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덕제

 



'''
太宗 崇德帝
태종 숭덕제
'''
'''묘호'''
'''태종(太宗)'''
'''시호'''
'''만주식'''
겅옌 슈 황디
(ᡤᡝᠩᡤᡳᠶᡝᠨ ᠰᡠ ᡥᡠᠠᠩᡩᡳ / Genggiyen xu hūwangdi)
'''중국식'''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한호'''
고신 온초 활랴순 언두링어 한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칸호'''
아구다 오루시옝치 나이람다구 복다 칸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1]
'''휘'''
아이신교로 홍타이지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ᠣᠩᡨᠠᡳᠵᡳ / Aisin-Gioro Hongtaiji)
(愛新覺羅 皇太極, 애신각라 황태극)[2]
''''''연호 (후금)''''''

'''만주어'''
압카이 수러(ᠠᠪᡴᠠᡳ ᠰᡠᡵᡝ/Abkai Sure)
'''중국어'''
톈충(天聰/Tiāncōng)
'''한국어'''
천총(天聰)
'''몽골어'''
텡게린 세첸
Тэнгэрийн сэцэн
''''''연호 (청)''''''
'''만주어'''
워시훈 어르더뭉어
(ᠸᡝᠰᡳᡤᡠᠨ ᡝᡵᡩᡝᠮᡠᠩᡤᡝ / Wesihun Erdemungge)
'''중국어'''
충더(崇德 / Chóngdé)
'''한국어'''
숭덕(崇德)
'''몽골어'''
데게두 에르뎀테이(ᠳᠡᠭᠡᠳᠦ ᠡᠷᠳᠡᠮᠳᠡᠢ)
데드 에르뎀트
Дээд эрдэмт
'''신장'''
175cm[3]
'''생몰
기간'''

'''양력'''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
(총 18,560일.)
'''재위
기간'''

'''양력'''
1626년 10월 20일 ~ 1643년 9월 21일
(15년 337일)
1. 소개
2. 생애
3. 홍타이지?
4. 조선 관련
4.1. 삼전도의 굴욕
4.2. 광해군
4.3. 호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처분
4.4. 호감?
4.5. 환향녀 문제
4.6. 결과
5. 현대 만주족의 평가
6. 작품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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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청나라(淸)의 제2대 황제. 묘호를 딴 호칭인 '청태종'이나 '숭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청태종이라는 명칭이 숭덕제보다 더 잘 쓰이는 편. 명나라와 청나라의 다른 황제들을 연호를 딴 칭호로 부르고 묘호로 잘 부르지 않기 때문에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천총에서 숭덕으로 한 번 개원을 했기 때문인듯. 사실 묘호보다도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된다.
홍타이지는 황제가 아닌 후금의 한(칸)위를 계승했고 1636년에야 스스로 칭제하면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청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끝내 생전에 중국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누르하치와 더불어 묘호보다는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다만 조선의 경우 홍타이지가 칭제한 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결국 청이 중국의 통일 왕조가 되었기에 그를 청태종이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에서 다루는 매체에서는 홍타이지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좀더 과거에는 '황태극'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후계자가 되어 후금의 2대 칸으로 즉위했다. 첫째가 아닌데도 후계자가 된 것은 유목 민족 문화가 장자 계승에 집착하지 않는 문화였던 데다가 청 태종의 어머니가 만주 최고의 명문가 예허부의 공주인 예허나라 멍구거거였다.[4][5] 전쟁 영웅 아버지천고일제 손자때문에 저평가받고,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문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6] 문과 무를 두루 갖춘 인내심 있고 유능했던 명군이었다. 내정으로는 중국식의 중앙집권화를 추구했고 유학을 장려했으며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순장, 순사를 엄금[7]하고 엄벌에 처했다. 또 농업을 장려하고 무역에 힘써 경제성장에 집중하였다.
누르하치는 개인의 능력으로 만주를 통합하였지만 집안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정책적인 면에서 예허부의 명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처로 예허부의 공주를 맞아들인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누르하치의 장남 아이신기오로 추옝(愛新覺羅 褚英)은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 건국 전에 숙청당하며(유폐 이후 사망), 추옌의 후손은 맏이의 후손임에도 청 왕조 내내 무시당한다. -- 아니다. 추옝이 누르하치에게 숙청당한 것은 맞지만 예허부 공주와 관련되어 숙청당한 것은 아니다.[8]정묘호란 때 활약한 아민을 견제하여 황제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어머니 집안의 후광으로 천총한(Abkai Sure Han)이 되었지만 그 능력은 충분히 뛰어났는지, 내몽골을 평정하여 원나라의 잔존 세력으로 명나라를 위협하던 차하르 몽골을 정복하여 원조의 옥새를 얻었고, 나라 이름을 대금(Amba Aisin)에서 대청(Daicing, Amba Cing)으로 고치며 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숭덕(Wesihun Erdemugge)으로 칭제건원한다. 태종의 몽골 평정 이후 청의 황제는 몽골의 카간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종족명을 여진족이라는 호칭에서 만주족으로 변경했다.
이후 원조의 정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칭제하였으며, 반발하는 조선을 신속하게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신종하게 만들어 후방의 위협을 없앰으로써 대명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공고히 만들었다. 이후 반간계를 이용해 숭정제로 하여금 원숭환을 죽이게 한 뒤 계속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1638년엔 명나라 내부 깊숙이 쳐들어가 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여 20만에 달하는 포로를 잡고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는다.
1641년~42년, 명나라와의 결전인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의 14만 대군을 전멸시켰고 산해관 외성들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1642년 11월 초 홍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청군은 연전연승을 거둬 명나라는 국토가 휩쓸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후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얼마 못 가 1643년 51세의 한창 나이에 급사했다.[9] 결국 청의 중국 대륙 정복은 아직 어렸던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의 섭정을 맡은 태종의 이복 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3. 홍타이지?


