수기황귀태비로 존숭하였다.
효의인황후의 여동생이자 융과다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효의인황후의 양자인 옹정제를 다음 황제로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고 후궁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존재자체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7. 돈이황귀비 소생


2황귀비
'''돈이황귀비 과이가씨(敦怡皇貴妃 瓜爾佳氏), 1683~1768'''
자녀
18녀
이름
'''이름 불명''' 1701

8. 경민황귀비 소생


3황귀비
'''경민황귀비 장가씨(敬敏皇貴妃 章佳氏), 17세기~1699'''[9][10]
자녀
22남(13황자)
이름
'''이현친왕 윤상(怡賢親王 胤祥)''' 1686~1730
13녀
이름
'''화석온각공주(和碩溫恪公主)''' 1687~1709
15녀
이름
'''화석돈각공주(和碩敦恪公主)''' 1691~1709

9. 온희귀비 소생



'''온희귀비 뉴호록씨(溫喜貴妃 紐祜祿氏), 17세기~1694''' [11]
자녀
18남(10황자)
이름
'''패자품급 윤아(貝子品級 允䄉)[12][13]''' 1683~1740
11녀
이름
'''이름 불명''' 1685~1686

10. 순의밀비 소생



'''순의밀비 왕씨(順懿密妃 王氏), 17세기~1744'''
자녀
25남(15황자)
이름
'''유각군왕 윤우(愉恪郡王 允禑)''' 1693~1731
26남(16황자)
이름
'''장각친왕 윤록(莊恪親王 允祿)[15]''' 1695 ~1767
28남(18황자)
이름
'''윤개(允祄)''' 1701~1708

11. 순유근비 소생



'''순유근비 진씨(純裕勤妃 陳氏), 17세기~1753'''
자녀
27남(17황자)
이름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允禮)[16]''' 1697~1738

12. 혜비 소생



'''혜비 납라씨(惠妃 納喇氏), 17세기~1732'''[17][18]
자녀
3남
이름
'''승경(承慶)''' 1670~1671
5남(1황자)
이름
'''고산패자품급 윤제(固山貝子品級 胤禔)''' 1672~1735

13. 의비 소생



'''의비 곽락라씨(宜妃 郭絡羅氏), 17세기~1733'''
자녀
13남(5황자)
이름
'''항온친왕 윤기(恒溫親王 允祺)''' 1679~1732
17남(9황자)
이름
'''윤당(允禟)[19]''' 1683~1726
20남(11황자)
이름
'''윤자(允禌)''' 1685~1696

14. 영비 소생



'''영비 마가씨(榮妃 馬佳氏), 17세기~1727'''
자녀
장남
이름
'''승서(承瑞)[20]''' 1667~1670
4남
이름
'''새음찰혼(塞音察渾)''' 1671~1674
3녀
이름
'''고륜영헌공주(固倫榮憲公主)''' 1673~1728
6남
이름
'''장화(長華)''' 1674
8남
이름
'''장생(長生)''' 1675~1677
10남(3황자)
이름
'''성은군왕 윤지(誠隱郡王 允祉)[21]''' 1677~1732

15. 정비 소생



'''정비 만류합씨((定妃 萬琉哈氏), 1661~1757'''
자녀
21남(12황자)
이름
'''이의친왕 윤도(履懿親王 胤祹)''' 1685~1764

16. 성비 소생



'''성비 대가씨(成妃 戴佳氏), 17세기~1740'''
자녀
15남(7황자)
이름
'''순도친왕 윤우(淳度親王 胤祐)''' 1680~1730

17. 양비 소생



'''양비 위씨(良妃 衛氏), 17세기~1711'''[22]
자녀
16남(8황자)
이름
'''염친왕 윤사(廉親王 允禩)[23]''' 1681~1726

18. 양빈 소생



'''양빈 고씨((襄嬪 高氏), 17세기~1746'''[24]
자녀
29남(19황자)
이름
'''윤직(胤禝)'''[25] 1702~1704
19녀
이름
'''이름 불명''' 1703~1705
30남(20황자)
이름
'''간정패륵 윤의(簡靖貝勒 胤禕)''' 1709~1731

19. 희빈 소생



'''희빈 진씨(熙嬪 陳氏), 1690~1737'''[26]
자녀
31남(21황자)
이름
'''신정군왕 윤희(愼靖郡王 胤禧)''' 1711~1758

