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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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유일한 태황태후이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태황태후.[3]
홍타이지의 비로서 효단문황후와 함께 청 최초의 태후이며 순치제의 생모, 강희제의 조모이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장비 시절까지
1613년, 몽골의 호르친(Khorchin, 科爾沁, 과이심) 부족의 버일러(beile, 貝勒)[4] 이자 호쇼이(hošo-i, 和碩) 충친왕(忠親王)이었던 보르지기트 자이상(borjigit jaisang, 博爾濟吉特 寨桑)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몽골족 출신. 성씨인 보르지기트는 몽골어로는 보르지긴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의 황성(皇姓)으로, 그녀는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이다.
그녀의 이름인 붐부타이(布木布泰), 즉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의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 티베트 불교 승려가 "이 아이는 장차 천자의 어머니로 군림할 것"이라 예언했기 때문이다.
1625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측복진이 되었고, 1636년 홍타이지가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자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씨(孝端文皇后 博爾濟吉特氏)[5] 는 그녀의 고모이고, 홍타이지의 비(妃)이자 홍타이지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진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씨(敏惠恭和元妃 博爾濟吉特氏)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즉 남편인 홍타이지는 그녀의 고모부이자 형부가 되기도 한다.
홍타이지의 측복진이 된 후에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그녀의 부족이 그녀의 언니 하르졸(海蘭珠)[6] 을 홍타이지에게 측복진으로 보냈다. 하르졸이 측복진이 된 후 총애를 뺏기게 되고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자 자신은 비 중에 가장 서열이 낮은 후궁[7] 이 되고 해란주는 관저궁 신비(關雎宮 宸妃)로 봉해져[8] 황후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후궁이 되었다. 나중에 가까스로 아들을 낳았으나 하르졸의 아들이 죽은 지 이틀 만에 태어나 상심에 빠진 홍타이지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르졸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약해지고 몇년 후 사망하자 홍타이지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가 죽은 후 2년만에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 급사한다. 여러 황족들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고모인 황후 저르저르와 함께 황족들과 팔기군을 설득하여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킨다.[9]
2.2. 황태후 시절
이후 아들 푸린이 즉위하여 순치제가 되면서 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순치제의 섭정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과 재혼설이 있으나 현재 역사학계에선 부정한다. 도르곤이 죽고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하였다. 효장태후는 자신의 조카를 황후에 앉혔으나[10] 당연히 이 결혼이 맘에 안들어 어머니하고 사이가 틀어진 순치제는 동악비를 총애하여 황후를 폐위하는 등의 대립이 있었다. 태후인 자신이 몇번이나 주의를 주었어도 질투가 너무 심한 조카였던지라 트집잡혀 어쩔수없이 폐위에 찬성했지만 새 황후는 동악비가 아니라 효장태후의 조카손녀였고, 모자관계는 결국 최악으로... 그러나 순치제는 총애하던 동악비가 죽자 상심하고 이어 천연두에 걸려 붕어했다.
2.3. 태황태후 시절
순치제가 죽고 효장태후의 손자인 히오완예이가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효장태황태후는 순치제가 급서하자 재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고 황궁을 굳게 닫았는데, 이때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보위를 둘러싸고 황궁에서 쟁탈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히오완예이를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어 청의 혼란을 막은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11]
그녀는 강희 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존되었다. 1723년(옹정 원년)에는 증손자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언에 따라 그녀를 소릉(昭陵)에 묻지 않고 새로운 능인 소서릉(昭西陵)에 안장하였으며 지덕(至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그 후 고손자 건륭제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순휘(純徽)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생전에는 노조종(老祖宗)으로 불렸다.