'''참고 자료'''

* 몽골 제국 시대의 칭호
* 카안(ᠬᠠᠭᠠᠨ; 大汗):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황제의 칭호(emperor).
* 노욘(ᠨᠣᠶᠠᠨ; 國王): 몽골 제국의 속국 군주의 칭호(king).
* 저넝(ᠵᠢᠨᠤᠩ; 晉王/濟農):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황태자의 칭호(crown prince).
* 칸 후우(ᠬᠠᠨ ᠬᠦᠦ; 皇子): 황자의 칭호(prince).
* 미르자(米爾扎): 페르시아어로 황자의 칭호(prince).
* 북원 시대의 칭호
* 카안(可汗): 몽골 제국과 북원의 황제의 칭호(emperor).
* 칸(汗): 몽골의 군주의 칭호(king).
* 저넝(ᠵᠢᠨᠤᠩ; 濟農/晉王), 몽골 제국과 북원의 황태자의 칭호(crown prince). 15세기부터는 그냥 세습작위가 되었으며 황태자를 독점적으로 가리키던 호칭으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 홍타이지(ᠬᠤᠨᠲᠠᠶᠢᠵᠢ; 渾台吉): 자신만의 영지를 가진 칭기즈 칸의 후손인 군주의 칭호(prince). 황태자(皇太子)에서 유래.
* 타이지(ᠲᠠᠶᠢᠵᠢ; 台吉): 칭기즈 칸의 후손의 칭호(royal family).
* 왕(王): 자신만의 영지를 갖고 있었던 칭기즈 칸의 형제의 후손인 군주의 칭호(royal king).
* 타이시(ᠲᠠᠢᠱᠢ; 太師): 자신만의 영지를 가졌으나 보르지긴씨는 아닌 군주의 칭호(lord).
휘에 관한 논란이 있다. 숭덕제의 는 흔히 '''홍타이지'''(皇太極)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홍타이지'는 휘가 아니라는 가설이다. 나무위키 내의 준가르 항목을 보면, 홍타이지는 "칸"과는 다른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작위 중 하나이며 준가르 우두머리의 호칭이 홍타이지라고 서술되어 있다. 준가르 항목의 "기원"과 그 주석 참고.[10]
분명한 사실은 '타이지'라는 단어는 몽골족 세습 귀족 관리의 작위 또는 명칭인 '일반명사' 비슷한 것으로, 몽골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명칭이다. 당장 아버지 누르하치가 원숭환에게 박살난 후 만났다는 몽골 귀족 역시 훵 타이지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으니... 이전에는 몽골 작위 타이지의 어원이 중국의 태사(太師)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 부분은 틀렸다. 타이지는 칭기즈 칸의 자손만이 칭할 수 있었던 직위로 한자로는 台吉(태길)이라 쓴다. 그에 비해 타이시는 보르지긴씨가 아닌 자들이 칭하던 칭호였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타이시'로는 에센 타이시가 있다. 즉 타이지와 타이시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이 숭덕제의 휘인 홍타이지의 타이지는 台吉(태길)도 太師(태사)도 아닌 太極(태극)이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 泰助)는 홍타이지의 본명을 '허칸'이라 제시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청 태종 숭덕제의 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분명하지는 않다. 아바하이(阿巴海)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건 그 당시 홍타이지가 만든 연호인 압카이 수러[11]를 러시아인들이 이름으로 잘못 읽고 이것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 외에 '홍'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이외에도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숭덕제 호칭이 '홍타이지'라거나, 극단적으로는 그저 우연히 발음이 겹쳐서 커져버린 논란일 수도 있다. 작위명을 이름이나 성씨(사마씨, 윤씨)로 사용한 사례는 흔하다.
또한 홍타이지로만 읽히는게 아니라 Hong Taiji를 한어병음처럼 읽어 중국어 국립국어원 표기에 따라 훙타이지, 황태극을 한어병음 표기를 한 Huang Taiji, 즉 황타이지라고 읽는 등 바리에이션이 나온다. 실제로 여러 언어에서의 위키백과의 표제어를 비교해보면 Hong Taiji와 Huang Taiji로 분분한 편이며, 심지어 표제어가 표제어다보니 홍이나 황이 성씨이고 이름이 타이지인줄 아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자 표기도 황태극(皇太極) 뿐만이 아니라 홍대시(紅歹是), 홍대시(洪大時), 홍태극(洪太極), 홍태주(洪太主), 홍태시(洪佗始), 홍태시(洪台時), 홍타실(洪他失) 등으로 분분하다.
사실상 보통 중국사유목민족사를 접할 때 홍타이지라는 명칭은 이 청나라 숭덕제의 대명사이기에 홍타이지를 숭덕제로 알고 있어도 문제는 없으며, 따라서 홍타이지로도 이 문서로 올 수 있다. 사전에서도 홍타이지는 청나라 태종 숭덕제로 나온다.