[1]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는 강희제 생전에 혼인한 황후이지만, 효공인황후 같은 경우는 후궁으로 강희제 사후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성모황태후로 승급하여 황후로 추존되었다.[2] 만주 정황기 출신으로 강희제 초기 보정대신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의 첫째 아들의 딸, 즉 손녀이며 강희제 연간 권신이었던 허서리 쏘어투(혹은 허서리 송고투, 赫舍里 索額圖)의 조카이다.[3] 청나라에서도 손에 꼽는 명문가이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자매보다는 딸려서 반대가 심했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태황태후였던 효장문황후가 밀어붙여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보정대신 중 하나였던 구왈기야 오보이를 견제하기 위하여서 황후로 세웠을 수도 있다.[4] 효소인황후가 죽은 후 내명부의 수장이 되어 강희제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황후가 아닌 황귀비의 지위에 있었으나, 위독해지자 사망 하루 전에 강희제가 황후로 승급시켜준다. 원래 강희제의 사촌이지만 고모 따라 조카가 시집가는 청나라의 관습을 따라 후궁이 되었다.[5] 유일한 딸이었으나 생후 1달만에 요절하고 이후 자식을 낳지 못하자, 높은 위치의 후비가 황자녀를 키워주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강희제가 어린 옹정제를 효의인황후에게 키우도록 했다. 효의인황후 본인도 양자인 옹정제를 지극정성으로 키우며 강희제의 눈에 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본인은 옹정제가 12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효의인황후의 가문은 그녀가 키운 옹정제를 황제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황제로 즉위한 옹정제는 키워준 공이 낳아준 공보다 더 크다며 효의인황후를 생모보다 더 높게 추존했지만, 효의인황후의 남동생인 퉁기야 롱코도에게는 가차없었다.[6] 장남인 옹정제와 차남인 14황자와의 차별로 유명하다. 그러나 장남인 옹정제를 낳았을때 귀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양육권이 없었고 옹정제는 효의인황후가 키우게 된다. 덕비로 승급하여 효의인황후 사후 옹정제를 키울수 있게 되지만 그때 옹정제는 10살이었고 황자들이 보통 12-13세에 혼인하여 출궁하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옹정제를 키운 기간은 짧은 편이다. 게다가 자신의 친정보다 훨씬 급이 높은 효의인황후의 친정과 옹정제는 효의인황후 사후에도 매우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라도 아들인 옹정제를 쉽게 대할 수 없었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7] 어릴때 죽었으나 황6자로 인정됨[8] 초명은 윤정(胤禎)이었고 다른 형제들처럼 옹정 연간에 피휘를 위해 개명했으나, 돌림자만 개명한 형제들과 달리 뒷글자 발음도 비슷했기 때문에 두 글자를 모두 개명해야 했다. 그 결과 옹정제 대신 황1자 윤제와 같은 발음이 되어버렸지만 황1자는 강희 시절부터 사고쳐서 연금상태로 있다 사망했으니 별 문제는 안 된 듯. [9] 살아있을때는 각혜황귀비처럼 품계를 받지 못한 비공식 후궁이었다. 그러나 사후 민비로 추촌되었고 비로 추존된걸로 미루어 보아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리라 짐작된다[10] 옹정제 즉위 후 경민황귀비로 추존되었고 옹정제가 후궁으로는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황제와 합장되게 한다. 또한 옹정제는 장가씨를 포의에서 만군기 상삼기 중의 하나인 양황기로 올린다. [11] 언니인 효소인황후와 함께 청나라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무려 강희제의 보정대신이고 누르하치의 외손자이기도한 어빌룬의 딸이었다. 하지만 어빌룬은 같은 보정대신이자 권신이었던 구왈기야 오보이와 같은 기(旗)인이다보니 견제를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허서리 소닌의 손녀가 황후가 되었다. 얼마나 명문가 출신이었냐면 온희귀비 소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다음대 황제는 맡겨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들인 10황자는 다음대 황제로 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 최고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를 둔 황자로서는 정말 드물게도 사서에 공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2] 돈군왕(敦郡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옹정제 즉위 후 박탈당하였다가 건륭제 즉위 후 복권[13] 옹정제가 증오해 마지 않는 8황자당이지만 옹정제의 양이모와 친이모가 10황자의 숙모였기 때문에 작위박탈에 그친다[14] 태종의 5남으로 철모자왕(鐵帽子王)이 되었다[15] 옹정제 즉위 후 후사 없이 죽은 청태종의 손자 장정친왕 박과탁(莊靖親王 博果鐸)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때 승택유친왕[14]의 후손들이 반발하였다. 하지만 옹정제와 윤록이 잘 무마하여 넘어감.[16] 후궁견환전의 과군왕이다.[17] 효성인황후와 마찬가지로 만주 정황기(正黄旗) 출신이다.[18] 강희제시기 허서리 송고투와 함께 권력을 다투던 납란명주(納蘭明珠)와는 사촌관계 [19] 강희제 시기에 8황자당 소속으로 윤사를 지지했으나, 그 보복으로 옹정제 즉위 후 윤사와 함께 새사흑(塞思黑)으로 개명당하고 대동보에서 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20] 실제로 큰 아들이다.[21] 성친왕(誠親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강등당하였고, 강희제 말년 유폐된 윤제와 윤잉 대신 장자 역할을 하였으나 옹정제 즉위 후 옹정제의 우군인 이친왕 윤상의 장례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폐되어 사망하였다.[22] 내무부 포의 출신으로 궁녀로 들어와서 높은 품계는 받지 못했고, 8황자가 결혼까지 한 이후에 빈으로 책봉되었다. 1707년까지 양빈으로 기록되어 있어 1707년 이후에 비로 승급한 듯하다.[23] 황위를 두고 4황자당과 크게 대립했고, 옹정제 즉위 이후엔 옹정의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윤당과 함께 아기나(阿其那)로 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24] 민인 출신으로, 현직 시절엔 품계가 없다가 옹정제 때 귀인으로, 건륭제 때 양빈으로 추존되었다. [25] 어릴 때 죽었으나 황19자로 인정되었다.[26] 후궁은 커녕 궁녀도 될 수 없는 민인 출신이었으나 미인이 많은 장난지방 출신이어서 강희제에 의해 입궁했다. 민인 출신들은 빈 이상 올라갈 수 없었기에 후궁 시절 품계도 없었으나 옹정에 의해 귀인으로, 건륭에 의해 희빈으로 추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