3. 평가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는 아들 순치제가 사망했을 때 재빠르게 히오완예이를 황제로 추대해서 혼란을 막았다. 앞서 홍타이지가 갑자기 뒷목 잡고 쓰러져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 십수일간 도르곤과 호오거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다이샨의 아들, 손자의 목이 달아나는 사태까지 빚어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깔끔한 정리였다. 비록 순치제가 예수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자금성의 천연두 대유행 때 천연두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히오완예이를 후계로 삼으라 유지를 남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국공신 친왕들이 건재한데 황제가 후계자로 어린아이만 남기고 요절하였으니 황권은 풍전등화였다. 그런 위기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며 황실의 수장으로서 강희제를 보호한 것이다. 그 후로 효장은 보정대신들에게 정치 실무를 맡기고 어린 황제의 교육을 맡아 강희제가 빠른 시간에 제왕학을 패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얼추 컸다고 친정을 꾀하며 오만한 보정대신 구왈기야 오보이를 처분하던 , 그렇게 권력을 얻어놓고도 삼번의 난으로 다시 갈팡질팡하던, 천고일제로 거듭나기 이전의 철이 덜 든 강희제를 굳게 잡아준 멘토이기도 했다."조모 태황태후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위업은 없었을 것이다." - 강희제
즉, 청나라의 세력을 크게 일군 황제(태종 홍타이지)의 부인이며, 청 최초로 중원 진출에 성공한 황제(순치제)의 어머니였고,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황제(강희제)의 할머니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청나라 때 궁녀들은 화려한 치장을 할 수 없었고, 옷, 신발, 화장법,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한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효장문황후가 직접 정한 규범이었다. 궁궐에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자리잡게 하고, 궁궐 사람들 간의 쓸데없는 말썽을 막으며, 궁녀가 모시는 주인에게 예의를 다하도록 기풍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4. 미디어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도 효장문황후가 나온다. 효장비사, 대청풍운, 대옥아전기 등 경우에는 아예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드라마 강희왕조에서는 매우 근엄하여 조정대신들이 효장태후의 눈치를 보며 행동한다. 명말 청초를 다루는 드라마엔 거의 다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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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Europa Universalis IV의 DLC 중 천명 DLC의 모델로도 등장하였다.
[1] Borjigit Bumbutai,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이다. 야사에 전해지는 대옥아(大玉兒)라는 이름은 옥 같은 외모 때문에 불리는 것이라고 한다.[2] 사실 동치제 사망과 함께 그의 아들 항렬에서 양자를 택하여 즉위시켜야 했지만, 동지체의 사촌동생이던 광서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조모를 지칭하는 태황태후가 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가 순조가 사망하고, 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대왕대비로 올라간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3] 동태후와 서태후의 경우, 광서제 즉위로 태황태후가 되어야 하지만 청나라 규정상[2] 바로 직전 황제의 황후가 수렴청정 자격을 가지게 되어 서태후는 집권을 위해 여전히 황태후로 남았다. 여담으로 광서제 사후 서태후는 선통제로 다음 황제를 즉위시키고 다음날 숨져 정식 태황태후가 아니다.[4] 족장 혹은 군주에 상응하는 직책[5] 휘는 보르지기트 저르저르(哲哲).[6] 만주어로 비취라는 뜻이다.[7] 어디까지나 정실인 적복진과 측복진내에서 낮은 것이지 홍타이지의 여자들 전체에서가 아니다. 홍타이지의 비들은 황제가 된 이후에 지정된 정궁 황후 저르저르, 관저궁 신비 하르졸, 인지궁 귀비 나무츠(娜木鍾) , 연경궁 숙비 바트마조(巴特瑪璪) , 영복궁 장비 붐부타이만을 지칭하며, 심양고궁을 가봤으면 알겠지만 고궁 중앙쯤에 별도로 높게 쌓은 구역에서 홍타이지의 거처를 둘러쌓은 5건물들이 이들 5복진들의 거처이다. [8] 관저(關雎)는 시경의 관저편에서 따온 이름인데, 이는 군자가 숙녀를 배필로 얻어 함께 즐겁게 사랑할 것을 노래한 시였다. 또 신(宸)은 황제의 시호에만 쓸 수 있는 글자다. 사후에는 원비(元妃)로 높였다. [9]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누르하치의 14남 도르곤을 지지하였고, 홍타이지의 친위세력들은 서장자였던 호오거(豪格)를 지지하면서 갈라져 있었는데, 도르곤의 세력이었던 다이샨네 아들들이 몰래 도르곤을 제위에 올리려고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자 도르곤이 앞장서 이들의 목을 날리며 손절하는등 분란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도르곤은 이에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도 모계 혈통이 미천한 황자들은 제외해야 한다며 자신이 내세우던 고귀한 모계 혈통이라는 명분을 관철하면서 호오거의 대권 쟁취를 막는데에 집중했고, 덕분에 정실 5비 소생으로 살아있는 아들들 중 가장 많은 나이였던 푸린이 황제가 되었다.[10] 효장태후가 자기 친정의 이익을 추구한걸로 보일진 몰라도 당시 남명잔당이나 삼번의 반란에 대비한 후방의 안전과 몽골의 칸위보장+군사력이 필요해서한 정략결혼이다. 급사하기 전에 혼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도르곤 역시 이 방침에는 이의가 없었다. [11] 앞서 홍타이지 사망 직후 팔기들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내전을 막후에서 조정하던 사람이였이며, 순치제 사망쯤에 다음 후계자로 강희제를 세우는데 사실상 주도하던 사람이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