4. 조선 관련


다음은 전쟁 전에 청태종이 조선 인조에게 선전포고로 보낸 편지이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청 태종)는 조선 국왕(인조)에게 조서를 내려 유시한다.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우량하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보냈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 벌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사세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할 때이니, 경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 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 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臣)이라 일컬었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느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앉아서 울타리 안에 사는 부녀자의 짓을 본받는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버려 두겠느냐.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 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 밖의 사소한 것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 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인민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숭덕 2년(1637) 1월 2일,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


4.1. 삼전도의 굴욕


사실 국내에서는 중국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해 더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름아닌 조선 인조 정권 당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연 2차 침공하여 끝내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도 불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겪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평가는 옹호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다. '조선은 사대주의로 명나라를 섬기다가 병크의 병크를 거듭하여 자멸하였고 홍타이지가 자비를 베풀어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다'[12]는 속설이 퍼져 있는데, 그나마 그것도 사학계 이야기고 대중 역사학은 아직도 때린 놈이 아니라 맞은 놈에게서 원인을 찾고 있다.[13]
흑역사지만 여러 매체에 역사물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략자에 대해 꽤나 관대하게 평가하는 묘한 역사인 것. 이는 당대부터 그랬는데 후술되어있듯 박씨전 같은 당대 대체 역사 소설에도 숭덕제는 대범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14] 때문인지 홍타이지의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은 상당 부분 타타라 잉굴다이에게 전가됐는데, 사실 항목을 보면 알듯 잉굴다이는 조선을 꽤 신사적으로 대우해주었다. 이는 조선이 청에 사대하게 되면서 홍타이지를 비난할 수 없으니 대타로 잉굴다이를 비난한 감이 커보인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가 된 것.
하지만 박씨전 등 당대 대체 역사 소설조차도 단순히 숭덕제를 대범한 인물로 묘사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그 이상으로 숭덕제를 엄청나게 미화하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작중에서 병자호란이 조선이 일방적으로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언급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병자호란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구한말에도 청나라의 내정간섭 등 조선 속국화 시도와 청일전쟁 당시 청군의 조선 약탈 그리고 중화사상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진 개화세력의 영향으로 인해 병자호란 당시와 같은 강력한 반청감정이 부활했으므로, 이 때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만행이 재조명되어[15] 숭덕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들의 숭덕제 옹호가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숭덕제를 미화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숭덕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옹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정착시킨 만선사관의 영향도 받았다. 게다가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할 때까지 상국으로 섬겼던 명나라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입장에선 조상들의 한반도 및 대륙 침략을 저지한 원수 같은 나라였으므로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를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숭덕제는 조선과의 전쟁에서 청나라의 승리를 이끈 군주이므로 일본의 입장에선 조선 침략의 성공적인 사례로 여겨져 높이 평가할 만했을 것이며 실제로도 일본 제국에서는 숭덕제 사후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것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 때 땅에 묻혔던 삼전도비를 다시 세운 것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에 의한 것인데, 이는 조선인들의 흑역사를 이용하여 조선인들의 체면을 깎기 위해서였다. 어찌보면 한국인들의 숭덕제 옹호는 숭덕제에 대한 일본 제국의 긍정적인 인식이 식민사관의 형식으로 한민족에게 이식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일빠에 조선까의 성향이 짙은 역갤에서 이런 식으로 홍타이지를 찬양하는 식의 글을 써서 각 사이트에 퍼뜨렸던 전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어느 누구와도 전쟁을 대비한 군대나 물자를 비축할만한 나라가 못되었다.
숭덕제의 옹호는 호란의 과정에 있는데 실록에도 "군기가 엄정해서 악탈을 금했다"(인조실록)고 적고 있다. 물론 숭덕제가 약탈을 금한 것은 맞지만 청군 내에서 약탈을 안 한 이들도 대부분이 만주족과 한족이었으며, 몽골족은 숭덕제의 약탈 금지령마저 무시한 채 약탈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약탈을 금한다고 조선이 피해를 안 입는 것도 아니니, 약탈을 금했다는 이유만으로 숭덕제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애시당초 청군에 소속된 몽골족이 조선을 약탈한 것도 숭덕제가 이들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게 원인이다.

