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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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 順治帝
세조 순치제
'''
'''묘호'''
'''한자'''
'''세조(世祖)'''
'''만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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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한자'''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만주어'''
ᡝᠯᡩᡝᠮᠪᡠᡥᡝ ᡥᡡᠸᠠᠩᡩᡳ
'''한호'''
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ᡥᠠᠨ[1]
'''칸호'''
ᠡᠶᠡᠷᠡᠷᠢ ᠵᠠᠰᠠᠭᠴᠢ ᠬᠠᠭᠠᠨ
Эеэр засагч хаан
'''섭정'''
섭정왕 도르곤 (성종) (1643년 ~ 1650년)
''''''휘''''''
'''만주어'''
아이신 교로 풀린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ᡶᡠᠯᡳᠨ
'''중국어'''
아이신줴뤄 푸린(愛新覺羅 福臨/Àìxīnjuéluó Fúlín)
'''한국어'''
애신각라 복림
''''''연호''''''
'''만주어'''
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2]
'''한자'''
순치(順治)
'''몽골어'''
Эеэр засагч
'''신장'''
170cm[3]
'''생몰 기간'''
'''음력'''
1638년 ~ 1661년 2월 5일 (24세)
'''재위 기간'''
'''음력'''
1643년 5월15일 ~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1. 개요
2. 생애
3. 창작물에서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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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청태종의 9번째 아들. 강희제의 아버지.
5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치세 초기 7년 동안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多爾袞)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다. 순치제의 치적들의 대부분은 사실 황부섭정왕 도르곤에 의해 이루어졌고, 오늘날 교과서에 쓰여진 순치제의 업적도 모두 도르곤의 업적이었다. 오늘날 순치제는 중원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중국 통일 왕조로 만든 황제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때 순치제는 6살에 불과했고, 숙부인 도르곤이 이 모든 업적을 이루었다. 도르곤은 순치제가 후세에 존재감을 남길 수 있게 해준 존재였으나, 어린 순치제는 도르곤을 매우 증오하여 도르곤이 죽은 후 그를 부관참시했다.[4]

2. 생애


1638년, 청태종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효장문황후. 이름은 '''푸린(福臨, 복림)''' 이었다. 푸린이라는 이름은 모친인 효장문황후가 당시 거주하던 ‘영복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황인 홍타이지는 당시 총애하던 해란주(효장문황후의 언니이자 푸린의 이모이기도 하다)의 아들이 요절해서 상심한 나머지 푸린의 이름을 대충 지은것.
1643년 부황인 청태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팔기 회의에서 어부지리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홍타이지 사망 당시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유력했던 이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아이신교로 호오거였다. 도르곤의 세력이 더 강했지만 도르곤을 반대하는 호오거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5] 결국 타협책으로 어린 푸린을 황제에 앉히고 도르곤이 섭정왕에 올라 푸린이 성년이 될 때까지 실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6][7]
여섯 살의 푸린이 황제에 오르고, 예친왕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愛新覺羅 舒爾哈齊)의 6남인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愛新覺羅 濟爾哈郞)이 좌우 섭정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르갈랑은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에 오른 도르곤이 거의 혼자서 다 행사했다.
순치제가 황제에 오른 이듬 해에 도르곤은 오삼계의 팀킬 행위로 갓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을 공격하여 어부지리로 북경을 접수한다. 이어 도르곤은 청나라가 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왕조라고 선포하고 전란으로 파괴된 베이징을 복원했다. 다음해 이자성은 쫓기던 중 살해당한다. 이로서 도르곤은 아버지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한 최대 숙원 사업인 중원 통일을 완수하였다.
도르곤은 1650년에 죽기 전까지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을 통치했다. 옥새도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사망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14세 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다.
