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리 송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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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개국 공신 중 하나이자 재상이었던 허서리 소닌의 셋째아들로, 현 랴오닝성 선양(瀋陽) 출신이다. 허서리 소닌이 죽자 자연스레 그의 지위를 물려받았고, 강희제의 통치 기간에 권신으로서 활동하였다.
2. 생애
2.1. 화려한 전적
일찍이 친척들로부터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를 배웠고, 부친 허서리 소닌이 청나라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써 내무부(內務府) 총괄직을 맡게 되자 송고투 역시 그동안 배운 지식과 아버지의 후광으로 1668년(강희 7년)부터 이부시랑(吏部侍郎) 자리에 앉아 활동하고 있었다.
강희제 치세 초기에는 황제의 나이가 어려 구왈기야 오보이, 허서리 소닌, 나라 숙사하, 니오후루 어빌룬이 보정대신으로서 국정을 총괄했는데, 그 중 구왈기야 오보이가 가장 크게 권세를 휘둘러 자신과 같은 보정대신이었던 숙사하를 죽이기에 이른다. 강희제는 오보이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보이가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으며, 그와 같은 보정대신들 중 니오후루 어빌룬은 양황기(鑲黃旗)로 오보이와 같은 팔기군에 속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 결국 허서리 소닌을 통하여 오보이를 견제하기로 하고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의 주도로 소닌의 장손녀와 혼인하고, 송고투를 시켜 무술 수련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선영(善營)이라는 특별군을 조직하고 관람한다. 그러나 실상은 바로 황제의 친위대를 조직하여 오보이에 맞설 준비를 한 것이었고, 이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오배는 죄인으로 몰려 사망하고, 송고투는 공신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운남(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지신(尙之信), 복건(福建)의 경정충(耿精忠) 등의 삼번(三藩)이 세력을 확장하여 역모를 준비한다는 풍문이 일어 강희제가 이들을 철폐하려 하자, 삼번이 청의 중국 통일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이후로도 해당 지역을 안정시키고 있다면서 반대하였다. 하지만 삼번은 오삼계를 위시하여 끝내 1673년 삼번의 난을 일으키고 말았고, 허서리 송고투는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이 되어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의 혼란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8년만에 삼번의 난이 겨우 진압된 뒤, 반란군들의 편을 들었단 이유로 황제의 신임을 잃는다. 그러나, 그가 다시 신임을 얻을 기회는 오래지 않아 다시 찾아왔다.
165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의 전신 루스 차르국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청나라와 국경 분쟁을 하자 청나라 측은 변방이었던 만주 주둔군의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러시아의 원정대를 격파했다. 결국 러시아 측은 처음에는 농업 생산력이 높은 지역이라 생각되었던 아무르 강 일대가 별로 생산력이 높은 땅이 아니었고, 패배가 계속되는데다 당시 복잡했던 자국 내 사정[1][2] 을 해결해야 해서 만주 일대를 포기하고 중국과 교역관계를 재개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청 정부에 연락하여 1689년,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하는 조약을 체결하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었다. 이에 허서리 송고투는 청 협상 대표단으로서 1689년 6월 네르친스크에 도착하고, 8월 19일부터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정했다. 여담으로 당시 러시아 측의 사절은 천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선교사 출신 통역사, 만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사절을 데리고 왔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후, 송고투는 청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된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2.2. 최후
그의 맏형의 딸, 즉 조카딸은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1674)로 강희제의 제1황후였고, 그의 자식이자 송고투의 외조카는 이밀친왕 윤잉(理密親王 胤礽, 1674~1724)이었다. 삼번의 난으로 뒤숭숭하던 때에 효성인황후가 윤잉을 낳고 곧바로 사망하여 강희제는 효성인황후에게 주던 사랑을 윤잉에게 쏟아 그를 매우 총애하였고, 또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적자로써 윤잉을 차기 황태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만주족들에게는 적장자 같은 건 상관없이 가장 능력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전통이었고 이는 강희제 대에도 남아있었다.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적자만 편애한 강희제의 태도에 매우 반발했고, 붕당을 형성하여 암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윤잉 또한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황태자당(皇太子黨)이라는 붕당을 형성해야 했는데, 황태자당의 실질적 대표가 바로 허서리 송고투였다. 윤잉을 황제로 만들고 일등공신이자 황제의 외삼촌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자기 욕망을 빨리 이루고 싶었는지, 윤잉을 부추겨 강희제를 암살하도록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나 실패하고 만다. 결국 황태자를 우롱하고 붕당을 함부로 형성한 죄로 실각된 뒤, 강희 42년 끝내 사형을 당한다.
3. 기타
권신이기도 했고, 해먹은 일이 있다보니 청사고 269권에 열전(列傳)이 존재한다.
녹정기에도 등장하는데,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러 갈 때 위소보가 동행하는 등 여러 번 등장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이 사람이 한 활약을 작중에서는 위소보가 하다보니, 작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강희제와 위소보가 오배를 처단하고 그의 집에 재산을 몰수하러 갈 때 동행, 이때 위소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그와 의형제를 맺고 몰수한 오배의 재산 이(二)백만을 일(一)백만으로 고쳐 반씩 갈라먹었다. 다만 위소보 쪽에서는 그에게 크게 신경 안 쓴다. 애초에 의형제를 맺을 때 동년 동월 동시에 죽자는 말을 저쪽이 나이 더 많은데 동년에 죽으면 내가 손해지! 라면서 발음을 어물거려 동월 동월 동시로 고쳤다.
[1] 당시 러시아의 차르였던 표트르 대제는 이복 누나였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반란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소피아의 동복 형제였던 이반 5세와 공동 차르가 되어 소피아의 섭정을 받는 신세였다. 그러나 소피아 공주는 오스만 제국, 청나라 등과 싸워 패배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여 조정에서 소피아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표트르 대제는 이를 이용하여 소피아를 몰아내고 통치권을 되찾으려 했다.[2]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직후, 소피아는 애인과 함께 조정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국면 전환을 시도하다 도리어 표트르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유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