4.2. 광해군


조선 침략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아버지 누르하치와 다르게 그는 즉위 전부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광해군정충신을 시켜서 홍타이지를 반드시 회유하도록 밀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홍타이지를 지원해주는 것으로 홍타이지를 회유하지만 홍타이지가 다른 형제들과 권력 싸움이 되도록 몰래 이간계를 시행할 것 역시 시켰으며 동시에 후금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빼올 것 역시 시켰다.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고 있었고 홍타이지를 회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계획을 지시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몰락하고, 정충신 등이 담당하던 외교 관련 업무들은 거의 모조리 취소되어 버렸다.
당장 홍타이지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첩보를 듣자마자 광해군은 다급하게 철통방비에 나서면서 후금과 전쟁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의) 후금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방어력을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갖춘 것은 그만큼 광해군이 홍타이지를 경계한 것을 보여준다.[16] 그리고 후금은 대기근이 닥쳐서 이괄의 난과 인조의 무능함이 아니었다면 정묘호란이라는 도박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다.[17] 다만, 광해군 시절의 조선이 워낙에 엉망이었던지라 부하들의 배신으로 수도 탈출조차 못하고 털린 광해군이 더 잘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웃음거리일 뿐이다. 애초에 광해군도 홍타이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의 필요에 의해서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분리하기 위해서 띄워져서 현대까지 대중적으로 추앙받는 감이 있는 왕이며, 실제로는 연산군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인이다. 더군다가 광해군은 기본적으로 그때쯤엔 나라를 다스릴 자질 자체가 부족한 왕이었음을 드러냈기에 그런 식의 if 소설을 쓴다면 광해군 치하의 조선은 명나라마냥 경제적 파탄으로 스스로 망할 판국이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18] 애초에 광해군에 대한 미화는 일본 제국 시절에 광해군과 홍타이지를 한 세트로 묶어서 미화한 것에서 출발한다.[19]

4.3. 호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처분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해 승리했으나,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천연두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숭덕제는 조선 정복 계획은 포기하고 자신의 대외적인 권위만 확립하고자 했기 때문에(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정복을 포기한 것은 '''천연두를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주족은 유전학적 특성상 천연두에 대해 조선인이나 중국 한족보다 훨씬 취약했는데, 숭덕제도 천연두를 앓지 않아서 면역이 없었던 상태였다.) 인조도 퇴위당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굴욕에서 삼궤구고두례가 끝난 후 숭덕제가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히도록 하라."'''고 명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만주인 고관들'''만'''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던 일들이나 예친왕 도르곤과 인조가 서로 나눈 대화 등을 보면, 자국의 연호를 따르게 하고, 군신 관계의 예우를 명나라에게 하던 시절과 거의 똑같이 한 것은 단지 조선을 신하로 만든 것만이 아닌, 명나라 시절과 같은 청나라 중심의 군신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한편, 백성들은 최대 60만 명 정도가 포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당연하지만,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추정치이다.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20] 정확히 말해 그 당시 후금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60만 명 이라는 저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하였다. 출처)되며, 이는 청나라의 필요 노동력을 훨씬 초과하는 수였다.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려면 몸값을 내야 했고, 그렇지 않고 탈출한 이들의 경우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강제 송환을 요구하곤 했으나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호란 당시에 비해 상황이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21][22]

4.4. 호감?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결론만 놓고 말하면, '''글쎄로소이다?''' 정도에 그친다.[23]
일단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에는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 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거 안 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짚고 갈 점은, 정묘호란 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받아간 것이 병자호란 이후 후금이 받아간 세폐보다 몇 배나 많은 데다, 당시 동북아를 덮친 흉년과 냉해로 구하기 힘든 식량이었다는 점에서, 세폐 부담은 약간 줄거나 같은 수준이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세폐가 몇 배로 늘었어도, 이전 명나라에서 받아가던 세폐 수준보다 적었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가 답례를 정상적으로 할 상황이 아니어서 없다시피 했고, 명 사신들이 요구하는 뇌물도 은으로 수만냥에 이르렀다. 청나라도 비슷한데, 오히려 경제력에서는 조선에게도 밀리던 청나라가 정상적인 답례를 하기 힘들었다. 대신 청나라는 중원 점령 이후 세폐를 임진왜란 이전의 절반 수준, 답례는 비슷한 수준으로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세폐를 백금 1만 냥, 군마 3천 필로 요구했으나, 조선은 안 줬다. 아니, 못 줬다. 청 태종도 조선에 그런 거 없다는 거 알고 달라고 했던 거다. 그냥 조선이 못 준다고 하면 한 번 두들겨패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래서 형제지맹을 군신지맹으로 하고 세폐를 늘리라고 했을 때, 조선이 주화파와 주전파가 다투다가 주전파가 이겨서 "우리는 못 하오"라고 하자 청 태종 홍타이지가 떡밥 물었다며 군사 이끌고 침략한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경우도 청이 조선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호란 때 이미 청측에서 조선군의 조총병에 대한 평이 높았다. 그렇기에 조선군을 동원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다만 광해군 때 명에 원군을 파견할 때도 원정 비용을 자비로 했으니, 같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24]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 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 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강간과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4.5. 환향녀 문제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사회문제가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는 의례상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당연하게도 가부장적인 사대부들은 그녀들을 내쳤고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기생도 아닌 창부를 하게 된다.