관습에 따라 청나라 황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를 맞았는데[8]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9] 심지어 첫 황후는 질투가 심한 걸 트집을 잡아 폐출시키기까지 하였다. 대신 후궁들을 좋아했다. 황태자가 된 3황자 히오완예이의 생모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도 순치제의 후궁이었고, 그중에서도 순치제가 가장 총애한 후궁은 현비 동오씨다.[10][11] 현비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이런 타입의 군주들이 종종 그렇듯 '''정치에 뜻을 잃었다.''' 이듬해인 1661년, 천연두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제위를 황태자 히오완예이(훗날의 강희제)에게 물려주고 붕어하였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청나라판 햄릿(?)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 어머니인 효장문황후는 당시 청나라에서 종종 이루어지던 제도인 형사취수를 했다는 큰 떡밥이 있다.[12] 그러나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혼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참조. 순치제는 마음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삼촌이 죽자 존호를 추탈해버리고(실제로 도르곤이 기주로 있던 정백기 장수, 측근들이 친형인 아지거를 섭정왕으로 만들려 했다가 순치제와 섭정왕 자리를 잃은 지르갈랑에게 걸려서 아지거는 자결했고 장수들은 숙청당했다.) 유골까지 훼손해버렸다. 덤으로 도르곤이 억지로 황후로 추존한 도르곤의 친모 아바하이를 도로 후궁으로 만들었다. 몽골 출신 황후를 싫어한 이유도 이런 어머니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국정은 선정이었다. 친정 직후 황족 출신 왕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으로 황권을 강화하였다.[13] 1659년 남명을 윈난성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변발과 만주 복식을 강요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대학살을 일으켜 많은 한족들을 죽였다.영상 단, 난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한족에 대한 융화 정책도 병용해서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다만 한족 출신 공신인 오삼계 등의 3번 세력들의 세력은 무척 커져 강희제 때 삼번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순치제는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매우 총애했다. 아담 샬은 명나라 때부터 베이징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로,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 역법에 능해[14] 도르곤 때부터 인정받았지만 순치제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더욱 대박을 치게 된다. 입관 직후 통의대부, 태복시경, 태상시경에 임명되고 정 3품이 된다. 순치제는 심지어 삼궤구고의 예마저 종교를 감안하여 면제해준다. 몇 년 후에는 광록대부의 봉호를 받고, 조상 3대가 은전을 받는다. 1656 ~ 1657년까지는 순치제가 두 해 동안 24번이나 집에 직접 왕림하였다. 샬은 순치제에게 충고도 여러 가지 하였는데, 궁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황제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고 회개하라고 충고하여 '섭정왕'이란 조롱투의 기록까지 있다. 덕분에 예수회가 청나라를 조종하였다는 음모론이 나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야사에서는 현비가 죽었을때 신하들이 황후 추서에 반대하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를 물린 후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한다. 이는 김용무협소설 녹정기라거나 얼웨허의 역사 소설 제왕삼부곡 등에도 차용된 이야기인데, 물론 야사는 야사일 뿐, 믿지는 말자.
순치 18년(1661년)에 제위를 황태자인 3황자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24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사후 청나라 황실의 능구 두 곳 중 하나인 청동릉의 효릉(孝陵)에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효릉 안에 순치제가 생전에 신던 신발 한 켤레와 부채 한 자루만 부장품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인지 1928년 쑨뎬잉이 청동릉에 난입해 강희제의 경릉(景陵), 건륭제의 유릉(裕陵), 함풍제의 정릉(定陵), 동치제의 혜릉(惠陵) 등 네 황제의 능을 도굴해 보물이 약탈당하고 유해가 훼손될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순치제의 치세 기간(1643년 ~ 1661년) 조선의 왕은 인조(仁祖, 1623년 ~ 1649년), 효종(孝宗, 1649년 ~ 1659년), 현종(顯宗, 1659년 ~ 1674년)이 재위했다.