4.6. 결과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5. 현대 만주족의 평가


현대 만주족은 관점에 따라 숭덕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만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정복전쟁을 통해 만주족이라는 민족이 널리 알려지도록 기여하였으며 청나라가 최대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을 근거로 든다.
반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숭덕제의 정복전쟁이 결과적으로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 원인까지 제공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비록 숭덕제가 살아생전에 중원을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중원 정복의 토대를 마련한 건 숭덕제 본인이니 말이다.
만약 청나라신해혁명으로 멸망한 후 만주족이 현대에 자신들의 진정한 독립국가를 세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면 숭덕제는 만주족의 독립국가에서 그야말로 몽골에서의 칭기즈 칸과도 같은 대접을 받았을 수도 있다. 칭기즈 칸도 몽골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하고 정복전쟁을 통해 몽골족이라는 민족이 널리 알려지도록 기여하였으며 몽골 제국 최대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몽골족이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운 반면 만주족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숭덕제의 위상이 칭기즈 칸보다 떨어지는 셈이다. 병자호란으로 고통받은 조선 백성들을 생각하면 숭덕제 본인의 업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청나라 때는 숭덕제가 만주족에게 그야말로 국부 대접을 받았고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만주족은 숭덕제를 자신들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만주족이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상황이 장기화되자 오늘날에는 만주족 사이에서도 비록 대한민국의 입장과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숭덕제를 부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조상들이 중원 정복에 실패하거나 원나라몽골족처럼 빨리 중원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후손인 자신들은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로 잘 지냈을 수도 있다며 안타까워하는 만주족이 많을 정도다.[25]

6. 작품에서


청 태종의 치세 동안 조선 시대 당시 병자호란을 다룬 대체역사소설박씨전, 임경업전 등에서도 청 태종을 비하한 묘사는 별로 없으며, 매우 대범하고 유능한 군주로 나온다. 똑같은 대체역사소설인 사명대사전에서 사명대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수뇌부를 실컷 농락한 것과 비교해 보자.
이는 홍타이지가 비록 욕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사대로 섬기는 청나라의 시조이다. 그런 사람을 비판했다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전에서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인 타타라 잉굴다이 등을 포함해 대부분 홍타이지의 부하들을 죽였다 살렸다하는 것은 아마도 홍타이지에 대한 비판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으로 보인다. 박씨전에서도 금이나 청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랑캐국을 뜻하는 호국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며 홍타이지도 이름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저 호왕으로만 나온다. 이는 임진록에서 대놓고 평수길이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한 현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의 청나라 미화,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와[26] 인조에 대한 필요 이상의 폄하로 인해 홍타이지에 대한 미화가 생기는 것도 겹쳐 있다.[27] 게다가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 자체가 신해혁명 당시의 엄청난 만주족 학살과 청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비참하게 몰락하여 현재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한때의 적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조차 동정받는 감이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환빠만선사관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만행이 재조명되면서 숭덕제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조금 나을 뿐인 악랄한 침략자라고 욕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후금 및 청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다.[28] 홍타이지의 가정사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암바 푸진(大福晉, 정실 황후)인 저르저르(哲哲, ᠵᡝᡵᠵᡝᡵ)와 측복진(福晉, 푸진 즉 후궁)인 하르졸(海蘭珠, ᡥᠠᡵᠵᠣᠯ)[29], 붐부타이(布木布泰, ᠪᡠᠮᠪᡠᡨᠠᡳ) 자매는 고모와 조카 관계이다. 고모와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 셈. 황제인 홍타이지에게는 수많은 비빈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하르졸 한 명이다. 하르졸은 입궁 당시 한번 결혼에 실패했고 26세라는, 당대의 나이로 치면 노처녀에 해당하는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30] 입궁 이후 홍타이지의 총애를 독차지한다.[31] 나중엔 총애를 뛰어넘어 남녀 간의 연정으로 이어질 정도로 홍타이지는 하르졸을 몹시도 사랑했다.[32][33] 저르저르는 하르졸이 회임을 하자 혹시라도 아들을 낳게 되면 황후(암바 푸진)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단 불안을 느껴 홍타이지에게 "하르졸이 회임해서 시중을 못 드니 붐부타이가 시중을 들게 하라"고 청했다.[34] 하르졸이 아들을 낳자 홍타이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미 성년이 된 황자들이 있었음에도 "하르졸의 소생이야말로 황제에 오른 뒤에 얻은 진정한 장자"라며 전국에 대사면을 선포하고, 황태자로 삼았다.[35]