3. 창작물에서


대체로 창작물이 묘사하는 시기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청의 입관 이전과 직후를 주로 다루는 '대청풍운' 등의 여러 작품에서는 보통 처음에는 아역으로 시작하며 존재감이 없다가 성장할수록 어머니를 좋아하는 삼촌을 질색하는 사춘기 아이로 그려지고, 청년 시기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동고비와의 로맨스와 사별 후의 슬픔과 상실감, 동고비에 정신 팔린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공부(집안일과 나랏일)는 뒷전이고 첫사랑에 환장한 고딩[15]과 그런 아들한테 잔소리하는 엄마랄까. 정사와 별개로 야사를 따라 죽음을 가장하고 출가한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나, 어찌되었든 제위에 있는 동안엔 명청교체기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달리 수염을 풍성하게 기를 정도의 성숙한 어른으로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16]
  • 녹정기 - 매우 안습하게 표현되었다. 지못미. 동비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죽음을 가장하고 실제로는 출가한 상태였는데 강희제의 정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 순치제를 잡아 인질로 쓰려고 했고 이로 인해 순치제는 쫒기는 몸이 되나 위소보의 재치로 간신히 살아난다. 이후 사실을 안 강희제가 순치제를 찾아 오지만 자신은 죽은 몸이라며 만나주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위소보가 대성통곡을 하며 분위기를 잡고 결국은 마음이 약해진 순치제가 강희제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순치제는 강희제의 정치를 칭찬하고 더이상 찾아오지 말 것과 함부로 세금을 올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 강희제국(중국 드라마, 2001~2002) - 1화부터 등장한다. 중병에 걸린 동 귀비를 매우 총애하여 그와 함께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도 않고, 동 귀비가 황손을 낳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자 악 귀비의 아들인 현엽을 악 귀비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동 귀비의 양자로 만들려고 하며, 결국 동 귀비가 죽자 크게 상심하고는 측근인 행삼이라는 승려의 조언에 따라 옥좌를 버리고 승려가 되려고 한다. 이에 경악을 한 신하들과 어머니 황태후 보르지기트씨가 찾아와서 황제를 말리며 설득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후가 질책하자, 순치제는 황제가 될 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로부터 떨어져 그 젖을 먹지도 못하고 관리와 외척, 황손들의 권력 다툼에 이용되었으며, 친부의 원수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을 아버지로 모셔야 했다면서 더는 황위에 있고 싶지 않다며 인생과 옥좌에 대한 환멸을 토로한다. 그리고 오직 동 귀비만이 자신을 혈육으로 대하여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도 말한다. 황태후는 모든게 행삼때문이라며 행삼의 스승을 시켜 그를 화형에 처하여 황제의 출가를 막으려 했지만, 끝내 순치제는 머리를 깎고 옥좌를 현엽에게 물려주며, 죽기 직전의 행삼으로부터 행치라는 법호를 받고 승려가 된다. 황태후는 속이 상했지만 자식의 뜻을 어찌못했고 결국 승낙하고 만다. 대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황실이 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순치제가 죽었다고 알도록 한다.
  • 신쥬신 건국사 - 여기서도 실권없는 소년군주로 참 안습하게 묘사하는데 어머니 뿐만 아니라 서로 연모하던 궁녀까지 도르곤에게 네토라레 당한다.