그러나 불행히도 하르졸의 아들은 한 살이 채 못 돼 요절했다.[36] 그로부터 3년 후, 하르졸 역시 세상을 떠났다.[37] 홍타이지는 다섯 시간 가까이 통곡하다 실신할 정도로 하르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 했다.[38]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고,[39] 하르졸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던 그는 2년 후, 황후의 궁에서 급사한다. 이들의 로맨스는 아들 순치제동악비의 로맨스와 매우 유사하며 함께 청대의 가장 유명한 로맨스로 꼽힌다. 이들과 첫 아내 애처가였던 강희제건륭제, 진비를 총애한 광서제 등으로 인해 현대 중국인들에겐 청대 황제들은 사랑꾼이 많다는 이미지가 있다.[40]
홍타이지의 또 다른 아내인 붐부타이는 하르졸의 친동생인데, 붐부타이는 홍타이지 생전 언니에 밀려 많은 총애를 받지 못했지만 그 아들이 순치제로 등극하여 황태후가 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붐부타이는 섭정왕인 시동생 도르곤과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이러한 흥미로운 스토리 때문에 홍타이지, 하르졸, 붐부타이, 도르곤 네 명의 사각관계를 다룬 작품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효장비사>, <산하련>, <대옥아전기>, <독보천하> 등에서 홍타이지와 그의 여인들의 러브 스토리가 등장한다.
SNL게임즈 카스2 병자호란에선 인조가 방 안에서 궁녀희롱하고 있을때 "니츠판러마(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이후 인조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낄낄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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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김법래가 분했다. 남한산성 안에서 벌어지는 명나라를 향한 조선 조정의 망궐례를 먼발치에서 쳐다보면서 "저것들이 지금 뭘하는 거냐?"라며 물어보는데, 정명수가 조선 국왕이 명 황제를 향해 새해를 맞아 예를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살짝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당장 저기에 포를 쏴버리겠다고 하는 용골대(타타라 잉굴다이)를 "'''정초부터 화약 냄새 풍길 필요 없다.'''"고 제지하며[41], "저들은 그저 저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린다. 지금이라도 당장 군사를 사방에서 포위해 성을 쓸어버릴 수 있다며 총공격을 진언하는 용골대(타타라 잉굴다이)에게 "'''너는 내가 여기에 온 것과 오지 않은 것의 차이를 아느냐?'''"라며 자신이 이 먼곳까지 와서 남한산성을 치지 않고 포위한 채로 두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선 국왕을 제 발로 걸어 나와서 스스로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게 만드는 것에 있고 그래야 한으로서의 위엄이 천하에 선다며, 문장 좋은 자를 불러오게 해서 인조에게 보내는 국서를 쓰게 한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患亂)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왔다.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 주겠다. 너는 나와서 두려워 말고 말하라.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하늘에 보름달이 차는 날.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남한산성을 향한 총공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지천 최명길이 인조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와서 바치고 그것을 읽고 나서야 비웃듯이 "'''조선 국왕이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었구나.'''"라며 공격을 멈추게 한다. 배우의 목소리톤이 상당히 중저음이라 대사마다 확실히 위압감이 있는 데다, 실제 역사와 이를 인용한 원작 소설에 나오는 청 태종의 국서를 나레이션으로 띄우는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 '''세기말 제왕의 포스'''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웹툰 칼부림에서도 주인공이 후금으로 귀순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작중에서는 지속적으로 명에 대한 공격보다는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한다는 의중을 피력한다.