4. 둘러보기




[1] 이지스훤 다산 한(Ijishūn dasan han)[2] 이지스훤 다산[3]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4]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순치제 입장에서 도르곤은 황제를 깔고 뭉갠 권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더해 도르곤은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순치제가 도르곤을 증오했을 이유는 충분했다.[5] 원래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적자라 왕위 계승권만 따지면 형 홍타이지보다도 위였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아들들 중 홍타이지가 가장 세력이 크고 똘똘해서 도르곤이 감히 비벼댈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2대 황제로 홍타이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홍타이지 사후에는 실력과 세력을 키우긴 했지만 당연히 홍타이지 파벌이 반발하였다. 다만 호우거 또한 난폭했기 때문에 무투파 외에는 그리 인망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6] 팔기회의에서 도르곤이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홍타이지의 직속인 정황기와 양황기 혹은 상황기 출신들의 반발로(팔기 회의는 기주들이 대표권을 가지고 참가하는데, 두 황기의 기주는 홍타이지였으나 사망하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이 없었다.) 인해 내전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이에 두 황기의 의견을 받아서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고, 동생인 도르곤과 친모의 가문이 한미한 호오거는 모두 배제하니, 정식으로 인정받은 5비빈의 소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인 푸린이 황제로 결정되었다.[7] 원래대로라면 황실 최고 원로인 다이샨이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나이가 많은 연고로 그의 추천을 받아서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조카 지르갈랑이 섭정이 되었다.[8] 청나라 초반 때 몽골칸위+동맹으로 후방 위험제거를 위해서였으며 아버지인 홍타이지도 적모이자 고모할머니인 저르저르, 생모인 붐부타이, 이모 하르졸과 정략결혼했다. 보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누르하치는 처음 자신의 주변 부족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비교적 가까운 위치의 차하르부 몽골족과 동맹관계를 구성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서 홍타이지의 정실 저르저르가 시집을 왔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자기 부족의 이익을 위하여 조카 붐부타이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붐부타이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이후 순치제를 낳긴 했지만), 홍타이지의 의지에 따라서 붐부타이의 이복언니이자 기혼녀였던 하르졸도 후궁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푸진(부인)으로 인정받은 5비들은 모두 몽골 출신인데, 저르저르과 하르졸, 붐부타이, 이외에 나므정과 바트맛주는 차하르부 링단 칸의 푸진(부인)들로 몽골 여성들이였다.[9] 황후들은 모두 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첫번째 황후)와 조카손녀(두번째 황후)였다.[10] 아래에 서술된 순치제가 총애한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현비 동오씨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11] 현비 동오씨를 얼마나 총애했으면 아직 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황후 바로 밑의 지위이자 후궁 중에선 가장 존귀한 자리인 황귀비의 자리에 올릴 정도였다.[12] 효장문황후는 강희 연간에 죽었는데, 스스로 태종과 묻히길 원치 않았다. 다음 대인 옹정제까지 결론이 나지 않다가 결국 베이링 묘역 밖에 묻힌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형사 취수설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고국천왕산상왕의 비 우씨와도 비슷하다.[13] 황권을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제2의 도르곤을 막기 위해서였을지도.[14] 역법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화약 기술은 강희제가 삼번의 난에서 많이 써먹었다.[15] 시청자들의 흥미를 위해 첫사랑만 강조되는거지만 사실 순치제는 세조라는 격조 높은 묘호가 도르곤 덕분이라며 저평가받는다고는 해도 명청교체기 황제로서 어지간한 명나라 명군들 앞에 명함을 내밀어볼 정도로 평타 이상의 수완을 내는 황제였다. 그것도 10대의 나이에 친정을 하며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팔기제를 정비하며 남명의 영력제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급이었는데, 강희제조차도 그 나이에는 삼번의 난 앞에 멘붕하여 갈팡질팡하던걸 감안하면 더욱 높이 평가할만 하다. 단지 첫사랑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서 명민한 황제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 유달리 강렬하게 기억될 뿐이다. [16] 어진에 제법 멋들어지게 그려진 콧수염은 과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소년 황제였던 동치제, 광서제의 어진에는 수염이 거의 묘사되지 않았고, 광서제 역시 꼭두각시로나마 30대까지 살긴 했지만 수염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순치제의 어진은 콧수염을 진하게 강조하느라 소년 황제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노안으로까지 보이는데(사실 순치제 정도는 적당하다 싶을만큼 청나라 초창기의 황족들 초상화가 심하게 노안으로 그려진 예가 좀 있다. 도르곤처럼 30대 후반에 죽은 호오거는 무슨 일흔 넘게 장수한 강희제급의 노인으로 그려졌을 정도.), 실제로 콧수염을 길게 길렀대도 갓난아기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이고자 신경 쓰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