7. 둘러보기



[1] aɣud‍a örüsiyengč‍i n‍ay‍ir‍amd‍aɣu boɣda qaɣan.[2] 휘에 관해 논란이 있다. 아래의 "홍타이지?" 항목 참조.[3]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4] 물론 혈통이 좋다고 날로 먹은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운과 노력이 따랐다. 홍타이지도 공으로 누르하치 바로 다음인 4대 버일러 자리를 얻었다. 또한 다른 3명의 버일러중 2버일러인 아민은 누르하치의 조카이며 3버일러인 망월타이는 죄를 지은 어머니를 죽인 일로 찍혔고, 성격 좋은 암바(大) 버일러 다이샨이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이쪽은 성격만 좋지 아버지 살아있을 때엔 사생활이 난장판이어서 누르하치에게 실망만 안기던 불효자였다. 결국 '4대 버일러'라고는 하지만 다른 세 버일러들이 다들 크나큰 결점을 갖고 있어 후계 구도는 홍타이지에게로 기울었다. [5] 다이샨의 사생활에 대해 부연하자면, 한번은 도르곤 어머님 되시는 아바하이와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다가 아비의 여자를 탐하는 패륜아라는 논란으로 번져 집안 망신을 시키기도 했고, 또 한번은 조강지처 소생의 둘째 아들 쇼토가 명나라로 도망(!)가려다가 걸려서 할아버지 누르하치 앞에 끌려왔는데 "아빠가 새엄마(예허나라씨)한테 정신 팔려서 형(요토)이랑 나는 조강지처 아들들인데도 신경도 안써요ㅠㅠ" 하며 서럽게 울자 할아버지가 아비한테 구박받는 손자를 도리어 안쓰럽게 여겨 직접 키우겠다며 거두고는 제 친자식을 반역자라고 죽이겠다 노발대발하는 다이샨을 불러다 혼쭐을 내는 일도 있었다. 성격만 좋지 사생활은 그야말로 아비 망신 시키고 다니는 난봉꾼이었던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난봉꾼 다이샨의 사생활 덕에 누르하치가 직접 거둔 손자들은 누르하치의 늦둥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홍타이지 사후 후계 경쟁에서 누르하치 늦둥이 삼형제 중 최고의 실력자였던 도르곤의 지지세력이 되고, 다이샨 역시 나이가 들어서는 황실의 최연장자로서 도르곤을 섭정왕으로 밀어주게 된다.[6] 여담으로 병자호란으로 인해, 역대 청나라 황제 중 유일하게 조선 땅을 밟은 황제가 되었다. 병자호란의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한 외교방문이 아니라 전쟁을 목적으로 한 방문이기에 이 역시 굴욕이 아닐 수 없다.[7] 하지만 도르곤순치제가 각각 죽을 때도 누군가가 따라 묻혔다. 결국 강희제의 치세에야 근절되었다.[8] 출처는 <옹정제>(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76쪽. 하지만 아예 무시당한 것은 아니고 자손 대대로 봉은보국공을 세습하긴 했다. 다만 추옝의 공에 비하여 박한 대우를 받은 것은 맞다. 참고로 이 추옝의 장손으로 이어지는 종갓집 이야기가 왜 100년 후의 황제인 옹정제 평전에 나오냐면, 옹정제의 황8자당 숙청 작업에서 이 집안 황족들의 천주교 입교(!)가 까발려지며 일가의 수많은 이들이 유형생활 끝에 순교하다 멸문지화를 겨우 모면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 [9]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실 송산 전투에서 군을 지휘할 때 코피를 심하게 흘렸는데 이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10] '칸'은 칭기즈 칸의 후예인 보르지긴씨만 칭할 수 있는 것이였기에 초원의 지배자들은 다른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준가르뿐만 아니라 티무르 제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11] 압카이(만주어로 하늘) - 아브카이 - 아바하이.[12] 사실 이는 삼전도비에 새겨진 내용이기도 하다. 애초에 삼전도비의 내용 자체가 병자호란을 미화한 것이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고종실록순종실록과 마찬가지로 교차검증이 필수다.[13] 광해군은 애매한 자세로서 대륙의 정세를 관망하였는데, 인조정권은 이것을 문제 삼아서 反正이라고 일어났다. 그런데 明에서조차 처음에 이들은 반역자들로 인식되었고, 淸으로부터는 공격에 대한 명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인조정권의 수뇌들은 광해군이 그나마 준비한 것마저도 자리 다툼으로 잃어버리고,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14] 애초에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이후에는 조공 및 전쟁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엄청나게 수탈했으니 이것만 봐도 숭덕제를 대범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15] 따지고 보면 여말선초에 일어난 왜구들의 노략질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만행도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재조명된 것에 가깝다.[16] 정충신은 광해군 때 방비의 절반만 되어도 방어전이 가능하다고 평할 정도.[17] 이괄의 난 직후 정충신과 남이흥의 설득에도 인조는 헛소리 퍼레이드를 벌였으며, 심지어 군사 훈련도 시키지 못하게 해서 남이흥을 사실상 죽으라고 사지에 몰아넣고, 남이흥도 나라를 위해서 죽은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군사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기며 장렬하게 폭사했다.[18] 이 경우 부동항을 얻기 위해 만주로 진출하여 후금 유민들을 복속시킨 러시아가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조선까지 침략했을 때, 조선의 입장에서는 실제 역사의 나선정벌에 비해 더욱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선정벌 때는 효종의 노력으로 조선의 군사력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본 대체역사에서는 광해군의 실정으로 인해 조선의 전반적인 군사력이 실제 역사의 효종 치세 조선에 비해 매우 취약해졌을 테니 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우는 데 있어 조선군의 불리한 점이 더더욱 늘어났을 것이다.[19] 광해군은 애초에 결코 군사적인 왕은 아니다. 단순히 연산군의 다른 버전이 광해군으로서, 연산군의 놀이집착증이 아니라 광해군은 왕의 후까시와 권력 집착증세 버전 왕에 가까웠다. 위키와 대중문화 전반에는 어이없을 정도의 광해군 미화가 많은 편이나, 애초에 광해는 자기가 밀어준 군인들한테 제일 먼저 멱살을 잡혀서 수도를 탈출조차 못 해보고 폐위당한 왕이라는 점부터 군사적인 왕이 아님을 방증하며, 오히려 부정부패를 권장하고 국방비를 착복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군사력과 인구수의 핵심 요소인 농경의 가치부터 멸시한 정말 아마추어적인 똘끼넘치는 왕이었다. 애초에, 광해를 냅두면 전쟁까지 가기도 전에 나라가 망할 판국이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누가 더 낫다느니 전쟁까지 광해군이 잘 막았을 거라는 말 자체가 공상 넌센스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당장에 국가가 망할 판국이라고 당대의 군인들이 앞장서서 끌어내린 왕이 광해군인데 무슨 10여년후의 전쟁을 하겠는가?[20]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배한 것은 나라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출처[21]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환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 정권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 위해 몸값으로 은 수천 냥에서 수만 냥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 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만주족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22] 그런데 우리 말고도 밟혔던 몽골은 끝끝내 직접 통치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으며, 조선 역시 청나라의 선조 격인 여진족을 상대로 예방 전쟁을 즐겨했던 역사를 보면 더 큰 보복도 우려될 만한 지경이었다.[23] 숭덕제가 몽골 정복 후 몽골족에 대해 회유책을 편 것도 딱히 몽골에 대해 호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몽골의 강력한 기병력을 흡수함으로써 청나라의 정복전쟁에 도움이 되는 현실적 이유가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술할 내용처럼 개인적으로 몽골족 출신 후궁인 하르졸을 매우 사랑했던 것과는 별개로... 만약 숭덕제가 진짜로 몽골족에게 대인배였다면 몽골 대칸위를 찬탈하지 않고 조선의 경우처럼 보르지긴 왕조를 그대로 놔두면서 몽골을 제후국으로 삼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자신이 멸망시키지 않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대인배라고 보기 어려운데 아예 몽골 보르지긴 왕조를 멸망시켜버린 상황에서 몽골인들에게도 마냥 대인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의 한족 민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치하를 흑역사로 여긴다.[24]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실제 광교산 전투에서 자신의 매부인 수무루 양구리가 저격에 전사하는 등 청나라도 고위층의 피해를 보긴 했다.[25] 허나 중원 정복이 없었어도 러시아 제국의 침략에도 대응해야 하고 설사 러시아를 잘 막아냈다 해도 일본 제국에게 식민지배되거나, 그것마저 버텨냈다 한들 신장이나 티베트처럼 중국에게 정복당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해당 대체역사에서 조선이 일본 제국의 침략을 무사히 막아냈다면 조선이 고구려 영토 회복이라는 명목으로 만주를 침공했을 수도 있다. 물론 20세기에 여러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한 역사를 감안하면 해당 대체역사의 근현대 만주족이 독립국가를 영원히 못 세웠을 거라고 무조건 단정지을 수도 없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에 세워진 소련도 여러 모순점이 누적되는 바람에 해체되어 여러 피지배민족들이 독립했고, 중국에 정복당한 신장과 티베트도 시진핑의 각종 실책이 원인이 되어 독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부터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된 나라다.[26] 다만 광해군도 최근에는 내치에서의 실정이 재조명되어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27] 후금을 포함한 청나라 초기 인물들 중 조선의 입장에서 그나마 대인배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홍타이지 본인보다는 아버지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이복형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이복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그리고 신하인 타타라 잉굴다이였다. 홍타이지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예방전쟁으로 조상인 여진족을 탄압한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복을 하고 싶어도 그랬다가 오히려 장기전으로 이어져 본인들이 불리해지고 최악의 경우 도리어 청나라의 멸망만 더욱 앞당겨질 수도 있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큰 보복을 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28] 만주족이 현대에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웠다면 중국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이 경우 중국 드라마에서는 철저히 악역으로 나오고 만주족 독립국가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나왔을 것이다.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악감정이 많이 희석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만주족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는 걸로 모자라 아예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비참하게 몰락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이 여전히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일본 극우세력의 무책임함이 가장 크긴 하지만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고 다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도 한 몫 했다. [29] 만주어로 비취라는 뜻이다.[30] 홍타이지와 비교하면 16살 차이가 났다. 홍타이지는 1592년생, 하르졸은 1609년생.[31] 저르저르는 후사가 없어 저르저르의 오빠인 하르졸-붐부타이의 부친 코르친 버일러 호쇼이 충친왕(和碩忠親王) 자이상(寨桑)과 상의하여 붐부타이를 궁에 들였다. 붐부타이가 딸을 낳고 다른 비빈들이 차례로 아들을 낳자 불안해진 저르저르는 붐부타이와 하르졸의 오빠(친조카)와 상의하여 또다시 하르졸을 궁에 들였다.[32] 황제에 등극한 홍타이지는 명 후궁제도를 답습해 복진인 저르저르를 비롯한 비빈들에게 후궁작위를 내렸다. 이때 저르저르는 황후, 하르졸은 동궁(東宮) 관저궁 신비(關雎宮 宸妃), 붐부타이는 서궁(西宮) 영복궁 장비(永福宫 莊妃)에 봉했다.[33] 하르졸에게 주어진 관저궁의 궁호는 하르졸이 거처할 궁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경에 나오는 애정시인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관관저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 울음 우는 물수리는 강가에 있고,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짝이라네)' 에서 따온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 관저궁의 현판을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한다.그리고 신(宸)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한자였다.[34] 이때 붐부타이는 하르졸 다음으로 회임을 하게 됐지만 끝내 홍타이지의 총애를 얻지 못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훗날 순치제로 즉위하게 되는 풀린.[35] 이때 홍타이지는 황태자의 이름을 (다른 황자들보다) 가볍게 지을 수 없다며 학식이 뛰어난 유학자들을 모아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논의를 했다.[36] 황태자가 죽은 지 이틀 뒤에 붐부타이가 순치제를 낳았지만 황태자의 죽음에 상심해 있던 홍타이지는 이름을 풀린(福臨)이라 대충 짓고는(풀린이 태어난 곳이 영복궁이었으므로 "영복궁 애"라는 뜻이었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풀린의 아들인 강희제가 청나라의 전성기를 연 성군이라는 게 아이러니한 일.[37] 명을 공격하는 중이던 홍타이지는 하르졸의 부고를 듣자마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일 밤낮을 달려 궁으로 갔으나 하르졸은 이미 죽은 뒤였다.[38] 이때 신하들은 홍타이지가 울다 쓰러져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39] 홍타이지는 하르졸의 장례를 국상으로 선포했으며, 장례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단 이유로 친왕 둘을 처벌하기도 했다. 또 "짐은 평생 백성들과 세상을 돌보며 살아왔는데 한 여인은 돌보지 못했다!"라며 자주 탄식했다고 한다.[40] 보보경심에선 "아이신기오로 남자들은 사랑에 정열적"이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41] 물론 실제로는 반대로 용골대가 숭덕제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